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걷는 부활 신앙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명작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평생 동안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일처럼 까마득히 밀어 두었던 죽음이라는 무거운 명제가 어느 날 갑자기 한 인간의 가장 가까운 생생한 현실로 들이닥치는 절박한 순간을 깊이 있게 응시합니다. 죽음은 삶의 평온한 순간에는 한낱 멀리 있는 철학적 주제나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하지만, 내 집 문앞에 당장 다가오는 순간 인간이 한평생 땀 흘려 쌓아 올린 모든 세속적 확신과 안전한 질서를 한꺼번에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가장 근본적이고 엄중한 질문이 됩니다. 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의 강해 설교가 깊이 있게 붙드는 자리도 바로 이 절망의 지점입니다. 칠흑 같은 죽음의 공포와 허무함 속에 가둔 채 신음하는 인간을 향해, 복음은 그저 막연하고 상투적인 위로나 감상적인 다독임으로 다가오지 않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찬란하고 단호한 구원의 선포로 다가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들리는 부활의 복음

현대 문명이 자랑하는 첨단 과학과 의학의 발전이 우리의 삶을 이전보다 훨씬 안전하고 풍요롭게 만들었다는 세속적 믿음은, 갑작스러운 재난이나 뜻하지 않은 불치병의 위기 앞에서 너무나 손쉽게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평소 일상의 바쁨 속에서 사람들은 죽음을 자신과는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남의 일처럼 여기며 살아가지만, 예고 없이 찾아오는 생명의 위기는 죽음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정면 과제임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바로 그 비극의 순간, 인간의 영혼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 뜨겁게 솟구쳐 오르는 것은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간절한 생존의 갈망이며, 이 아픈 갈망은 피조물인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의 참된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금 절박하게 묻게 만듭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두려움과 절망의 한복판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찾고, 참된 예배와 교회,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 앞으로 겸허히 걸어 나오는 까닭을 바로 이 생명에 대한 본능적 갈망의 지점에서 바라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과 26절에 기록된 주님의 거룩한 말씀은 인간이 맞닥뜨리는 죽음의 참혹한 실재를 결코 외면하거나 모른 척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죽음이 인간의 존재와 역사의 최종적인 마지막 결말이라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주님의 위대한 약속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활의 소망을 가리키고, 살아서 주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선언은 끊어지지 않는 영생의 지평을 향해 활짝 열려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찬란한 중심에는 인간 스스로의 힘과 도덕적 노력으로 죽음의 그늘을 극복할 수 있다는 헛된 인문학적 낙관론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친히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생명의 길과 소망이 있다는 굳건한 믿음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비어 있는 무덤은 그저 사랑하는 이의 상실을 미화하거나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관념적인 상징이 아니며, 죄와 사망으로 무겁게 닫혀 있던 인간의 비극적 결말이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한 은혜 안에서 전혀 새롭게 열렸음을 선포하는 가장 명확한 복음의 이정표가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강해 설교를 통해 부활을 단순히 심리적인 위안이나 내면의 환상, 혹은 주관적인 신화로 축소하여 다루는 모든 시도를 경계합니다. 텅 비어 있는 역사적 무덤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제자들의 진실한 증언이라는 든든한 토대 위에서, 성경 묵상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사망 권세를 짓밟고 다함 없는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역사적·신학적 사실을 굳게 붙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품는 부활의 소망은 고단한 세속 현실을 피하기 위한 헛된 상상이 아니며, 죽음과 어둠이 인류의 삶에서 최종적인 왕권을 행사하는 절대적 권세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증언하는 굳건한 믿음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말씀은 단순히 육체의 목숨이 다한 이후에 펼쳐질 아득한 내세만을 말하며 일상의 삶을 다독이는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설교의 깊은 흐름 속에서 파악하는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죄로 말미암아 이미 영적인 의의 길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사망을 향해 달려가는 비참한 존재이며, 주님의 부활이 주는 은혜는 그처럼 영적으로 이미 죽어 있는 실존을 다시 강력하게 살려내는 생명의 능력으로 다가옵니다. 인간의 죄와 죽음은 서로 완전히 떨어진 별개의 문제가 아니며, 그 참혹한 비극에 대한 해답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완벽하게 하나로 얽혀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생명을 향한 갈망이 헛된 망상이 아니라 참된 구원의 소망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무엇이 우리 인간을 이토록 참혹한 죽음의 그늘 아래 무릎 꿇게 만들었는가를 하나님 말씀의 밝은 빛 아래서 정직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어둠을 통과해 피어나는 은혜

장재형 목사는 성도가 주님의 부활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풍성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십자가의 깊은 어둠과 수난의 현장을 통과해야만 한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환희만을 조급하게 붙드는 것으로는 부활 신앙이 지닌 신학적 깊이와 진정한 무게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그분이 도대체 왜 그렇게 참혹하게 죽으셔야만 했는지,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자신의 거룩한 몸과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셨는가를 아프게 물을 때 비로소 부활은 값싼 승리의 구호에 그치지 않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친히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사건으로 비로소 경험됩니다. 로마서 4장 25절의 말씀은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영광스러운 부활을 한 문장 안에서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거룩한 구속사의 사슬로 묶어 보여줍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엄중하고 거룩한 율법적 선포 앞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그 무거운 죄의 값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장 비참한 죄인의 자리에 친히 서셔서 인간의 온갖 죄악과 죽음의 짐을 짊어지셨다는 대속의 복음 메시지는,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결코 인간의 끔찍한 죄를 가볍게 덮어주는 얼렁뚱땅한 관용이 아님을 분명히 비추어 줍니다. 주님의 십자가 달리심에는 죄의 엄중한 무게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그 무서운 형벌의 잔을 독생자에게 대신 담당시키시는 그 깊은 십자가 사랑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함께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이 역사적 사실은, 인간의 구원이 결코 인간의 도덕적 공로나 자기 정당화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에게 거저 주어진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에서 비롯된다는 깊은 신학적 통찰을 열어 줍니다.

설교는 로마서 5장의 구속사적 맥락을 따라, 인류의 첫 조상인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죄와 사망이 들어왔고, 오직 또 다른 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의 새 시대가 활짝 열렸음을 차분히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곧 온 인류의 실존적인 ‘우리의 죽음’이 되고, 그분의 다시 살아나심이 곧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생명’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그분께서 온 인류를 대표하는 참된 머리로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구원이란 멀리 서서 관조하듯 바라보는 남의 나라 사건이 아니며, 오직 온전한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께 영적으로 접붙여진 성도가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을 자기 자신의 실제적인 삶과 실존의 현실로 겸허히 받아들이는 거룩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그분의 사역의 마지막 결말이었다면, 온 세상의 복음과 성도의 소망은 차가운 무덤 앞에서 영원히 멈추어 섰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대속의 완성이 참된 영원한 생명으로 온전히 이어졌음을 온 우주 앞에 확증하며, 죄와 사망의 어두운 권세가 결코 승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담하게 선포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웅장한 고백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나의 교만하고 죄악 된 옛 삶의 완전한 죽음이 되고, 그분의 다시 살아나심이 내 심령 안에서 끊임없이 작동하는 거룩한 새 생명의 출발점이 될 때, 성도의 믿음은 단순한 관념적 지식을 넘어 존재 전체의 삶의 방향을 180도 바꾸어 놓습니다. 십자가는 영광스러운 부활 없이는 결코 완성될 수 없으며, 부활 역시 아픔이 서린 십자가를 지운 채 제대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이 둘이 성도의 가슴속에 온전히 함께 놓일 때, 내면의 죄에 대한 참된 자각은 절망의 늪으로 떨어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숭고한 은혜 또한 값싼 위안으로 흐르지 않게 됩니다.

빈무덤을 향해 달린 사랑이 만난 생명

부활의 첫 아침을 가장 따뜻하고 아름답게 비추는 성경의 장면 속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흘린 거룩한 눈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모든 희망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여겨지는 절망의 무덤을 향해 새벽 일찍 걸음을 옮겼고, 비록 주님께서 돌아가셨을지라도 그 거룩한 시신이라도 자신이 정성껏 모셔 가겠다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차가운 그 자리를 차마 떠나지 못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마리아의 이 깊은 마음을 죽음보다 강한 숭고한 사랑의 모습으로 바라봅니다. 십자가의 깊은 수난과 아픔을 가슴 깊이 새긴 사람만이, 마침내 맞이하게 되는 부활을 그저 가벼운 환희나 세속적 기쁨이 아니라 사랑이 마침내 사망의 권세를 온전히 이겨낸 위대한 구원 사건으로 깊이 있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텅 비어 있는 빈무덤은 마리아가 바친 순전한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온 천하에 드러내 보여주었지만, 정작 마리아 자신은 처음부터 자기 곁에 가깝게 서 계신 부활의 주님을 속히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녀를 향해 던져진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는 주님의 친절한 질문은, 그녀가 절망하며 슬퍼하는 바로 그 눈물의 한가운데에 이미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영으로 서 계심을 똑똑히 보여 줍니다. 인간의 눈물이 너무나 크고 깊으면, 때로는 바로 곁에 현존하여 계신 주님의 찬란한 소망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수 있으며, 세속 현실의 고통이 너무나 깊으면 생명의 주님이 내 곁에 가까이 다가와 계시다는 사실조차 낯설고 생소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진실한 성경 묵상은 눈앞의 슬픔을 무조건 서둘러 지워버리려는 헛된 시도가 아니라, 그 깊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 내 이름을 따뜻하게 부르시는 살아 계신 주님의 음성을 다시금 인격적으로 듣는 복된 일입니다.

이 가슴 뭉클한 장면은 오늘을 살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과연 무엇으로 살아 숨 쉬고 있는가를 깊이 있게 묻게 만듭니다. 아무리 웅장하고 아름다운 예배당 건물이 서 있고, 과거에 일어났던 찬란한 영적 기억과 역사들이 수놓아져 있다 할지라도, 주님을 향한 예배자의 진실한 사랑과 영적 갈망이 사라져 버린다면 그 교회는 살아 계신 주님의 역사하심을 오늘 증언하기보다는 그저 지나간 과거의 화려한 흔적만을 보존하는 종교적 박물관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시신을 정성껏 귀히 모시고자 했던 마리아의 마음도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무덤 너머에 살아 계신 주님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사랑과 열정이 없다면 부활의 생명은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역사하는 사건이 되기 어렵습니다. 쇠퇴해 가는 교회를 다시금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참된 능력은 외형적인 장엄함이나 세속적인 프로그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까지 주님을 온전히 만나고자 하는 성도들의 진실한 갈망에서부터 강력하게 시작됩니다.

부활 신앙은 오늘의 삶을 어디로 이끄는가

장재형 목사가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강조하는 부활 신앙은, 그저 일 년에 단 한 번 찾아오는 부활절 하루의 일시적인 감동이나 머릿속 교리적 동의의 수준에 결코 머물지 않습니다. 죽음이 우리 삶의 절대적인 끝이 아니라는 굳건한 믿음은, 삶의 온가지 두려움을 인위적으로 지워내는 주술적인 주문이 아니라, 이 세상의 온갖 두려움과 공포가 더 이상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새로운 영적 중심축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날마다 인격적으로 함께 살아간다는 성도의 고백은, 내가 내 삶의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주관하던 자기중심적인 자리에서 겸허히 내려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걸어가신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 그리고 무조건적인 봉사와 섬김을 내 삶의 참된 방향이자 목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빛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성도에게는, 이 땅에서 겪는 잠깐의 물질적 손해나 세속적인 고난이 더 이상 존재의 최종적인 파멸이나 실패로만 해석되지 않는 법입니다.

이 위대한 부활의 믿음은 성도 개인의 내면적 평안을 넘어, 그들이 모인 거룩한 공동체의 외형과 체질까지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그저 부활의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가르치는 장소에 그쳐서는 안 되며, 삶에 절망한 수많은 영혼들이 찾아와 다시금 하늘의 소망을 배우고, 세상의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힌 이들이 용기 있게 사랑을 선택하며 걸어가는 거룩한 생명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십자가의 깊은 수난을 묵상한 이후에도, 성도는 부활의 참된 생명과 승리의 기쁨을 오랫동안 지속해서 되새겨야 한다는 장재형 목사의 권면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저 절기의 정해진 일정표보다 훨씬 더 깊고 풍성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과 오랫동안 함께 머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새롭게 깨닫고 간절한 기도 속에서 다음 걸음을 신중히 준비했듯이,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 역시 부활의 절기를 그저 스쳐 지나쳐 버리지 말고, 부활의 생명력이 나의 매일의 삶의 거룩한 습관과 인격이 될 때까지 주님 앞에 오래도록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의 그 어떤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숭고한 사랑의 정확한 표징이며, 그분의 영광스러운 부활은 그 십자가 사랑이 실제로 사망의 무서운 권세를 온전히 짓밟고 승리하여 영원한 생명의 길을 활짝 연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품는 참된 부활 신앙은 인간의 한계와 죽음을 아예 모르는 척 모면하려는 무책임한 낙관주의가 아니며, 이 땅에 실재하는 죄의 무거운 무게와 죽음의 두려움, 그리고 흘러내리는 눈물과 비통함을 정면으로 곧게 바라보면서도 그것들이 결코 인간 존재의 마지막 최종 선언이 될 수 없음을 굳게 믿는 찬란한 소망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우리 삶에 고통스러운 무덤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어두운 무덤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구주로 믿는 거룩한 성도들을 영원히 가두어 둘 수 없다고 온 천하에 대담하게 선언할 뿐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도, 이제는 참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느껴지는 지독한 절망의 자리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중압감과 도래할 죽음에 대한 깊은 두려움, 멈추지 않는 눈물과 비통함, 그리고 점차 영적인 생명력을 잃어가는 피폐한 공동체의 모습이 마치 소망이 완전히 사라진 차가운 무덤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 계신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이 완전히 멈춘 뒤에야 비로소 멀리서 찾아오시는 분이 결코 아니며, 오늘 슬픔으로 깊이 울고 있는 바로 그 절망의 곁에 친히 서셔서 생명의 새로운 길을 활짝 여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오늘 나는 내 삶의 어떤 문제와 상황을 향해 너무나 조급하게 ‘끝’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미 내 삶 바로 곁에 가까이 와 계신 부활의 주님을, 혹시 내 안의 슬픔과 고통이 너무나 가득하여 아직 온전히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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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의 생명의 연회에서 찾아오는 갈증과 초월적 역설: 가나의 표적을 통해 바라본 복음의 대전환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실존이라는 무대가 끊이지 않는 축제의 장처럼 찬란하게 이어지기를 열망합니다. 영혼을 채우는 기쁨이 머물고, 가슴 벅찬 만남이 존재하며, 하늘의 축복과 내일에 대한 눈부신 기대가 마르지 않는 삶—그것이 인류가 공통으로 꿈꾸는 이상적인 인생의 풍경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의 거친 대지는 결코 그토록 낭만적인 궤적만을 그리며 흘러가지 않습니다. 어느 날 예기치 않게, 우리가 평생을 바쳐 촘촘하게 준비해 왔던 인생의 밑천이 바닥을 드러내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마음에 유희와 기쁨이 신기루처럼 증발해 버리며, 인간의 유한한 힘과 지혜로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절망적인 결핍의 심연이 눈앞에 폭로되곤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화려한 조명 아래 잔치가 성대하게 지속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의 장막을 들춰보면 이미 영혼을 적실 생명의 포도주가 완전히 말라버린 상태—이러한 실존적 위기의 한복판에서, 요한복음 2장에 등장하는 가나의 혼인 잔치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양심을 향해 묵직한 영성의 언어로 말을 걸어옵니다.

요한복음 2장의 서두를 장식하는 가나의 혼인 잔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의 공생애 사역을 개시하시며 인류 앞에 내보이신 기념비적인 ‘첫 번째 표적’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신학적으로 가장 예리하게 주목해야 할 지점은, 성경의 저자가 이 경이로운 사건을 묘사할 때 인간의 눈을 현혹하는 단순한 초자연적 ‘기적(Miracle)’이라는 단어에 가두지 않고, 무언가 거대한 본질을 지시하는 ‘표적(Sign, $sēmeion$)’이라는 정교한 단어로 명명했다는 점입니다. 표적은 단순히 눈앞에서 펼쳐진 가시적이고 놀라운 현상 그 자체로 기능이 종결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영적 이정표와 같아서, 그 사건이 일어난 현상적 껍질을 뚫고 들어가 그 배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어떠한 신성한 존재이신지, 그리고 그분이 온 인류에게 가져오실 구원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가리키는 고도의 영적 계시입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는 요한복음의 이 거룩한 본문을 강해하면서, 평범한 물이 붉고芳醇(방순)한 포도주로 질적 전환을 이룬 이 사건이 단순히 한 시골 마을의 잔칫집이 맞이한 사회적 파산과 일시적인 당혹감을 해결해 준 차원의 일화가 결코 아님을 명확히 규정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안에서 생명력을 상칠한 옛 시대의 모든 유산과 종교적 형식이 완벽하게 새로워지며,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과 가난함이 하늘의 영원한 풍성함으로 뒤바뀌게 됨을 선포하는 장엄한 구속사적 복음의 선언이라는 것이 그의 신학적 강조점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담긴 서사가 오늘날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우리의 심령을 깊이 뒤흔들며 뜨거운 울림을 주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 잔칫집의 풍경이 다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바로 오늘날 나의 삶, 우리 인생의 정직한 초상화와 너무나도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화려한 포부와 설레는 기쁨을 안고 인생의 잔치를 시작하지만, 세월의 풍파를 지나다 보면 어느 순간 필연적으로 뼈아픈 부족함의 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랑으로 가득 차야 할 인간관계의 포도주가 차갑게 식어 바닥나고, 삶을 지탱하던 육체와 정신의 건강이라는 포도주가 고갈되며, 하늘을 향해 타오르던 믿음의 포도주가 흔들려 증발하고, 마침내 사명과 헌신의 제단 위에 부어지던 거룩한 포도주마저 메말라 버리는 위기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카메라는 이러한 절망과 탄식의 자리에서 비극적으로 초점을 흐리며 이야기를 끝맺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의 모든 계산과 자원이 완벽하게 파산해 버린 바로 그 결핍의 지점, 그 어두운 공백기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첫 표적이 시작되는 거룩한 산고의 자리였다고 우리에게 웅변하고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가 고발하는 인간적 한계와 결핍의 영적 실상

고대 유대 사회에서 혼인 잔치라는 것은 단지 두 남녀가 만나 결합하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경사를 넘어선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한 가문과 가정이 새롭게 언약 위에 세워지는 엄숙한 날이었으며, 마을 공동체 전체가 일상의 노동을 멈추고 함께 어우러져 하늘의 기쁨을 나누는 거대한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잔치는 보통 수일 동안 성대하게 지속되는 것이 관례였으며, 찾아온 하객들을 풍성하고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것은 혼주와 신랑 신부의 사회적 명예 및 가문의 존엄성과 직결되는 중차대한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잔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축제의 핵심인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은 단순히 준비한 음료의 양이 조금 부족했다는 수준의 물류적 고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기쁨이 잔인하게 중단됨을 의미하는 것이며, 가문 전체가 지울 수 없는 수치와 사회적 파산의 위기에 직면했음을 뜻하고, 나아가 인간이 지혜를 짜내어 정성껏 준비한 모든 지상 사물의 노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한계에 도달하고 마는지를 상징적으로 고발하는 처절한 장면이었습니다.

바로 이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 상황의 심각성을 예리하게 간파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인간적인 분주함으로 대안을 찾아 헤매는 대신, 조용히 예수께 나아가 짤막하지만 묵직한 한 문장을 건넵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이 외마디 같은 고백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깊고 순전한 기도의 정수를 우리에게 계시해 줍니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 앞에서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며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태의 원인이 누구의 준비 부족에 있는지, 누구의 잘못인지를 따져 묻는 정죄의 우를 범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이 어머니라는 권위를 가지고 주님을 향해 “지금 당장 어디서 포도주를 구해오라”는 식의 해결 방법을 오만하게 지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오직 인간이 마주한 비참한 부족함과 실존적 빈자리를 있는 그대로, 아무런 포장 없이 주님의 주권 앞에 날것으로 가지고 나아갔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을 부르는 참된 믿음의 시발점입니다. 기도의 본질이란 때로 세련된 문장과 많은 말을 늘어놓는 종교적 웅변이 아니라, 나 자신의 완전한 무능함과 내 삶에는 더 이상 선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는 결핍의 실상을 주님 보좌 앞에 정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는 침묵의 투항입니다.

우리의 신앙 걸음 또한 마리아가 마주했던 그 정직한 폭로의 자리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인생의 여정 중 그 어느 골짜기를 지나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가식의 가면을 벗어 던진 채 “주님, 지금 제게는 포도주가 없습니다”라고 눈물로 고백할 수 있는 영적 정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 안에 영혼들을 품을 사랑이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가정을 이끌 지혜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사명을 감당할 영육 간의 힘이 고갈되었습니다. 신앙의 기쁨은 사라진 지 오래고, 믿음의 기초가 모래성처럼 흔들리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차마 부끄러워 말하기 힘든 치명적인 결핍의 부끄러움이라 할지라도,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의 발치에는 얼마든지 날것 그대로 쏟아놓을 수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서사가 이토록 가슴 절절한 복음의 능력이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름 아닌 바로 그 수치스럽고 부족한 인간의 빈자리에 함께 동석해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객들은 아직 잔치의 이면에 흐르는 치명적인 위기와 파산의 징후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만물의 주시요 통치자이신 주님은 이미 그 결핍의 현장을 눈동자처럼 바라보시며 일하실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요한복음 2장 강해설교에서 가장 묵직하게 가슴을 울리는 영적 강조점 역시 이 지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인간이 겪는 존재론적 가난함과 사소한 삶의 결핍을 차갑게 외면하거나 냉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의 복음은 인간의 완전한 부족함과 밑천의 바닥남이야말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비로소 개입하시는 ‘거룩한 시작의 무대’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합니다.

인생의 항아리가 아집과 자기 충만으로 가득 차 있는 동안에는 하늘의 신령한 것을 채울 공간이 없습니다. 오직 철저하게 비어 있는 항아리가 준비되어 있어야만 하나님의 신성한 채우심을 경험할 수 있으며, 내가 가진 인간적 포도주가 처절하게 떨어진 자리가 존재해야만 비로소 주님이 친히 빚어내시는 ‘하늘의 새 포도주’가 주는 극상의 기쁨이 온 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독교 신앙은 자기 자신의 의로움과 부요함을 세상 앞에 자랑하며 과시하는 바리새인들의 길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신의 비참한 파산 상태와 부족함을 숨김없이 주님께 열어 보이며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하는 겸비한 자들의 좁은 길입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 속에 감추어진 구속사적 경륜과 기다림의 신비

자신의 결핍을 고백하는 마리아의 음성을 들으신 예수님은, 인간의 기대를 단번에 꺾어버리는 듯한 뜻밖의 난해하고도 엄중한 대답을 돌려주십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한복음의 독특한 문맥 속에서 이 ‘때($hōra$)’라는 신학적 단어는 결코 인간들이 일상 속에서 계산하는 연대기적 시간표($chronos$)나 기회의 타이밍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 전체의 서사를 지배하는 거대한 구속사적 단어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홀로 짊어지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그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써 마침내 완성하실 ‘구원의 결정적 순간($kairos$)’이자 하늘의 영광을 입으실 구원의 정점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이 땅 위에서 행하신 모든 발걸음과 치유, 그리고 가르침의 사역은 단 하나도 우연히 일어난 것이 없으며,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 정하신 이 거룩한 ‘때’의 자석에 이끌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 사건은 단순히 어느 한 가정의 일시적인 잔치 붕괴 위기를 수습해 준 사소한 해프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장차 주님이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쏟으심으로 완성하실 영원한 구원의 영광과 천국 대연회의 기쁨을 역사 속에 미리 당겨와 보여주신 거룩한 ‘종말론적 예표’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생활의 가장 깊은 골짜기인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가진 필연적인 간극과 영적 기다림의 신비를 배우게 됩니다. 육신을 입은 연약한 인간은 언제나 눈앞의 고통과 결핍이 당장 이 순간에 해결되기를 갈망합니다. 지금 당장 내 삶에 포도주가 떨어져 수치스러우니, 지금 이 순간에 즉각적으로 그 구멍이 채워지기를 주님께 악을 쓰며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단지 우리의 육신적인 필요와 이기적인 욕구를 즉각적으로 해결해 주는 ‘종교적 자판기’의 자리에 머물기를 거부하십니다. 그분은 도리어 우리가 겪는 처절한 결핍의 계절을 통과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시선을 땅의 것에서 하늘의 것으로 돌리게 하시고, 고난의 터널 속에서 더 깊은 구원의 영적인 의미를 발견하도록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예수님은 비록 육신의 어머니였던 마리아의 요청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지만, 동시에 그 사소한 잔칫집의 위기를 하나님의 거대한 우주적 구원 역사라는 거시적인 관점 안에서 재해석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일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동치는 인생의 바다 위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믿음의 중요한 균형이자 영적 성숙의 지표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가 흘리는 작은 눈물 한 방울, 일상 속의 사소한 필요에도 세밀하게 귀를 기울이시고 깊은 관심을 가지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선하신 관심은 단순히 눈앞의 닥친 문제를 임시방편으로 해결해 주는 얕은 수준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결핍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얕은 물가에 머물던 우리의 영혼을 더 깊은 믿음의 세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거룩한 성화의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포도주가 완전히 동이 나버린 그 사건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잔치의 파멸이자 위기였지만,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 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온 천하에 눈부시게 드러내는 복된 통로로 변모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수많은 위기와 결핍의 순간들 역시 영적 원리는 동일합니다. 우리의 좁은 안목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실패와 낭패의 순간처럼 보일지라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신성한 시간표 안에서는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은혜와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최적의 무대가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옛 율법의 돌항아리에 부어지는 말씀의 물: 이성을 초월한 순종과 대가의 지불

예수님은 잔치방의 하인들을 향해, 그곳에 정적을 지키며 서 있던 돌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라는 뜻밖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 거대한 돌항아리들은 단순한 생활용수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유전처럼 지켜오던 엄격한 ‘정결 예식’을 수행하기 위해 물을 담아두던 종교적 도구들이었습니다. 즉, 외면의 흙먼지는 씻어낼 수 있지만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똬리 틀고 있는 죄악의 본질은 단 한 방울도 씻어내지 못하던, 형식주의로 치달은 ‘옛 율법의 그릇’을 상징하는 정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차갑고 굳어버린 율법의 항아리에 생명의 말씀과도 같은 ‘물’을 채우게 하시고, 마침내 그 물의 본질을 바꾸어 복음의 포도주로 전형시키셨습니다. 이 정교한 장면은 숨이 막힐 정도로 깊은 기독교 신학의 정수를 품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와 의문(儀文)에 매여 정결을 추구하려다 결국 기쁨을 잃고 텅 비어버린 율법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찾아온 은혜와 진리의 새 언약의 기쁨이 터질 듯이 담기게 된 것입니다. 정죄와 의무의 사슬 아래에서 신음하던 인간의 절망적인 자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은혜와 풍성한 생명의 축제 자리로 완벽하게 변화된 순간입니다.

당시 그 현장에 있던 하인들은 결코 주님의 이 신비로운 구속사적 경륜과 신학적 의미를 머리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움직인 지성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상황에 대한 주님의 친절한 설명도, 납득할 만한 논리적 정당성도 전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잔치 주빈들이 포도주를 달라고 아우성을 치며 가문의 명예가 위태로운 마당에, 왜 우물가에 가서 무거운 물을 길어와 정결례 항아리에 부어야 하는지, 이 비효율적인 노동이 어떻게 눈앞의 거대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지 그들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합리를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입에서 떨어진 말씀 그대로 움직였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행보를 기록하면서, 그들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되 “아귀까지(to the brim)” 가득 채웠다고 매우 세밀하게 고발합니다. 이 ‘아귀까지 채웠다’는 짤막한 수식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순종의 태도가 얼마나 충실하고 흠이 없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거룩한 이정표입니다. 하인들은 주님의 명령에 마지못해 대충 시늉만 내며 항아리를 채우지 않았습니다. 의심의 안개가 자욱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자신이 지불할 수 있는 최고의 노동과 열정을 다해 항아리의 가장 높은 목구멍까지 물을 가득 들이부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눈앞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먼저가 아니라, 말씀하신 분의 권위 앞에 무릎 꿇는 ‘순종’이 언제나 압도적인 먼저였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계산] -> [완전한 멈춤과 자기부인] -> [아귀까지 채우는 충실한 순종] -> [초자연적 본질의 변화(포도주)]

우리가 걸어가는 고독한 신앙의 여정 속에서도 이 가나의 하인들이 보여준 순종의 자리는 영적 도약을 위한 필수적인 관문으로 다가옵니다. 현대 성도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타락한 이성의 법정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소환하여, 모든 것을 인간의 얕은 지혜로 이해하고 납득한 뒤에야 비로소 순종의 걸음을 떼려 합니다. 내 마음에 완벽히 납득이 되고, 가시적인 결과와 유익이 명확히 계산되어야만 겨우 종교적인 무거운 몸을 움직이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위대한 역사들은 언제나 인간의 이해보다 ‘순종의 발걸음’이 앞선 자들의 핏자국 위에서 기록되었습니다. 하인들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붓는 그 힘겨운 노동의 시간 동안에는, 여전히 눈앞에 붉은 포도주의 기적은 단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항아리 안에는 맹물만이 가득 흘러넘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해되지 않는 말씀에 자신을 꺾어 복종시키고, 마지막 물동이를 들이붓는 그 무모해 보이는 순종의 길 위에서, 마침내 물은 그 존재의 성분을 바꾸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와 신비는 골방에 앉아 설명을 다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지적인 구경꾼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방이 가로막힌 현실 속에서도 오직 주의 말씀 앞에 자신의 삶과 의지를 통째로 내어던지는 자들의 처절한 순종의 자리에서 비로소 불꽃처럼 시작되는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의 강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영웅들의 거창하고 거대한 능력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자들의 ‘작은 순종’을 통해 직조된다는 영적 비결을 강력하게 역설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세상을 뒤흔들 만한 대단한 자원이나 초인적인 능력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가나의 하인들이 행한 일은 그저 일상적인 노동에 불과한, 우물에서 물을 길어 항아리에 부은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미천하고 작은 순종의 제물을 자신의 손에 받으사 축사하시고 사용하셨을 때, 그것은 수치로 끝나갈 뻔한 한 가문의 연회를 기적적으로 소생시키는 거룩한 생명의 통로로 탈바꿈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서도 이 영적 법칙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내 자아를 꺾는 작은 기도 한 자락, 지체를 향한 사소한 섬김의 손길, 은밀한 죄를 쏟아놓는 정직한 회개, 그리고 말씀 앞에 반응하는 아주 작은 순종의 행동들이 우주의 주인이신 주님의 손에 붙들릴 때, 우리의 무맛이고 무색한 ‘맹물 같은 인생’이 세상을 치유하고 살려내는 ‘기적의 포도주’로 변화되는 구속사적인 은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처음보다 나중이 찬란한 복음의 우상향 법칙

마침내 하인들이 순종함으로 떠다 준 항아리의 물이 포도주로 화한 뒤, 그것을 맛본 연회장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신랑을 급히 불러 가슴 벅찬 목소리로 외칩니다. 세상의 모든 잔치 기획자들은 먼저 하객들의 미각이 살아있을 때 가장 최상급의 좋은 포도주를 내어 대접하고, 사람들이 술에 취해 감각이 둔해질 때쯤 질이 떨어지는 낮은 것을 내놓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세상의 경제학이자 관습인데, 어찌하여 이 집은 잔치가 끝나가는 지금까지 이토록 깊고 향기로운 ‘최고급 포도주’를 감추어 두었다가 이제야 내놓았느냐는 찬탄이었습니다.

연회장의 이 감격스러운 외침은 가나의 혼인 잔치 표적이 우리에게 계시하고자 하는 영적 메시지의 거룩한 정점이자 절정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결핍 위에 베풀어주신 하늘의 은혜는, 단순히 인간이 실수로 축낸 부족한 양을 겨우 땜질하여 메우는 수준의 임시방편적인 보상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친히 창조해 내신 그 포도주는 인간이 이전에 맛보았던 그 어떤 천연적인 포도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본질과 차원이 완전히 다른 극상의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파산과 결핍을 겨우 숨겨주는 소극적인 구원이 아니라, 혼인 잔치의 영적 질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뒤바꾸어 버리는 복음의 압도적인 풍성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복음이 가진 위대한 역사적 방향성이자 ‘우상향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 타락한 죄악 세상의 모든 원리와 유산들은 대개 처음에는 눈이 부시도록 화려하고 찬란하게 시작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급격하게 부패하고 약화되어 종국에는 비참한 파멸과 허무의 종착역으로 미끄러집니다. 세상이 주는 청춘과 쾌락은 처음에는 터질 듯한 열정이 있고, 가슴 뛰는 감동이 있으며, 영원할 것 같은 기대감을 주지만, 세월의 흐름 앞에 결국 기쁨의 온도는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아름답던 관계는 낡아 문드러지며, 땅에 두었던 모든 소망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절벽 앞에서 희미하게 바스러질 뿐입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 새롭게 열리는 은혜의 잔치는 그 흘러가는 궤적이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비록 그 과정 속에 혹독한 겨울과 십자가의 좁은 문을 통과하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만물의 통치자이신 주님이 인생의 항아리에 개입하시고 좌정하시는 순간, 우리의 나중 삶은 처음 삶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고 아름다워집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단순히 에덴동산의 무구했던 과거 상태로의 소박한 회복(Restoration)을 넘어,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합하여 완성되는 훨씬 더 깊고 영광스러운 ‘새 가치로의 재창조(New Creation)’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복음의 법칙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삶에 현실적인 고난이나 아픔이 모두 사라지고 우리가 원하는 이기적인 방식대로 모든 경제적, 환경적 조건들이 즉시 평탄하게 좋아진다는 식의 저급한 번영신학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참된 신앙의 길 위에는 여전히 눈물 골짜기가 존재하며, 뼈를 깎는 인내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하는 기나긴 침묵의 터널이 필연적으로 수반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 붙들고 끝까지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붙들린 우리의 인생은 궁극적으로 사망의 권세를 깨부수고 영원한 생명과 하늘의 기쁨을 향해 나아간다는 종말론적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갈보리 언덕의 처절한 십자가의 죽음이 마침내 부활의 찬란한 영광으로 이어졌듯이, 오늘 우리가 겪는 처절한 결핍은 도리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는 은혜의 문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조롱과 수치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가장 고결한 은혜의 자리가 될 수 있으며, 내 힘이 꺾인 실패의 자리는 주님이 우리를 새로운 사명의 도구로 부르시는 위대한 출발선이 될 수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바로 이 기적 같은 복음의 위대한 우상향 방향성을 한 편의 서사시처럼 아름답고 웅장하게 증언해 줍니다.

오늘, 우리의 메마른 가나의 현장에 찾아오시는 구원자를 향한 정직한 고백

가나의 혼인 잔치가 고발하는 영적 현실과 위로는, 관념적인 상상 속에 머무는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팍팍한 삶의 현장에 그대로 적용되는 지극히 실제적이고 역동적인 복음입니다. 우주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고 웅장한 성전의 보좌나 신학자들의 메마른 토론장 속에서만 제한적으로 일하시는 격리된 신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모여 밥을 먹고, 울고 웃으며, 일상적인 한계 부딪혀 발을 동동 구르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평범한 혼인 잔치의 한복판, 우리의 가난한 생활 문제 한가운데에 친히 찾아오셔서 역사하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삶의 영역을 거룩한 영적 영역과 속된 세속적 영역으로 이분법적으로 무 자르듯 나누어, 교회 안에서만 경건한 척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이중적인 종교적 태도에 거대한 신학적 타격을 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 의자에 앉아 드리는 엄숙한 예배의 형식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돌아가 마주해야 하는 깨어진 가정이 비명, 눈물 어린 일터의 중압감, 꼬여버린 인간관계의 실타래, 육신의 질병과 연약함, 당장 내일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물질의 유한함,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해 밤마다 쏟아내는 고독한 눈물의 모든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전 실존을 눈동자처럼 아끼시고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보기에 지극히 사소하고 세속적이라 여겨지는 부끄러운 문제들조차도, 주님의 보좌 앞에서는 가장 고결하고 강력한 기도의 제목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자존심 상해 말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영육 간의 결핍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피 묻은 발치 앞에는 부끄러움 없이 다 쏟아놓을 수 있습니다. 결핍을 대하는 마리아의 기도는 현란한 수식어 없이 지극히 단순하고 정직했습니다. “포도주가 없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복잡한 종교적 언어를 걷어내고, 주님 앞에 엎드려 이토록 단순하고 정직하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님, 제 메마른 영혼 속에 구원의 기쁨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주님, 거친 풍파로 얼룩진 제 가정에 서로를 품을 사랑의 포도주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주님, 막막한 현실의 벽을 돌파할 하늘의 지혜가 제게는 없습니다. 주님, 세상의 조롱 앞에 제 연약한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완전한 가난함과 바닥남을 감추지 않고 주님 앞에 날것으로 드러내는 정직한 파산 선고야말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가 비로소 우리 삶에 개입하여 침투해 들어오는 거룩한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이처럼 정직한 눈물로 기도의 자리를 파수한 성도들은, 마땅히 자신의 삶을 쳐서 복종시키는 순종의 제단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하인들을 향해 던진 마리아의 마지막 당부는 가나의 이적을 완성하는 결정적인 영적 열쇠가 됩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이것이 가나의 혼인 잔치가 오늘날 우리에게 남기는 기도의 핵심적인 종착지입니다. 참된 기도는 골방의 감정적 카타르시스나 뜨거운 부르짖음 자체로 종결되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주님의 뜻에 나의 온 삶을 꺾어 복종시키는 ‘실천적 순종’의 행보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주님 앞에 나의 처절한 결핍과 무능함을 눈물로 고백했다면, 이제는 내 이성과 자아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주님이 내 영혼의 세미한 음성 속에 명령하시는 가장 작은 일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비록 내 이성으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지라도 “가서 먼저 화해하고 손을 잡으라” 하시면 나의 교만을 꺾고 화해의 걸음을 떼어야 하며,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잠잠히 나의 일하심을 기다리라” 하시면 불안의 요동을 멈추고 묵묵히 기다려야 하고, “네게 남은 마지막 작은 자원을 털어 항아리의 아귀까지 채우라” 하시면 계산기를 두드리지 말고 묵묵히 온 삶을 다해 그 자리를 채워내야 합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초자연적인 창조의 권능은 오직 주님의 전능하심으로만 일어나는 역사이지만, 그 거룩한 권능이 흘러가는 은혜의 통로에는 언제나 인간의 자아를 장사 지낸 ‘믿음의 순종’이라는 파이프라인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장의 가나 혼인 잔치 서사가 온 천하에 우뚝 서서 선포하는 복음의 종극적인 결론은 명확하고 위대합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비참한 결핍과 파산을 하늘의 찬란한 풍성함으로 뒤바꾸시는 전능하신 왕이십니다. 인간의 죄악이 가져온 모든 수치와 조롱을 하늘의 거룩한 기쁨과 영광으로 바꾸시는 능력의 주이십니다. 아무런 생명력 없이 씻어내기만 하던 율법적 정결의 물을, 영혼을 춤추게 만드는 새 언약의 구원의 포도주로 바꾸시는 은혜의 주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첫 표적이 가리키던 궁극적인 지점, 곧 갈보리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과 삼일 만의 찬란한 부활을 통해, 인류를 옥죄던 영원한 절망과 죽음의 저주를 영원한 승리와 생명의 축제로 뒤바꾸신 온 우주의 구세주이십니다.

장재형 목사의 가나 혼인 잔치 강해설교가 오늘날 위기에 직면한 이 세대의 성도들에게 던지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타협 없이 선명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내 삶에 아무런 결핍이 없는 척, 아무런 상처와 문제가 없는 척 거룩한 종교의 가면을 쓰고 위선을 떠는 율법주의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참혹한 부족함과 밑천의 바닥남을 온 천하에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 깨어진 마음의 파편들을 가지고 주님의 은혜 보좌 앞으로 겸비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생각과 이성을 압도하는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 앞에서, 비록 작고 미천할지라도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순종의 발걸음을 묵묵히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얕은 지혜로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전의 드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평생을 채우지 못해 텅 비어 있던 외로운 돌항아리들이 하늘의 신령한 신성으로 가득 채워지고, 아무런 맛도 색도 없던 밋밋한 맹물 같은 우리의 일상이 온 공동체를 살려내고 치유하는 생명의 포도주로 질적 전환을 이루며, 인간의 힘으로는 이제 모든 잔치가 끝났다고 절망하며 마침표를 찍으려던 그 실패의 자리에, 처음보다 훨씬 더 찬란하고 완벽한 하나님의 나중 은혜가 폭포수처럼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의 삶의 한복판에도, 남들에게는 말 못 할 포도주가 완전히 떨어져 버린 차가운 빈자리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영혼을 채우던 구원의 기쁨이 사라져 버린 자리, 사명을 감당할 영육 간의 힘이 부족하여 주저앉은 자리, 사랑하던 이들과의 관계가 칼날처럼 어그러져 피 흘리는 자리,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어 미래가 안개처럼 불안한 절망의 자리. 그러나 그 빈자리를 바라보며 내 인생의 잔치는 여기서 비참하게 끝이 났다고 낙심하며 단정 짓지 마십시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어떤 화려한 자리가 아니라, 바로 그 인간의 처절한 결핍과 수치가 폭로된 자리에서 자신의 첫 번째 영광스러운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주님은 2,000년의 시간을 뚫고, 오늘날 여전히 눈물 흘리고 있는 당신만의 고독한 가나의 현장 속으로 변함없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순종을 통해 마침내 빚어내실 복음의 나중 포도주는, 언제나 우리가 처음에 가졌던 그 어떤 세상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넓으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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