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마가복음 14장 32-42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중점적으로 다루되, 장재형목사가 강조해 온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라는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성경 본문에서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과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그 고독한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신앙의 핵심 가치를 되새기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메시지와 함께 장재형목사가 전하고자 하는 주요 가르침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전개는 여러 소주제나 구분 없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며,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장면이 우리 각자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성찰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마가복음 14장에 기록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마친 후 감람산 기슭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고, 거기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한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일반적으로 ‘감람산’은 올리브나무 숲이 가득하며, 그 가운데 ‘겟세마네’는 ‘채유소’, 즉 올리브 열매를 짜서 기름을 얻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장소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올리브 기름이 가져다주는 두 가지 상징, 즉 평화와 영원성, 그리고 메시아에게 기름 부음을 주던 전통을 함께 묵상해 볼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히브리어로 ‘메시야’, 헬라어로 ‘크리스토스’라는 표현이 모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즉 기름 부음받은 왕으로서 겟세마네 동산에 계셨음에도, 여기서 제자들에게는 그분을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우는 장면이 아니라 오히려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며 십자가 수난을 준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왕으로 즉위하셔야 할 분이 극도로 비참한 기도를 드리시는 장면이기에, 성경 전체에서 매우 강렬하고도 역설적인 대조를 형성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마태·마가·누가복음에 공통적으로 기록된 대단히 중요한 본문이지만,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특징이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에 대해, 요한이 이미 13장부터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는 길을 완전히 수락하셨음을 조명했기에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자신이 ‘이제 영광을 받았다’고 선언하셨고, 제자들에게 종말론적 당부와 고별 설교를 남기셨습니다. 즉, 십자가 수난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당신은 스스로 그 길을 ‘영광’이라 선포하심으로 결단하셨다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주님은 갈보리 언덕 이전부터 이미 그리스도의 길을 선택하셨다. 요한은 예수님의 내면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수용하는 왕적 위엄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에 겟세마네 기도를 생략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가 기록한 겟세마네 기도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인간적 고민’과 ‘극렬한 통곡’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14장 33-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참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께 ‘아바 아버지’라 간구하며 끝까지 순종하신 고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께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 그분 안에는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처절한 길인지, 또 그 길을 가는 데 있어 인간적 떨림과 고통이 없을 수 없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스스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고백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복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장재형목사가 자주 강조해 왔듯, 예수님이 사실상 십자가를 지는 길을 ‘피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이나 마가복음 14장에 드러난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 죽음 앞에서 느끼는 극심한 두려움과 고통을 토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이어집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단하고는 있지만, 종종 우리의 의지와 감정은 연약하기 때문에 다른 길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들이 많다. 예수님 또한 그 순간을 겪으셨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을 붙들고 끝까지 걸어가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본을 보여주셨다”고 풀이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모든 이가 반드시 직면해야 할 도전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는 진리입니다.
한편,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를 올리시는 동안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식사 자리에서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큰 소리를 쳤는데, 예수님은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로 들어와서 기도하시는 동안에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들어 버립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시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주님께는 지금이 가장 절박한 시간이고, 일생일대의 영적 투쟁이 벌어지는 중인데, 제자들은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밤에 산책을 나온 사람들처럼 무심하게 잠에 든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종종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엄중한 순간에 우리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버릴 때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제자들은 허둥지둥 도망쳐 버리는데, 마가복음 14장 51-52절에는 베 홑이불을 두르고 따라오던 한 청년이 붙잡히자 홑이불을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전통적으로 이 ‘한 청년’을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자신의 집에서 최후의 만찬이 있었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감람산으로 나아가자, 밤중에 일단 잠들어 있던 마가가 뒤늦게 모든 상황을 감지하고 황급히 예수님을 따라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도 두려움 앞에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친다”라고 설명합니다. 마가는 이토록 부끄러운 장면을 자기 복음서에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기록함으로써, 인간적인 연약함이 얼마나 쉽게 드러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연약함조차도 결국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정직한 신앙고백’의 모범이라 칭하며, “마가는 자신이 부끄러운 존재임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런 자신도 변화시키신 주님의 은혜를 자랑하기 위해 이 장면을 그대로 쓴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약점을 숨기기보다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길을 열어 놓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셔야 마땅한 예수님께서 오히려 고통과 슬픔 속에 땀을 핏방울같이 흘리시는 비극적인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완전히 받아들여지기까지, 즉 예수가 진실로 ‘기름 부음받은 이’로 공인되고 고백되기까지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불가피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분의 길을 함께 걸어갈 영적·신앙적 성숙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홀로 고독의 길을 가야 했고, 그 절정이 바로 겟세마네의 땀방울과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였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에 대해,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도 떡과 포도주를 받고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나, 곧 이어서 펼쳐질 고난의 현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유월절에 희생된 양의 피가 기드론 시내로 흘러내려 붉게 물들어 있는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도, 주님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를 선명히 알지 못했다. 주님은 홀로 그 붉은 물살을 건너 겟세마네로 들어가셨고, 이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고독하고 처절한 순간,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이는 아람어 ‘아바’(아빠)와 헬라어 ‘파테르’(아버지)가 결합된 표현으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맺고 계신 친밀하고도 절대적인 신뢰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에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 부르셨으나, 이 고통의 골짜기에서 그분은 더욱 간절하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아빠 아버지여”라 부르며 부르짖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을 때 가장 큰 유혹은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하는 의심이 생길 때다. 예수님조차 그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아바 아버지’를 찾으심으로, 인간적인 두려움의 순간에 우리도 전적으로 아버지를 신뢰해야 한다는 본을 보이셨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우리는 죽음의 세력이 가장 강력하게 덮쳐 올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을 놓지 말아야 하며,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의 기도 안에 ‘수단’으로서의 기도가 아니라 ‘순종’을 낳는 기도로서의 본질이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셨으나, 결국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결론지으셨습니다. 이 장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우리는 종종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바꿔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나를 바꾸도록’ 내어맡기는 태도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도의 정수는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뜻과 감정을 초월해 아버지께 끝까지 복종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된 기도의 목표”라고 강조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길을 따를 힘을 주는 근원적 모범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약함을 지닌 제자들은 이 기도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잠들었고, 야고보와 요한도 주님의 절박함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시며,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권면하셨으나, 그들은 여전히 무감각한 상태였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들을 ‘교회 내의 인간적인 모습’으로 비유하면서, “세상에서는 큰소리치고 대범해 보이는 신자도, 실상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잠들어 버리거나 도망가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고,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욱 겟세마네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하며, 베드로처럼 망령된 자신감을 내세우기보다, 예수님처럼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후 예수님은 세 번째 기도 후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라고 하시며, 십자가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군병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몰려오자 제자들은 흩어집니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는 “아무리 강한 결심과 의지를 보여도, 결국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넘어지기 쉽다.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실제로는 가장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을 부인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가 넘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돌이키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곧 우리가 넘어지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지라도 주님께서 돌이킴의 은혜를 주신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됩니다.
결국,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죽음의 잔’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 수용하셨고,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신 현장이 바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방관자나 구경꾼의 위치로 남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며, 주님 안에 주어진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고 역설합니다. 즉, 겟세마네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순종의 길을 우리 또한 믿음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고독하고 비극적으로 보일지라도, 부활의 영광이 그 끝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한편, 요한복음이 겟세마네 기도를 생략한 것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영광으로 선포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의 인간적 고뇌 부분을 생략하는 편집 의도를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다시 한 번 짚어 줍니다. 요한복음은 17장의 고별 기도를 통해 세상과 제자들을 위해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왕적’ 위엄을 더욱 부각합니다. 반면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고통을 당하셨고,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기도를 드리셨는가에 포커스를 둡니다. 이 둘은 결코 모순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더 풍부하게 보여주는 보완적 시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도 종종 겟세마네 같은 어려움을 맞이한다. 세상에서 기드론 시내처럼 붉은 피의 흔적을 보며 때로 두렵고 떨리기도 하고, 아무도 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해 외롭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길을 이미 가셨고, 우리에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본을 남겨주셨다. 우리가 그 기도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때, 주님과 동행하는 길은 분명히 고독을 넘어 부활의 환희로 이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겟세마네와 갈보리 언덕은 고통이 극심하게 드러나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는 자리라는 진리가 우리에게 제시됩니다.
더 나아가, 겟세마네 사건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모두를 돌아보게 하는 ‘영적 거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며, 어쩌면 마가처럼 겨우 홑이불만 두른 채 뛰어갔다가 결국 도망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적인 결심과 맹세가 얼마나 한계가 뚜렷한지를 지적하면서, “베드로처럼 어떠한 어려움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큰소리쳐도, 하나님 앞에 깨어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작은 자극 하나에도 무너지고 만다. 그러므로 신앙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과 기도를 통해서만 단단해진다”고 합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열심보다 내면의 겸손과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14장 후반부에 보면, 예수님이 실제로 체포되시고 대제사장들 앞에서 신문받으시는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베드로는 정확히 예수님의 예언대로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맙니다. 닭이 울자마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죠.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인간적인 비참함과 눈물을 지적하면서, “우리는 실패하고 넘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베드로를 찾아가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다. 이는 겟세마네 기도에서 십자가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죄인인 우리를 얼마나 끝까지 붙드시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만든다”고 설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며, 때로는 고독하고 외롭고 눈물겨운 길임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길을 주님이 먼저 가셨기에, 그리고 그 길에서 제자들의 모든 실패까지도 주님이 포용하셨기에, 우리가 실패한다 할지라도 다시금 회복될 수 있는 길이라는 희망이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바로 이 ‘부활의 희망으로 이끌어가는 고난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겟세마네와 같은 어둠과 슬픔, 홀로 씨름해야 할 시험을 맞닥뜨릴 수 있으나, 기도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며 나아갈 때 우리 또한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을 통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첫째, 예수님도 인간적인 두려움과 고통을 겪으셨고, 우리 역시 그러한 시험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둘째, 그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를 부르짖으셨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라는 복종은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이를 위해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넷째, 제자들처럼 잠에 빠지거나 도망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도 솔직히 인정해야 하며, 그 연약함 속에 임하는 주님의 은혜로 인해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결국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점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십자가는 인간적인 최악의 절망이지만, 부활이라는 최후의 소망으로 이어지는 통로이며, 그 길에서 우리의 믿음은 성숙해집니다.
이처럼 겟세마네와 갈보리는 단순히 2000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영적 현실을 비추어 줍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에 주목하며, “우리는 너무 쉽게 제자들을 비난하지만, 사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라고 물어봐야 한다. 그 질문을 통해 자기 자신도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날 잠재력을 가진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 훨씬 더 큰 겸손과 회개의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신앙은 ‘내가 강해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끝까지 붙들어 주시고, 우리가 연약함을 인정하며 은혜를 구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나아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각종 위기와 유혹을 만날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처럼 그저 의지로 버티다가 결국 도망치거나 무너져 버리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처럼 아버지 앞에 모든 것을 토로하며 “아버지의 원대로 되길 원합니다”라는 고백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 후자의 길이, 장재형목사가 끊임없이 설파해 온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실질적 모습입니다.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먼저 그 길을 가셨고, 부활하심으로써 그 길이 결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따를 때, 비록 인간적인 약함과 눈물이 따른다 해도, 마지막에는 부활의 능력이 펼쳐지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맛보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틀어 우리는 ‘기도’의 역할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가장 힘겨운 순간에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의 자리에 가셨고, 그들이 함께 깨어 기도하기를 원하셨을까요? 장재형목사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 마음의 항복을 이끌어낸다. 기도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교만의 표현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코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제자들도 깨어 기도하기를 원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동안 어떤 의미 있는 역할도 하지 못하고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 후에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기도의 자리’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복음 전파 사명을 맡기십니다. 결국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초대교회 부흥을 일으키는 주역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정적이고 결단력 있어 보인다 해도, 기도를 잃어버리면 베드로와 같이 작은 유혹 앞에서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의 주님처럼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어떤 시험도 결국 극복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점에서 “교회가 이 땅에서 설 자리를 잃고, 개인의 신앙이 깊은 내면적 능력을 잃어버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진정한 의미의 겟세마네 기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겟세마네 기도는 간절함과 절실함,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순종을 담고 있는데, 이를 놓치면 우리도 잠자고, 멀리 도망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순절 기간이나 특별 새벽기도회 등 특정 절기에만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자리에서 늘 겟세마네를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피할 수 없는 결단을 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하는 영적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거룩한 반복’이라 부릅니다. 즉, 역사 속에서 단 한 번 있었던 겟세마네의 이야기가 오늘도 우리 안에서 반복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가처럼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끝내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복음서의 저자로 세워지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세 번씩 주님을 부인했다 해도, 다시금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부여받고 장차 교회 기둥으로 쓰임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렇듯, 마가복음에 기록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은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가장 강렬한 예시이자, 제자들의 연약함과 예수님의 인자하심이 극명히 대비되는 자리입니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은 결국 이 겟세마네 영성에서 비롯됩니다. 아무리 무서운 죽음이 다가온다 해도, 아바 아버지를 향한 절대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내 원대로 하지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외롭고 고독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그 길을 먼저 가셨고, 그 길이 영원한 승리로 이어졌음을 우리는 부활 사건을 통해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믿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과제입니다.
이러한 겟세마네 사건을 정리하며, 장재형목사는 우리 각자가 ‘내가 피하고 싶은 십자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라고 조언합니다. “혹은 내가 잠들어 버리고 있는 고난은 무엇이며,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매달려야 할 일은 무엇인가? 또 나는 지금 베드로처럼 ‘주를 위해 목숨도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실상은 쉬지 못할 잠에 빠져 있거나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들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진실하게 답해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와 한층 더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더 이상 인간적인 힘이나 의지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늘 “신앙은 나의 결단 위에 서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과 예수님이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신 순종 위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순종에 발붙여, 우리 역시 삶의 크고 작은 겟세마네를 만나게 될 때마다 “아바 아버지”를 부르짖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신뢰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라는 영적 현실을 우리 일상에서 구체화시키는 열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신앙 행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밤중에 흘리는 눈물과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그 기도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이미 선언하신 구원과 생명의 능력을 우리 삶에 실제로 펼쳐 보이십니다.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에 담긴 예수님의 기도와 제자들의 연약함, 그리고 결국 십자가의 길을 향해 굳게 일어나신 예수님의 순종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상기하게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주님은 홀로 그 길을 가셨다. 제자들은 자고 있었고, 누군가는 도망쳤으며, 다른 누군가는 배신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길은 본래부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 치의 후퇴 없이 그 길을 가셨고, 그 길의 종착지는 부활이라는 승리였다”고 말합니다. 이 메시지는 예나 지금이나 제자도로 초청받은 모든 이에게 변함없이 유효하며, 우리 각자를 향해 ‘함께 가자’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초청입니다.
정리하자면, 장재형목사가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강조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은 다음과 같은 함의를 지닙니다. 첫째, 우리의 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되, 그 약함을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이 우리 의지와 다를 때에도, 나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이 더 선하고 옳음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어떤 강한 결심과 맹세도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넷째, 비록 내가 실패한다 해도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에도 제자를 버리지 않으셨듯, 우리 역시 다시 일으키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부활의 영광을 내포하는 역설적 상징이기에, 지금 눈앞에 보이는 고난에만 매몰되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달려갈 때 그 영광을 맛보게 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결국 겟세마네 기도를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내 인생에서 지금 겪고 있는 혼돈과 시련이 어떤 의미인가? 그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하게 만듭니다. 주님은 그 끝에 분명한 답을 주십니다. 내가 부담스러워하고 피하고 싶은 십자가가 있다면, 그 십자가 너머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영광과 부활의 승리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절정이며, 장재형목사가 거듭거듭 전해 온 복음의 실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겟세마네에서 통곡하던 예수님을 향해 비로소 깨어 일어나 함께 걸어가는 결단입니다. 이제 더는 자고 있지 말고, 또 도망가지 말고, 주님과 함께 가는 진정한 동행자로 서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요약하면, 겟세마네의 기도는 예수님이 가지신 인간적 약함과 신적 순종의 역설을 여실히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기도’로 나아가야 함을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겟세마네 영성의 중요성을 수없이 설파해 왔으며, 그 핵심은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과 동행하려면 우리도 겟세마네의 통곡을 치러야 하고, 십자가를 감당해야 하며, 끝내 그 길이 영광으로 가는 길임을 믿어야 한다”라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깨어 기도하며 겟세마네를 다시금 내 삶의 현장에 구현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동행이야말로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된 길이 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록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이 드러나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시고도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의 실패와 눈물도 마침내는 주님의 부활 능력 안에서 회복되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I. La signification des « temps et moments » dans une perspective eschatologique
Le passage de 1 Thessaloniciens 5.1-2 – « Pour ce qui est des temps et des moments, vous n’avez pas besoin, frères, qu’on vous en écrive. Car vous savez bien vous-mêmes que le jour du Seigneur viendra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 (1 Th 5.1-2) – illustre bien l’une des dimensions majeures de la foi de l’Église primitive. De façon générale, l’Église du premier siècle croyait que Jésus-Christ, après son ascension, reviendrait prochainement, nourrissant ainsi un sentiment d’imminence eschatologique. Immédiatement après la résurrection et l’ascension du Christ, les disciples se demandaient avec grand intérêt : « Quand reviendra-t-Il ? » Parmi eux, l’Église de Thessalonique était particulièrement fervente dans sa réflexion et sa discussion autour de cette question eschatologique. Lors du séjour d’environ trois semaines de l’apôtre Paul à Thessalonique (Ac 17), où il enseignait dans la synagogue, les membres de cette communauté échangeaient régulièrement avec lui sur la sotériologie (la doctrine du salut) et sur l’eschatologie (la doctrine de la fin des temps). Ainsi, Paul écrit : « Pour ce qui est des temps et des moments, vous n’avez pas besoin, frères, qu’on vous en écrive » (1 Th 5.1), reconnaissant que leur compréhension de ces notions de « temps » (chronos) et de « moments » (kairos) était déjà très avancée.
Alors, quelle est la différence entre chronos et kairos ? En grec, chronos désigne le temps « quantitatif ». Il renvoie à la durée, au déroulement, à la succession du temps, comme on le constate dans les termes « chronologie » (chronology) ou « chronomètre » (chronometer) : c’est l’idée d’un temps mesuré et découpé. À l’inverse, kairos désigne un moment « qualitatif », un instant particulier qui marque un changement essentiel. Par exemple, le jour d’un mariage n’est pas simplement une date de plus dans le flux ordinaire du calendrier : c’est une journée spéciale qui transforme la vie d’une personne de manière qualitative. Voilà ce que suggère kairos. Les croyants de Thessalonique savaient qu’au cours du chronos de l’Histoire, il y aurait le kairos du retour du Seigneur, à savoir « le jour du Seigneur ». Ce jour était imminent à leurs yeux.
Dans l’Écriture, l’expression « le jour du Seigneur » correspond dans l’Ancien Testament au « jour de Yahweh » ou « jour de l’Éternel », et dans le Nouveau Testament au « jour de Jésus-Christ » ou « jour de la venue du Seigneur ». Jésus-Christ a déjà accompli l’œuvre du salut sur cette terre ; sa résurrection et son ascension ont ouvert le chemin de l’histoire du salut. Cependant, il est également écrit : « Ce Jésus, qui a été enlevé au ciel du milieu de vous, reviendra de la même manière » (Ac 1.11). Ainsi, l’Église vit dans l’espérance de ce « jour » futur, le jour de l’accomplissement final. La Bible ne présente donc pas une conception cyclique de l’histoire. Contrairement à certaines pensées orientales qui voient l’histoire comme une répétition sans fin – semblable au cycle des saisons (printemps, été, automne, hiver) –, l’Écriture sainte annonce une vision linéaire de l’histoire : elle débute à un point précis (la création), elle progressera vers une fin, et à l’ultime achèvement surviendront le jugement dernier et l’avènement de « nouveaux cieux et d’une nouvelle terre ».
Dire que l’Église de Thessalonique possédait une foi eschatologique signifie qu’elle vivait constamment dans la tension et la joyeuse espérance du « retour proche du Seigneur ». Malgré les persécutions, les épreuves et les fausses doctrines qui pullulaient, ils gardaient fermement cette conviction : « Très bientôt, Jésus-Christ viendra effacer nos souffrances et rendre justice. » Comme l’a déclaré Jésus en Matthieu 10.23 : « Quand on vous persécutera dans une ville, fuyez dans une autre… Vous n’aurez pas achevé de parcourir toutes les villes d’Israël que le Fils de l’homme sera déjà venu. » Aux yeux des Thessaloniciens, le retour du Seigneur pouvait survenir à tout moment. De plus, dans Actes 1, l’ange déclare : « Hommes de Galilée, pourquoi restez-vous là à regarder au ciel ? Ce Jésus qui vous a été enlevé… reviendra de la même manière. » Cette promesse était la force motrice de l’Église primitive.
Dans ce contexte, Paul, dans ses deux épîtres aux Thessaloniciens, apporte des réponses précises aux questions eschatologiques. Au chapitre 4 de la première épître, il explique le sort des croyants décédés (résurrection des morts et enlèvement) ; au chapitre 5, il leur rappelle : « Vous savez bien vous-mêmes que le jour du Seigneur viendra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 (1 Th 5.2), soulignant qu’ils ne doivent pas se laisser obséder par des calculs de dates. Bien que Paul ne leur indique pas le « temps et le moment » exacts, il ne leur demande pas pour autant d’attendre passivement dans l’ignorance. Au contraire, il réitère l’enseignement de Jésus à propos d’un avènement «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 (cf. Mt 24, Lc 17, Mc 13, dits « petits apocalypses »), affirmant que les Thessaloniciens connaissent déjà cela. Par ailleurs, la parabole du figuier enseigne la nécessité de discerner les signes des temps, même si « le Fils lui-même ne connaît pas ce jour » (Mt 24.36) : toute tentative de déterminer une date précise est donc vaine.
Ainsi, l’eschatologie est l’un des trois grands piliers de la doctrine chrétienne. Tout comme la christologie et la sotériologie sont indispensables pour forger la foi et la vie du croyant, l’eschatologie constitue le cœur de notre compréhension du temps et de l’histoire en reliant présent et avenir. Depuis l’Église primitive, la question de la fin de l’histoire est abordée sous divers angles. Les théories du prémillénarisme, du postmillénarisme et de l’amillénarisme en sont des exemples. Le dispensationalisme prémillénariste détaille, entre autres, l’enlèvement, la grande tribulation et le millénium. Le postmillénarisme, lui, voit la progression de l’Évangile et l’expansion graduelle du règne du Christ sur terre, jusqu’à son retour. Quant à l’amillénarisme, il considère le « règne de mille ans » comme un symbole : la période actuelle de l’Église serait déjà le « règne spirituel » de Christ. Malgré des controverses théologiques, tous s’accordent sur un point : « Il y aura assurément une fin. » L’Église attend ce jour, se prépare à ce jour, et vit en tant que peuple de Dieu dans le temps présent.
L’Église de Thessalonique se posait aussi ces questions et Paul y répond dans ses lettres. Lors d’une visite de Timothée parmi eux, les croyants y revenaient sans cesse : « Quand le Seigneur reviendra-t-Il ? » Paul leur écrit alors 1 et 2 Thessaloniciens comme réponse. Cet échange montre à quel point il est précieux, pour la communauté, de poser clairement les questions de foi. L’exemple de l’Église de Corinthe est similaire : elle avait écrit à Paul à Éphèse pour éclaircir des points cruciaux (immoralité, viande sacrifiée aux idoles, dons spirituels, résurrection, etc.). Paul répond à travers 1 Corinthiens, un texte d’une richesse inestimable pour nous aujourd’hui. Il est possible que nous n’aurions pas reçu de tels écrits si les Corinthiens n’avaient pas interrogé Paul avec autant d’insistance. L’histoire de l’Église témoigne que la « dynamique des questions-réponses » est un processus essentiel pour consolider la foi.
Notons cependant que les Thessaloniciens ne basculèrent pas dans un extrémisme désordonné au sujet de la fin des temps. Au contraire, Paul constate qu’ils ont déjà une connaissance approfondie : « Pour ce qui est des temps et des moments, vous n’avez pas besoin… » (1 Th 5.1). Certes, certains prônaient peut-être un arrêt du travail en raison de l’imminence du jour du Seigneur, mais dans l’ensemble, la communauté continuait à s’engager, à prier et à exercer la vigilance, tout en conservant un bon équilibre (2 Th 3). Paul salue leur esprit équilibré et les exhorte à persévérer dans la vigilance et la tempérance.
Examinons de plus près 1 Thessaloniciens 5.2-3 : « Vous savez bien vous-mêmes que le jour du Seigneur viendra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À ce moment-là, la ruine fondra sur eux à l’improviste, comme les douleurs de l’enfantement surprennent la femme enceinte, et personne n’y échappera. » L’image du « voleur dans la nuit » est employée dans l’Ancien et le Nouveau Testament pour décrire un désastre, un jugement divin ou la venue du Seigneur qui s’abat soudainement. Cela suggère, d’une part, la dimension inattendue et funeste pour ceux qui ne sont pas prêts ; d’autre part, cela reflète l’enseignement de Jésus : « Seul le Père connaît ce jour » (Mt 24.36). En d’autres mots, l’homme ne peut le calculer.
À ce sujet,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dans plusieurs sermons et écrits que le point central de l’eschatologie n’est pas de spéculer sur la date exacte, mais de « comprendre comment vivre aujourd’hui conformément à la volonté de Dieu ». Nous confions à Dieu le moment de ce jour et, tout en espérant pleinement le salut et le jugement parfaits qu’apportera la parousie (la venue du Seigneur), nous cherchons à vivre dès maintenant en « serviteurs fidèles et bons ». En effet, selon la parole de Matthieu 24.14 – « Cette bonne nouvelle du royaume sera proclamée dans le monde entier, pour servir de témoignage à toutes les nations. Alors viendra la fin » –, l’eschatologie nous rappelle prioritairement la « mission » de l’Église : répandre l’Évangile à tous les peuples. L’espérance de la fin n’invite pas l’Église à fuir le monde par peur, mais au contraire à se lever : « Veillez, soyez prêts, croissez dans la foi et l’amour, et annoncez l’Évangile jusqu’aux extrémités de la terre. »
C’est pour cela que la communauté de Thessalonique reçoit des éloges : elle n’était pas obsédée par le « calcul de la date du retour », mais vivait d’une ardeur sincère en Christ, entretenant une communion fraternelle saine. « Pour vous, frères, vous n’êtes pas dans les ténèbres, pour que ce jour vous surprenne comme un voleur » (1 Th 5.4) : Paul affirme que, parce qu’ils sont « fils de la lumière, fils du jour », la venue du Seigneur ne sera pas pour eux un événement « soudain », mais plutôt une rencontre attendue. Le pasteur David Jang insiste également sur cette vigilance et cette tempérance : ne pas céder à la peur panique, mais plutôt se préparer activement et de manière positive, ancrée dans l’Évangile.
Enfin, considérons l’application de l’eschatologie dans la vie personnelle. Tout être humain connaîtra un jour la mort physique : c’est la fin « personnelle ». En même temps, un jour, l’histoire de l’univers arrivera à son terme : c’est l’eschatologie « cosmique » et le retour du Seigneur. Paul exhorte l’Église à se préparer sans faillir, aussi bien à la mort individuelle qu’à la fin universelle. Comment ? Par la méditation continue de la Parole, la pratique de la foi et de l’amour. « Nous qui sommes du jour, soyons sobres, ayant revêtu la cuirasse de la foi et de l’amour, et ayant pour casque l’espérance du salut » (1 Th 5.8). Au milieu du combat spirituel, les soldats de Christ se protègent le cœur avec la foi et l’amour, et protègent leur tête avec « l’espérance du salut ». Il ne s’agit pas seulement de connaître la venue du Seigneur en théorie, mais de se fortifier intérieurement au moyen de la foi et de l’amour, et de garder une pensée claire grâce à l’espérance du salut. Ainsi, quelles que soient les épreuves, nous ne chancellerons pas.
Paul ajoute : « Vous êtes tous des fils de la lumière… » (1 Th 5.5). La lumière incarne la vérité. Autrement dit, ils demeurent dans la Parole de Dieu, regardent l’histoire au travers d’elle et vivent le présent dans la perspective de l’espérance eschatologique. Le « jour du Seigneur » peut bien venir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 ils ne sont pas dans l’obscurité, car ils veillent avec des « lampes allumées », tel le groupe des dix vierges (Mt 25) qui attendaient l’époux. Ainsi, l’Église de Thessalonique est un exemple remarquable de « communauté eschatologique » loué dans le Nouveau Testament.
Si Paul a pu écrire : « Pour ce qui est des temps et des moments, vous n’avez pas besoin qu’on vous en écrive » (1 Th 5.1), c’est que l’Église de Thessalonique possédait une certitude et une compréhension déjà solidement établies de la fin de l’histoire. Elle ne craignait pas la fin de manière vague, n’était pas non plus égarée par de faux calculs. Elle poursuivait au contraire une saine eschatologie, basée sur une vision de l’histoire que couronnent l’espérance du retour du Seigneur et la mise en pratique de l’amour. Le pasteur David Jang rappelle souvent que l’eschatologie n’a pas vocation à alimenter la crainte ou à inciter à spéculer sur des dates ; son but est plutôt de nous faire réaliser « comment vivre chaque jour », et de fortifier notre rôle de peuple de Dieu dans le monde.
II. La nécessité de veiller et de vivre avec sobriété, et la mission de l’Église
Continuons en examinant 1 Thessaloniciens 5.4 et suivants : « Pour vous, frères, vous n’êtes pas dans les ténèbres… Nous qui sommes du jour, soyons sobres, ayant revêtu la cuirasse de la foi et de l’amour, et ayant pour casque l’espérance du salut » (1 Th 5.4-8). À partir de là, voyons comment la foi eschatologique de l’Église primitive se concrétisait en un style de vie et en une mission ecclésiale. Paul est explicite : « Pour vous, frères, vous n’êtes pas dans les ténèbres, pour que ce jour vous surprenne comme un voleur » (5.4). Cela signifie qu’à ceux qui se préparent et qui veillent, le jour du Seigneur ne saurait être un événement subit et effrayant. Certains se focalisent peut-être uniquement sur « la venue comme un voleur, imprévisible », mais Paul envisage la question tout autrement : « Puisque vous êtes dans la lumière, ce jour ne peut venir comme un voleur, car vous êtes déjà prêts. »
Cette idée fait écho à la parabole des dix vierges (Mt 25.1-13). Cinq vierges avaient préparé de l’huile, les cinq autres non. Quand l’époux arriva, celles qui étaient prêtes entrèrent avec lui ; les autres se retrouvèrent devant une porte fermée. Pour ces dernières, l’arrivée de l’époux fut une « venue comme un voleur ». Elles vécurent l’amertume d’être exclues, tandis que pour les vierges prévoyantes, ce n’était pas une surprise mais plutôt l’accomplissement tant attendu. L’Église de Thessalonique ressemble à ces jeunes filles prévoyantes : elle n’était ni envahie par l’angoisse ni prisonnière d’une attente oppressante. Elle s’appuyait fermement sur la promesse : « Le Seigneur viendra sûrement », et vivait dans la foi, l’amour et l’espérance, comme on porte une cuirasse et un casque.
Qu’entend-on concrètement par « veiller et vivre avec sobriété » ?
Veiller signifie refuser la négligence spirituelle. Celle-ci apparaît quand on oublie le Seigneur et qu’on se laisse distraire par les tentations du monde. Sans la conscience eschatologique, on glisse vite vers les valeurs matérialistes ou la passivité spirituelle. Mais celui qui attend fermement le retour du Christ se rappelle constamment : « Je suis un serviteur du Seigneur, je rendrai compte un jour devant Lui. » Comme dans la parabole des talents (Mt 25.14-30), le maître revient tôt ou tard, et fait le bilan avec ses serviteurs. C’est là le cœur de l’eschatologie : elle ne dit pas « Un jour lointain, nous serons au ciel ; peu importe ce qui se passe ici ». Elle déclare plutôt : « C’est aujourd’hui, dans chaque instant, que tu dois servir fidèlement, car le Seigneur viendra et nous demanderons compte de tout. » En conséquence, les membres de l’Église de Thessalonique ne se détournaient pas de leurs responsabilités quotidiennes. Bien au contraire, ils travaillaient avec diligence et vivaient dans la société, tout en nourrissant une vive attente du Seigneur.
Vivre avec sobriété implique la maîtrise de soi et l’examen de conscience. Comme le dit Paul, ceux qui s’enivrent boivent la nuit (5.7), ceux qui dorment spirituellement se laissent aller à l’inconscience. Mais en tant qu’enfants de la lumière, nous affirmons : « Nous sommes du jour ; nous ne suivrons pas aveuglément les tendances du monde. » Paul souligne alors la « cuirasse de la foi et de l’amour ». Pour protéger la partie vitale de l’âme (le cœur), il faut la foi et l’amour : la foi, c’est s’appuyer sur « Dieu qui a résolu de nous sauver » ; l’amour, c’est rendre cette foi tangible par des actes concrets. Quant au « casque de l’espérance du salut », il est indispensable à la protection de la tête (pensées). Sans espérance, on chancelle face aux épreuves de la vie. Mais si l’on demeure convaincu que Christ reviendra pour parachever toute chose dans la justice et la paix, aucune situation ne nous plonge définitivement dans la confusion.
Celui qui veille et vit dans la sobriété n’envisage pas la fin comme une nuit de jugement effroyable. Pour lui, c’est surtout le jour glorieux de la rencontre avec le Seigneur ; l’achèvement du salut tant attendu. C’est pourquoi Paul proclame : « Car Dieu ne nous a pas destinés à la colère, mais à la possession du salut par notre Seigneur Jésus-Christ, qui est mort pour nous, afin que, soit que nous veillions, soit que nous dormions, nous vivions ensemble avec lui » (1 Th 5.9-10). Pour les croyants, la fin ne se limite donc pas au jugement, mais concerne l’accomplissement total du salut en Christ. Dès lors, celui qui embrasse une saine eschatologie ne sombre pas dans la peur, ni dans la désinvolture. Une annonce correcte de la fin des temps nous conduit à « vivre fidèlement dès aujourd’hui », dans l’attente joyeuse de la plénitude du salut.
De même, l’Église doit se rappeler constamment sa « mission eschatologique ». Une Église qui perd de vue la fin risque de se laisser happer par les intérêts de ce monde. Si elle n’a plus la vision du royaume de Dieu, elle devient vite une institution aux aspirations purement terrestres, parfois pire que le monde lui-même. D’où l’insistance du pasteur David Jang : l’Église doit redevenir cette communauté spirituelle qui attend ardemment le retour du Seigneur et, dans cet élan, se consacre à la mission jusqu’aux extrémités de la terre. Il ne s’agit pas de grossir son propre effectif ou son pouvoir, mais de porter l’Évangile à « toutes les nations » (Mt 24.14). Le culte, l’enseignement de la Parole, l’édification mutuelle prennent toute leur signification dans cette perspective : « Le Seigneur va revenir. »
En 1 Thessaloniciens 5.11, Paul conclut : « C’est pourquoi exhortez-vous réciproquement et édifiez-vous les uns les autres, comme en fait déjà. » Dans d’autres lettres, l’apôtre doit parfois corriger des divisions, mais ici, il les félicite pour la solidarité et l’encouragement mutuel qui les distinguent. Ceci est directement lié à leur foi eschatologique : l’eschatologie rappelle que « nous sommes tous enfants de Dieu, destinés à régner avec Lui lorsque le Seigneur reviendra », et nous pousse à vivre dans l’amour fraternel d’une manière encore plus fervente à l’approche de ce jour. Plus ce jour approche, plus l’Église doit s’unir, se sanctifier et se fortifier. Il s’agit de couvrir les faiblesses fraternelles, de s’encourager et de s’édifier mutuellement.
En somme, l’eschatologie motive nos actes quotidiens. Dans un monde incertain, elle nous assure : « Je suis enfant de Dieu, enfant de la lumière. Je dois donc mener une vie de foi, car le Seigneur reviendra. » L’Église, pour sa part, est une « communauté eschatologique ». Bien plus qu’un bâtiment ou qu’une institution financière, elle est le rassemblement des « enfants de la lumière », qui proclament « Maranatha ! (Seigneur, viens !) », annoncent l’Évangile au monde, et s’emploient à répandre l’amour.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souvent que l’expansion de l’Évangile et les actions caritatives envers les démunis sont autant de manifestations concrètes de la foi eschatologique. « Réaliser dès maintenant la culture du ciel » et « prendre soin des délaissés » tout en guettant le retour du Seigneur résument l’attitude du croyant « éveillé et sobre ».
Dans cette optique, l’éloge et l’exhortation adressés par Paul à l’Église de Thessalonique gardent toute leur actualité. Paul leur écrit : « Frères, je n’ai rien à vous apprendre sur ces questions, car vous les avez déjà étudiées et débattues en profondeur. » C’est une reconnaissance du discernement qu’ils possèdent concernant l’histoire et la fin. « Vous êtes des enfants de la lumière. Ce jour ne vous surprendra pas comme un voleur », ajoute Paul. Ce sont des paroles de grâce qui réaffirment leur identité : préparés, veillant dans l’amour, grandissant ensemble. Possédant une telle foi, l’Église traverse persécutions et épreuves sans se laisser ébranler, restant fidèle à l’Évangile.
De nos jours, l’eschatologie est parfois mal comprise au sein des assemblées. Certains manipulent les croyants par la peur de la fin, d’autres prétendent connaître la date précise du retour du Seigneur, ce qui frise l’hérésie. C’est pourquoi il importe de retenir la « saine eschatologie » de l’Église de Thessalonique. Deux principes y coexistent : « Personne ne peut connaître le jour ni l’heure, donc n’écoutez pas de prophéties privées ni de calculs farfelus » ; mais également « Sachez discerner les signes du temps et restez éveillés dans la Parole, la mission et l’amour. » Quand ces deux aspects sont équilibrés, l’Église croît sainement, embrassant à la fois le présent et l’éternité. La vie chrétienne ne rejette pas la réalité terrestre, mais elle conserve comme boussole l’achèvement du royaume de Dieu.
Le pasteur David Jang enseigne fréquemment que si nous nous focalisons uniquement sur « la venue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 nous risquons d’être paralysés par la peur ou obsédés par le désir de calculer la fin. Or le message de Paul est clair : « Pour vous, le jour du Seigneur ne peut pas survenir comme un voleur. Vous êtes dans la lumière ; veillez et soyez sobres, revêtez la foi, l’amour et l’espérance du salut. » Si cette assurance s’enracine dans l’Église, celle-ci ne sombre pas dans la morosité. Au contraire, elle s’épanouit dans la joie et la vie, car l’eschatologie, loin d’inoculer l’anxiété, insuffle dynamisme et espérance.
Et pour reprendre 1 Thessaloniciens 5.9-10 : « Car Dieu ne nous a pas destinés à la colère, mais à l’acquisition du salut par notre Seigneur Jésus-Christ, qui est mort pour nous, afin que… nous vivions ensemble avec lui. » Voilà le cœur de l’Évangile. L’eschatologie inclut certes jugement et colère de Dieu, mais pour les croyants en Christ, ce jugement fait partie intégrante de l’économie du salut. Nous entrerons dans la pleine communion avec le Seigneur à ce moment-là. Ainsi, Paul offre une réponse limpide à l’interrogation eschatologique des Thessaloniciens : « Le jour du Seigneur » n’est pas la terreur finale pour le croyant, mais le point culminant de sa rédemption. Que l’Église s’exhorte donc mutuellement et s’édifie pour ce jour.
Aujourd’hui, nous avons besoin plus que jamais de cette perspective. Le monde est en proie à l’insécurité et aux conflits, et beaucoup sont plongés dans l’incertitude. L’Église ne doit pas répondre : « Tout va bientôt s’effondrer, tremblez de peur et cachez-vous ! » Elle doit proclamer : « Le Christ va revenir et apporter la plénitude du salut. Alors, soyons vigilants et sobres, vivons dans l’amour et portons l’Évangile. » Telle est la bonne nouvelle. Telle est la posture des « vierges sages avec leur huile » et du « serviteur fidèle qui fructifie ses talents ». Dès lors, peu importe le jour : nous accueillerons le Seigneur dans la joie.
Le message de 1 Thessaloniciens 5 sur la fin des temps nous enseigne que le jour du Seigneur vient «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 mais que les « enfants de la lumière » ne seront pas surpris, puisqu’ils sont déjà en éveil et en sobriété. Le pasteur David Jang le rappelle : « Ne transformons pas l’eschatologie en peur ou en prédictions hasardeuses. Au contraire, qu’elle devienne un moyen de fortifier l’Église dans sa santé spirituelle, son élan missionnaire et son amour fraternel. » À l’exemple de l’Église de Thessalonique qui s’écriait chaque jour « Maranatha ! (Seigneur, viens !) », demeurons dans l’entraide et l’exhortation mutuelle. Ainsi, au son de la trompette du Seigneur, nous pourrons l’accueillir dans l’allégresse.
En définitive, à travers ces deux axes de 1 Thessaloniciens 5, nous retenons la leçon suivante :
« Nul ne connaît exactement les temps et les moments, mais le Seigneur reviendra assurément. »
« Si ce jour vient comme un voleur pour le monde, pour les enfants de la lumière, il ne saurait être une surprise, car ils se tiennent prêts dans la foi. »
De plus, Jésus a déclaré que « l’Évangile sera annoncé à toutes les nations, et alors viendra la fin » (Mt 24.14). L’Église est donc appelée à parler de la fin tout en assumant pleinement sa vocation missionnaire au cœur du monde.
En conclusion, l’eschatologie ne pousse pas au repli, mais incite à la « transformation du présent » grâce à une foi inébranlable. Comme l’Église de Thessalonique sous la persécution, nous voulons espérer « le jour du Seigneur » et, ce faisant, recevoir l’éloge de Paul : « Frères, je n’ai rien à vous apprendre sur ce sujet. » Cela suppose un approfondissement continu de la Parole et un témoignage actif d’amour. Ensemble, soyons « enfants de la lumière » dans un monde obscur, proclamant « Viens, Seigneur Jésus », pour vivre une eschatologie saine, au service du prochain. Alors, au jour du Seigneur, nous entrerons dans son repos et sa gloire. Telle est la promesse donnée par Paul à l’Église de Thessalonique, et qui demeure pleinement valide pour nous aujourd’hui.
I. The Meaning of “Times and Seasons” from an Eschatological Perspective
The words from 1 Thessalonians 5:1–2, namely, “Now concerning the times and the seasons, brothers, you have no need to have anything written to you. For you yourselves are fully aware that the day of the Lord will come like a thief in the night” (1 Thess 5:1–2), vividly depict a core aspect of the early church’s faith. In general, the early church lived with the belief that the ascended Jesus Christ would return soon—an imminent eschatology. Immediately after Jesus’s resurrection and ascension, the disciples were deeply concerned with the question, “When will the Lord return?” Among these communities, the Thessalonian church was particularly passionate about meditating on and debating eschatological questions. When Paul stayed in Thessalonica for about three weeks (Acts 17) and taught in the synagogue, the Thessalonian believers engaged him in profound dialogues regarding salvation and the end times. Thus, Paul could write, “Now concerning the times and the seasons, brothers, you have no need to have anything written to you” (1 Thess 5:1), which shows that their understanding of “times” (chronos) and “seasons” (kairos) was already quite advanced.
What, then, is the difference between “times” (chronos) and “seasons” (kairos)? In Greek, chronos refers to quantitative time. It denotes the duration, flow, and sequence of time—like what we see in words such as “chronology” or “chronometer,” conveying the sense of time as something precisely measured and divided. On the other hand, kairosrefers to a point in time that carries qualitative change—a special moment or occasion. For example, one’s wedding day is not just another day in the quantitative sequence of time; rather, it is a day that marks a before-and-after, bringing a qualitative difference to one’s life. That is the concept of kairos. The Thessalonians recognized that in the midst of history (chronos), there would be a special kairos day when the Lord would return—“the Day of the Lord”—and they believed that day was imminent.
In Scripture, “the Day of the Lord” is referred to in the Old Testament as “the Day of Yahweh” or “the Day of the LORD,” while in the New Testament it appears as “the Day of Jesus Christ” or “the day of the Lord’s return.” Jesus Christ has already completed the work of salvation on earth, opened the pathway to salvation through His resurrection and ascension, and has promised, “This Jesus, who was taken up from you into heaven, will come in the same way as you saw Him go into heaven” (Acts 1:11). Therefore, the church lives in hope of “that day,” the final day of eschatological fulfillment. Scripture does not propose a cyclical view of history. Unlike some Eastern philosophies that see history repeating itself in a never-ending cycle of spring, summer, fall, and winter, the Bible presents a linear view of history: it begins with a unique creation (Genesis), moves toward a definite end (eschaton), and at that end there will be final judgment, and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For the Thessalonian church to possess an eschatological faith meant that they lived at all times in a state of holy expectation and urgency that “the Lord will return soon.” Despite persecution, tribulation, and rampant false teachings, they firmly believed that “very soon, Jesus Christ will come to wipe away all our injustices and sufferings.” Just as Jesus said in Matthew 10:23, “When they persecute you in one town, flee to the next… you will not have gone through all the towns of Israel before the Son of Man comes,” the Lord’s return for them was an imminent reality whose timing they could not fully predict. Furthermore, in Acts 1, the angel proclaimed, “Why do you stand looking into heaven? This Jesus… will come in the same way as you saw Him go,” which became the daily driving force of the early church.
In this context, Paul offers concrete answers to eschatological questions through his letters to the Thessalonians—1 and 2 Thessalonians. In 1 Thessalonians 4, he responds to the question of what happens to those who have died in Christ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rapture). Then in chapter 5, he warns them not to be overly fixated on setting dates: “For you yourselves are fully aware that the day of the Lord will come like a thief in the night” (1 Thess 5:2). Paul does not give a detailed schedule for “times and seasons,” but neither does he say to “just wait vaguely without any signs.” Instead, he reaffirms Jesus’s teaching that “the day will come like a thief” (seen in Matthew 24, Luke 17, Mark 13, etc.—the “Little Apocalypse”) and acknowledges that the Thessalonians already know this. He also teaches, through the “lesson of the fig tree,” that while it is necessary to discern the signs of the times, no one, not even the Son, knows the exact day or hour, so trying to pinpoint dates or years is futile.
Eschatology is one of the three crucial pillars of Christian doctrine. If Christology and soteriology are essential to the shaping of our faith and practice, eschatology provides the key framework for understanding how our present and future come together—our view of time and history. From the early church onward, there have been many discussions on how to interpret the end of history. Differing theological theories—premillennialism, postmillennialism, and amillennialism—are all fruits of this longing. 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 categorizes events like the rapture, the great tribulation, and the millennial kingdom with a detailed blueprint; postmillennialism posits that as the church spreads the gospel, the reign of Christ gradually expands on earth, culminating in His return; amillennialism interprets the millennium symbolically, viewing the present church age as the “spiritual kingdom” in which Christ reigns. Despite theological debates, they share one premise: there is a definite end. The church awaits and prepares for that day, and no one denies this overarching truth.
The Thessalonian church wrestled with these issues and asked Paul about them. When Timothy visited Thessalonica, the believers repeatedly questioned him about the timing of the Lord’s return, and Paul responded through his letters, 1 and 2 Thessalonians. Church history thus demonstrates the significance of asking questions without hesitation when doubts arise in faith. The Corinthian church did likewise: they sent detailed questions about various faith-related issues to Paul (e.g., sexual immorality, food sacrificed to idols, spiritual gifts, the resurrection), and his replies became 1 Corinthians. This has been of immense benefit to the universal church today. If the Corinthian believers had never asked, we might not have received such a rich letter as 1 Corinthians. Indeed, “questions and answers” in the church context form a vital process for establishing a sound system of faith.
It is worth noting that the Thessalonian church did not hold disorderly or extremist views of the end times. Paul’s comment—“Now concerning the times and the seasons, brothers, you have no need to have anything written to you” (1 Thess 5:1)—suggests that they had already discussed and studied the matter thoroughly. Of course, there were some who took an extreme stance, saying, “If the Day of the Lord is at hand, let us cease our daily work.” Yet overall, the Thessalonian community willingly worked hard (2 Thess 3) while also staying alert in prayer, longing for the Lord’s return. Paul commends their balanced approach and urges them all the more to remain awake and sober.
Taking a step further, consider 1 Thessalonians 5:2–3: “For you yourselves are fully aware that the day of the Lord will come like a thief in the night… Then sudden destruction will come upon them as labor pains come upon a pregnant woman, and they will not escape.” The metaphor of “coming like a thief” is used throughout both the Old and New Testaments to describe how disasters, God’s judgment, or the Lord’s return will arrive without warning. On one hand, it portrays the sudden, dire reality facing those who are unprepared. On the other hand, it aligns with Jesus’s statement that “only the Father knows that day” (Matt 24:36). In other words, no human calculation can pinpoint the timing of His return.
At this juncture, Pastor (or Rev.) David Jang, in numerous sermons and writings, emphasizes that the core of eschatology is “not about calculating dates, but about discerning how to live now in a manner pleasing to God.” We entrust the day and hour entirely to God the Father and, while anticipating the complete salvation and judgment that the Lord’s return will bring, we must also live as faithful servants today. Indeed, as stated in Matthew 24:14—“This gospel of the kingdom will be proclaimed throughout the whole world as a testimony to all nations, and then the end will come”—the church, when discussing the end times, must keep in mind the universal mission of preaching the gospel “to all nations.” Eschatology does not instruct believers to cower in fear and escape the world. Instead, it compels us with the command, “Stay alert, be prepared, live in faith and love, and proclaim the gospel to the ends of the earth.”
Viewed in this light, another reason the Thessalonian church is commended is that they did not merely obsess over “predicting the day of Christ’s return” but fostered a healthy faith community that held a passionate longing for the Lord. “But you are not in darkness, brothers, for that day to surprise you like a thief” (1 Thess 5:4). Paul is affirming that “because you are already children of light and children of the day, the Lord’s return cannot catch you off guard.” Unlike those who sleep in darkness, they are awake, ready for whenever the Lord appears—much like the “ten virgins” who keep their lamps lit (Matt 25). Pastor David Jang likewise teaches that when the church discusses the end times, the most crucial posture is to “always be awake and self-controlled,” stressing that this alertness and self-control is not grounded in fear but in “an active preparation built on the gospel.”
Let us now consider how eschatology applies to individual lives. Everyone will one day face physical death—this is an individual end. Meanwhile, history as a whole will one day come to a close—the cosmic end at the time of the Lord’s return. Paul desires the church to be unwaveringly prepared for both our “individual end” and the “universal end.” How does one prepare? Through the steady meditation on God’s Word, and through faith and love in action. “Since we belong to the day, let us be sober, having put on the breastplate of faith and love, and for a helmet the hope of salvation” (1 Thess 5:8). In the midst of spiritual warfare, Christ’s soldiers protect their vital organs—heart and head—with the breastplate and helmet. These are “faith and love” and “the hope of salvation,” respectively. In other words, we do not merely hold knowledge of the Lord’s return in our minds; rather, we protect our hearts and our daily lives with faith and love, and we safeguard our thinking with the hope of salvation. Thus, no chaotic ideology or temptation can shake us.
Paul also states, “For you are all children of light, children of the day” (1 Thess 5:5). Light symbolizes truth. That is, these believers abide in God’s Word, interpreting history through His Word, and living with an eschatological hope in the present. Such people are never caught in darkness by the “day of the Lord,” for they are already awake in the light, like the ten virgins who kept oil in their lamps to welcome the bridegroom (Matt 25). Because of this, the Thessalonian church is praised in the New Testament era as a model “eschatological community.”
The reason Paul could say of the Thessalonian church, “You have no need to have anything written to you concerning the times and seasons,” is because they already possessed a clear conviction and understanding of the “end of history.” They did not fear the end in some vague manner, nor did they mislead others with flawed calculations. Rather, they pursued a sound eschatology and view of history, and above all, they combined their hope in the Lord’s return with tangible acts of love. Pastor David Jang has underscored this repeatedly: eschatology is not a means to induce fear or sensationalize date-setting; instead, it is a foundational doctrine that teaches us “How shall we live each day?” and “What role must the church fulfill in this world?”
II. The Necessity of Being Alert and Self-Controlled, and the Church’s Mission
Turning now to 1 Thessalonians 5:4 and following—“But you are not in darkness, brothers… So then let us not sleep, as others do, but let us keep awake and be sober… having put on the breastplate of faith and love, and for a helmet the hope of salvation” (1 Thess 5:4–8)—we see how the eschatological faith of the early church linked to practical living and the church’s mission. Paul speaks plainly: “But you are not in darkness… for that day to surprise you like a thief” (5:4). For those who are prepared and awake, “the Day of the Lord” is not a sudden terror. Some people only focus on the phrase “like a thief in the night,” emphasizing that “no one knows the day or hour.” Yet Paul approaches it from a different angle: “If you are children of light, it cannot come upon you like a thief, because you are already living in the light, staying ready.”
This parallels Jesus’s parable of the “Ten Virgins” (Matt 25:1–13). Five wise virgins prepared oil, while five foolish virgins did not. When the bridegroom arrived, the prepared virgins went in, and the door was shut. Those who were unprepared faced a “thief-like” event and found themselves outside the closed door in sorrow. But for those who were prepared, it was not “thief-like” at all; rather, it was the long-awaited fulfillment of a promise. The Thessalonian church resembled those prepared virgins. They did not sink into anxiety or obsession about the unpredictable timing of the Lord’s return but rather strived on, continuing in “faith, love, and hope” (the breastplate and helmet) as they anticipated His coming.
What does it specifically mean to “be awake and be sober”? First, being awake means not becoming spiritually complacent. Complacency implies “living life oblivious to the Lord, getting ensnared by temptation and sin.” Without an eschatological awareness, one easily succumbs to worldly values or materialism. But those who clearly believe in the Lord’s return maintain the perspective, “I am the Lord’s servant. One day I will stand before Him to give an account,” even in their daily work and ministry. As Jesus taught in the parable of the talents (Matt 25:14–30), the master will undoubtedly return to settle accounts with His servants. This is a vital teaching of eschatology: it is not merely about “enjoying ourselves in the new heaven and new earth later,” but a call to “live responsibly in the present.” The Thessalonians did not neglect their work or flee from reality. Even while longing for the Day of the Lord, they faithfully fulfilled their responsibilities in the world.
Second, being sober indicates self-reflection and self-restraint. Drunkards are intoxicated at night (5:7), and those who sleep at night fall into spiritual insensibility. But as children of the light, we “belong to the day,” and therefore we must resolve not to be defenselessly carried away by worldly trends. In this regard, Paul emphasizes “the breastplate of faith and love.” This piece of armor, guarding the spiritual heart, is faith and love. Faith means trusting in “God’s plan to save us,” and love is the concrete action that gives tangible expression to that faith. Additionally, the “helmet of the hope of salvation” is indispensable. If faith is the root that grounds our lives, hope is the future we fix our eyes upon. Those who lack hope easily succumb to confusion and despair when faced with worldly difficulties. Yet those who hold the hope of salvation—knowing that the Lord will return to consummate all things—remain unshaken in their minds, no matter the circumstance.
Thus, those who stay awake and sober do not dread the end times as nothing but “a thief-like night of judgment.” Rather, they recognize that day to be “the day we shall see the Lord face to face,” “the day of perfect salvation and glory,” the very day we have longed for as our true homecoming. Therefore, Paul declares, “For God has not destined us for wrath, but to obtain salvation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who died for us so that whether we are awake or asleep, we might live with Him” (1 Thess 5:9–10). Eschatology is not simply about condemnation for believers, but about “the consummation of complete salvation.” Hence, those who hold a sound eschatology do not collapse in baseless fear, nor do they become irresponsible or licentious. The very announcement, “The Lord is coming again,” compels us to devote ourselves to His will today, while looking forward to the fulness of salvation that will greet us at His coming.
In this light, the church must perpetually recognize its “eschatological mission.” If the church forgets eschatology, it risks becoming fixated on earthly values and self-serving gains, even descending into a worldly institution that outstrips the world in its worldliness. Consequently, Pastor David Jang teaches that the church must recover an eschatological hope for the return of Jesus and embody the spiritual community that truly yearns for His coming. The church’s role is not to count its members or expand its own power but to fulfill the Great Commission: “And this gospel of the kingdom will be proclaimed throughout the whole world as a testimony to all nations, and then the end will come” (Matt 24:14). We worship, teach the Word, and build one another up because we look forward to the Lord’s return.
In 1 Thessalonians 5:11, Paul says, “Therefore encourage one another and build one another up, just as you are doing.” In his other epistles, he sometimes rebukes churches for their divisions and strife. Yet the Thessalonian church is commended for already excelling at mutual encouragement and edification. This is inseparable from eschatological faith, for the end times perspective consistently reminds us, “We are all God’s children, fellow workers who will enter into His glory together when the Lord returns.” As that day draws nearer, the church must strive to be purer, more fervent, and more ardent in collective faith. We must overlook each other’s faults in love, encourage one another, and work so that everyone is built up.
Eschatology directly motivates our day-to-day living. Even in an uncertain world, we can say, “I am a child of God, a child of light, preparing for the return of the Lord by living out my faith.” The same applies to the church. “Church” is, in essence, an eschatological community—no mere physical building or institution accumulating funds, but a gathering of “children of light” who wait for the return of the Lord (Maranatha), spread the gospel to the nations, and practice love until we attain the final salvation. Accordingly, Pastor David Jang emphasizes that the church’s activities—exerting a positive influence on society, spreading the gospel—are the direct outworking of eschatological faith. Bringing the culture of heaven “here and now,” caring for the marginalized in the shadows of society, and simultaneously longing for the Lord’s coming—this multifaceted stance defines the essence of “being awake and self-controlled.”
In sum, Paul’s praise and exhortation to the Thessalonian church applies just as directly to us today. “Brothers, you have no need to have anything written to you about times and seasons” implies that this community had already attained a deep understanding of God’s work and the end. Furthermore, “You are children of light, so that day will not overtake you like a thief” affirms our identity as a church called to yearn for the Lord’s return, to be prepared, and to encourage one another. When this faith firmly takes root, the church remains unshaken even amid trials and persecutions, holding fast to the gospel.
Of course, eschatology can generate misunderstandings in the church. Some groups attempt to predict specific dates or manipulate fear of the end times for personal gain—typical of cultic tendencies. Hence, we should learn from the Thessalonian church’s “balanced eschatology.” That balance has two major aspects: first, “Since no one can know the day or hour, do not indulge in reckless calculations or personal revelations”; second, “Nevertheless, discern the signs of the times and remain ever watchful through the Word, mission, and acts of love.” When these two principles operate in harmony, the church grows healthily, bridging both the present world and the world to come. Christians learn to live in this dual framework, neither ignoring earthly realities nor losing sight of the completion of God’s kingdom.
When Pastor David Jang preaches on these topics, he stresses the same point. Hearing only “the day will come like a thief” can lead some to shrink in fear or obsess over pinpointing that day. However, Paul’s intention is crystal clear: “Since you are already in the light, there is no need to fear. Just stay awake and sober. Put on the armor of faith, love, and the hope of salvation.” Once this conviction is deeply rooted, the church experiences greater joy and life in everyday living. Far from plunging the church into gloomy anxiety, eschatology actually brings vitality and hope.
Furthermore, as Paul underscores in 1 Thessalonians 5:9–10: “For God has not destined us for wrath, but to obtain salvation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so that whether we are awake or asleep we might live with Him.” This is the gospel of the New Testament. The end times do not signify God’s wrath alone. Though judgment and salvation are two sides of the same coin, for those who believe in Jesus Christ, even judgment becomes a process leading to salvation—a beginning of eternal life in the Lord’s presence. “Whether awake or asleep,” our destiny is sealed to live with Christ. Thus Paul concludes unequivocally the eschatological matters that so concerned the Thessalonians: the “Day of the Lord” is not primarily an object of dread for believers, but rather the completion of their salvation. And so he exhorts them to encourage and build up one another as they await that day.
Even now—and perhaps more so—our contemporary church desperately needs this eschatological faith and orientation. The world plunges deeper into confusion and conflict; people feel anxious about an uncertain future. In such a time, the message the church must deliver is not, “All is about to be destroyed, so be terrified and hide.” Instead, we should proclaim, “The Lord will return, and on that day our salvation will be made complete. Therefore, be awake and sober. Let us serve the world in love.” This is the “good news.” It reflects the posture of the “ten virgins who trimmed their lamps” and the “good and faithful servants who multiplied their talents” (Matt 25). Therefore, when the Lord comes, on any day, we can welcome Him with joy.
The eschatological message that pervades 1 Thessalonians 5 teaches the church how to live in this world: the day of the Lord will indeed come like a thief in the night, yet those who are children of light cannot be taken by surprise, for they are already awake in that light. Pastor David Jang repeatedly reminds us that “The church today must not reduce eschatology to sensational predictions or fearmongering. Rather, eschatology should be the divine tool that spurs the church to greater spiritual health, missionary zeal, and abundant love.” As with the Thessalonian church, believers of all eras join in the cry “Maranatha—Come, Lord Jesus!” while encouraging and edifying one another, so that we may greet Him joyfully when the trumpet sounds.
Dividing our discussion into two main sections, we see that 1 Thessalonians 5 offers us the following eschatological lessons. First, though “no one knows the times or seasons,” we can be certain that the Lord will come. Second, “the day that comes like a thief” will not feel like a thief’s arrival to the children of light, for they are always alert and sober. Furthermore, since the Lord declared that the end will come only “after the gospel is proclaimed to all nations” (Matt 24:14), the church, in speaking of the end, must concurrently engage the world as Christ’s witness.
In the final analysis, eschatology propels the church not to escape reality but to transform it, grounded in a steadfast faith. Facing persecution and hardship, the Thessalonians hoped in “the Day of the Lord,” prompting Paul’s warm commendation and earnest exhortation in his epistle. We hope our church today might likewise earn this praise: “Concerning the times and the seasons, brothers, you have no need for me to write to you,” indicating we have already delved deeply into these truths. At the same time, we must continue to build each other up and encourage one another in love as a “community of light.” Such a church, illuminated even in a dark world, will pray, “Come, Lord Jesus,” serving the world through a proper eschatological faith. And when the Lord appears, we shall enter into true rest and glory with Him. This is the blessed promise Paul delivered to the Thessalonian church—and it remains as potent and valid for us today.
I. El significado de “tiempo y ocasión” desde una perspectiva escatológica
El pasaje de 1 Tesalonicenses 5:1-2, que dice: “Hermanos, acerca de los tiempos y de las ocasiones no tenéis necesidad de que yo os escriba, porque vosotros sabéis perfectamente que el día del Señor vendrá como ladrón en la noche” (1 Ts 5:1-2), muestra claramente uno de los pilares de la fe de la iglesia primitiva. En líneas generales, la iglesia del primer siglo vivía con la idea de que Jesucristo, quien ascendió al cielo, volvería pronto; es decir, mantenía una escatología inminente. Justo después de la resurrección y ascensión de Jesús, los discípulos tenían un gran interés en la pregunta: “¿Cuándo volverá el Señor?”. Entre ellos, la iglesia de Tesalónica era una comunidad que reflexionaba y debatía con gran fervor sobre esta cuestión escatológica. En especial, cuando Pablo permaneció aproximadamente tres semanas (Hch 17) en Tesalónica, enseñando en la sinagoga, los creyentes tesalonicenses sostuvieron un diálogo profundo y constante sobre la soteriología y la escatología. Por ello, Pablo expresa: “Hermanos, acerca de los tiempos y de las ocasiones no tenéis necesidad de que yo os escriba” (1 Ts 5:1), confirmando que su comprensión acerca de “tiempo” (cronos) y “ocasión” (kairós) era ya bastante sólida.
Entonces, ¿cuál es la diferencia entre “tiempo” (cronos) y “ocasión” (kairós)? En griego, cronos (Chronos) denota tiempo en sentido cuantitativo: la cantidad de tiempo, su transcurso y orden. De ahí se derivan términos como “cronología” (chronology) o “cronómetro” (chronometer), que aluden a la idea de “tiempo medido y fraccionado con exactitud”. Por el contrario, kairós (Kairos) se refiere a un momento o lapso especial que implica un cambio cualitativo, una coyuntura concreta. Por ejemplo, cuando alguien celebra su boda, ese día no es simplemente otro en la sucesión cuantitativa del tiempo, sino una “ocasión especial” que marca un antes y un después en la vida de esa persona. Esto expresa la idea de kairós. Los creyentes de Tesalónica comprendían profundamente que, en medio del cronos del transcurso histórico, se acercaba un kairós concreto en el que el Señor volvería: el “día del Señor”.
En la Biblia, el “día del Señor” se menciona en el Antiguo Testamento como el “día de Yahvé” o “día de Jehová”, y en el Nuevo Testamento como el “día de Jesucristo” o el “día de la venida del Señor”. Jesús ya consumó la obra de salvación en la tierra y, con su resurrección y ascensión, abrió el camino de la historia de la redención. Sin embargo, al mismo tiempo, se dijo que “este Jesús, que ha sido tomado de vosotros al cielo, así vendrá como le habéis visto ir al cielo” (Hch 1:11). Por ello, la iglesia vive con la esperanza del “día final”, es decir, del cumplimiento escatológico. La Biblia no nos presenta una visión cíclica de la historia. No la describe, como hace el pensamiento oriental, en términos de un ciclo repetitivo y carente de sentido (primavera-verano-otoño-invierno, y otra vez lo mismo). Al contrario, la Biblia declara una historia lineal: tuvo un inicio único (la creación) y tendrá un final (el fin de los tiempos), en el cual se producirá el juicio definitivo y la llegada de un cielo nuevo y una tierra nueva.
Decir que la iglesia de Tesalónica conservaba una fe escatológica significa que vivía constantemente con la tensión y la santa esperanza de “el Señor vuelve pronto”. Aun en medio de persecuciones, aflicciones y enseñanzas falsas, se aferraban firmemente a la convicción de que “Jesucristo vendrá pronto y limpiará toda su injusticia y sufrimiento”. Tal como dice Jesús en Mateo 10:23: “Cuando os persigan en esta ciudad, huid a la otra… De cierto os digo que no acabaréis de recorrer todas las ciudades de Israel antes que venga el Hijo del Hombre”. Para ellos, la venida del Señor era un suceso inminente, tan impredecible en su tiempo y forma que podían esperarlo en cualquier momento. Además, en Hechos 1, el ángel declara: “¿Por qué estáis mirando al cielo? Este Jesús vendrá tal como le habéis visto ir”. No cabe duda de que esa promesa fue el motor que impulsó la vida diaria de la iglesia primitiva.
En este contexto, Pablo ofrece respuestas concretas a la cuestión escatológica a través de sus cartas a los Tesalonicenses. En el capítulo 4 de 1 Tesalonicenses responde a la pregunta sobre qué sucederá con los que mueran antes de la venida (el tema de la resurrección de los muertos y el arrebatamiento) y, en el capítulo 5, aborda el problema de la fijación de fechas diciendo: “Vosotros sabéis perfectamente que el día del Señor vendrá como ladrón en la noche” (1 Ts 5:2), advirtiéndoles que no se aten demasiado al intento de precisar esos tiempos. Aunque Pablo no revela de manera específica “el día y la hora”, tampoco dice “no hay ninguna señal y solo esperad vagamente”. Más bien enfatiza nuevamente la enseñanza de Jesús de que “vendrá como ladrón” (Mt 24; Lc 17; Mc 13 y otros pasajes sinópticos apocalípticos), confirmando que los tesalonicenses ya conocían bien este principio. Asimismo, mediante la “parábola de la higuera”, subraya la necesidad de discernir la época, recordando que ni el Hijo conoce el día exacto y que pretender determinar la fecha o el año es un esfuerzo inútil.
De esta manera, la escatología es uno de los pilares esenciales de la doctrina cristiana. Si la cristología y la soteriología son indispensables para transformar concretamente nuestra fe y vida, la escatología constituye el núcleo de la “concepción del tiempo” y de la “conciencia histórica” que vincula nuestro presente y nuestro futuro. Desde la iglesia primitiva, ha habido innumerables debates sobre cómo comprender el fin de la historia. Teorías como el premilenarismo, el posmilenarismo y el amilenarismo surgieron de este anhelo. En la visión premilenarista dispensacionalista, se distinguen cuidadosamente eventos como el arrebatamiento, la gran tribulación y el reino milenario. En la perspectiva posmilenarista, la expansión progresiva del reino de Cristo en la tierra, a través de la predicación del evangelio, culminaría con su segunda venida. El amilenarismo entiende el reino milenario de forma simbólica o figurativa, considerando que la era de la iglesia ya representa el “reino espiritual” de Cristo, y enmarca la escatología desde ahí. Aun existiendo diferencias teológicas, todas estas corrientes comparten un punto en común: “el fin ciertamente llegará”. La iglesia, a la vez que espera y se prepara, jamás niega esta gran verdad.
La iglesia de Tesalónica, de igual modo, abordaba estas cuestiones y se las planteaba activamente a Pablo. Cuando Timoteo visitó la comunidad, los creyentes volvieron a presentar sus preguntas sobre la venida del Señor y Pablo les respondió a través de las cartas que hoy conocemos como 1 y 2 Tesalonicenses. La historia de la iglesia demuestra cuán relevante es que, cuando surgen dudas en la fe, se formulen sin titubeos. Lo mismo sucedió en la iglesia de Corinto: escribieron a Pablo, que estaba en Éfeso, consultándole sobre problemas de diversa índole (inmoralidad sexual, carne sacrificada a ídolos, dones espirituales, la resurrección, etc.), y las respuestas de Pablo dieron origen a la Primera Carta a los Corintios. Hoy en día, esta epístola es de inmenso provecho para la iglesia. Si la congregación de Corinto no hubiera expresado esas dudas, quizá no contaríamos con un documento tan enriquecedor. De ahí que el intercambio de “preguntas y respuestas” en el seno de la iglesia sea un proceso clave para la consolidación de la fe.
El hecho de que los tesalonicenses no se dejaran llevar por creencias desordenadas o posturas extremistas sobre la escatología se corrobora en la afirmación de Pablo: “Hermanos, acerca de los tiempos y de las ocasiones no tenéis necesidad de que yo os escriba” (1 Ts 5:1). Eso indica que ya habían aprendido lo suficiente y habían debatido el tema con profundidad. Por supuesto, hubo algunos que adoptaron posturas extremas, como “dado que el día del Señor está cerca, dejemos de trabajar” (2 Ts 3); sin embargo, en términos generales, la iglesia de Tesalónica mantenía un equilibrio: trabajaba con dedicación y, al mismo tiempo, oraba en vela anhelando la venida de Cristo. Pablo elogia dicha sensatez y, aún más, los insta a perseverar “velando y estando sobrios”.
Demos un paso más y observemos los versículos de 1 Tesalonicenses 5:2-3: “porque vosotros sabéis perfectamente que el día del Señor vendrá como ladrón en la noche… cuando digan: ‘Paz y seguridad’, entonces vendrá sobre ellos destrucción repentina, como los dolores a la mujer encinta, y de ninguna manera escaparán”. La metáfora del “ladrón” aparece tanto en el Antiguo como en el Nuevo Testamento para describir catástrofes, juicios de Dios o la segunda venida del Señor que llegan de forma inesperada. Por un lado, describe lo repentino y terrible que resulta este evento para quienes no están preparados. Por otro lado, concuerda con la enseñanza de Jesús: “nadie conoce aquel día ni la hora sino el Padre” (Mt 24:36). Es decir, por ningún método humano se puede predecir la fecha exacta de la venida.
En este punto, el pastor David Jang ha destacado en diversas predicaciones y escritos que “el núcleo de la escatología no radica en calcular fechas, sino en comprender cómo vivir hoy conforme a la voluntad de Dios”. Nuestro deber es confiar plenamente al Padre ese “día y hora”, anhelar la plenitud de la salvación y el juicio justos que la venida de Cristo traerá a este mundo y, a la vez, vivir cada jornada como siervos buenos y fieles. De hecho, la Biblia afirma: “Y será predicado este evangelio del reino en todo el mundo, para testimonio a todas las naciones; y entonces vendrá el fin” (Mt 24:14). Por tanto, al tratar la escatología, la iglesia debe tener presente su “misión de llevar el evangelio a todas las naciones”. La escatología no está diseñada para que la iglesia sucumba al miedo y adopte un talante evasivo; al contrario, la promesa del fin impulsa a “velar y prepararos, viviendo en fe y amor, y predicando el evangelio hasta los confines de la tierra”.
A la luz de esto, la iglesia de Tesalónica fue elogiada también porque no se limitó a “cuadrar fechas” para la venida, sino que mantuvo un ardor sincero por la venida del Señor y, al mismo tiempo, desarrolló la salud espiritual de su comunidad. “Hermanos, vosotros no estáis en tinieblas, para que aquel día os sorprenda como ladrón” (1 Ts 5:4); con estas palabras, Pablo afirma que, siendo hijos de la luz e hijos del día, para ellos la venida de Cristo no sería un acontecimiento imprevisto como la irrupción de un ladrón. Ellos vivían en vela, de modo que, cuando el Señor viniese, estarían listos para recibirlo con gozo. El pastor David Jang también subraya que, cuando la iglesia habla del fin, la actitud más importante es “velar y ser sobrios”. Pero dicho estado de alerta no consiste en un simple temor; se trata de una “preparación activa basada en el evangelio”.
Ahora bien, ¿cómo se aplica la escatología a la vida de cada creyente? Todos enfrentaremos la muerte física, lo que podría llamarse “escatología personal”. A la vez, la historia universal llegará a su fin, es decir, ocurrirá la “escatología cósmica” con la venida del Señor. Pablo exhorta a la iglesia a estar firme y preparada, tanto ante la perspectiva de nuestro “fin personal” como ante el “fin del universo”. ¿Y cómo nos preparamos? Mediante la meditación continua de la Palabra, la práctica de la fe y del amor. “Nosotros, que somos del día, seamos sobrios, habiéndonos vestido con la coraza de fe y de amor, y con la esperanza de salvación como casco” (1 Ts 5:8). En medio de la batalla espiritual, los soldados de Cristo protegen su corazón y su mente. La coraza (pecho) es “la fe y el amor” y el casco es “la esperanza de salvación”. Dicho de otro modo, no basta con saber intelectualmente que el Señor vuelve; debemos preservar nuestra vida y nuestro espíritu con la fe y el amor, y salvaguardar nuestros pensamientos con la esperanza de la salvación, de modo que no nos arrastre ningún engaño.
Por otra parte, Pablo dice: “Todos vosotros sois hijos de luz e hijos del día” (1 Ts 5:5). Y la luz representa la verdad. Es decir, ellos vivían en la Palabra de Dios, contemplaban la historia a la luz de esa Palabra, abrigaban la esperanza escatológica y vivían su presente de acuerdo con ella. Por ello, “el día del Señor” no les llegaría como un ladrón en la noche. Puesto que velaban en esa luz, estaban preparados, como las diez vírgenes con sus lámparas encendidas (Mt 25), para recibir al Señor en cualquier momento. De este modo, la iglesia de Tesalónica es elogiada como un modelo de “comunidad escatológica” en el Nuevo Testamento.
Que Pablo dijese: “No necesito escribiros acerca de los tiempos y de las ocasiones” (1 Ts 5:1) significa que los tesalonicenses ya tenían una fuerte convicción y entendimiento sobre “el fin de la historia”. No vivían con un temor vago ni se dedicaban a confundir a otros con cálculos inexactos, sino que albergaban una escatología sana y una clara conciencia histórica, y, sobre todo, practicaban el amor, la esperanza y la expectativa de la venida del Señor. El pastor David Jang también insiste en este aspecto: la escatología no es una herramienta para atemorizar a la gente o para especular fechas, sino un fundamento de la fe que nos invita a preguntarnos: “¿Cómo hemos de vivir cada día?” y “¿Cuál es la función que la iglesia debe desempeñar en este mundo?”.
II. La necesidad de vivir velando y sobrios, y la misión de la iglesia
Basándonos ahora en 1 Tesalonicenses 5:4 y siguientes (“Mas vosotros, hermanos, no estáis en tinieblas… nosotros, que somos del día, seamos sobrios, vistiéndonos con la coraza de fe y de amor, y con la esperanza de salvación como casco” –1 Ts 5:4-8), veamos de qué manera la fe escatológica de la iglesia primitiva se traduce en una vida práctica y en la misión de la iglesia. Pablo afirma categóricamente: “Hermanos, no estáis en tinieblas, de modo que aquel día os sorprenda como ladrón” (5:4). Dicho de otro modo, para quienes están preparados y en vela, el día del Señor no es un suceso repentino y terrorífico. Hay quienes, al oír la frase “vendrá como ladrón”, se centran solo en la idea de que “nadie sabrá el momento”. Sin embargo, Pablo lo encara desde otra perspectiva: “Si sois hijos de luz, no puede sorprenderos como ladrón; ya estáis preparados en la luz”.
Esto coincide con la parábola de las “diez vírgenes” (Mt 25:1-13). Cinco de ellas habían previsto la situación y tenían aceite para sus lámparas, mientras que las otras cinco no. Cuando llegó el novio, las vírgenes precavidas se unieron a la celebración, pero las otras llegaron demasiado tarde, con la puerta ya cerrada. Para ellas, la llegada del Señor sí se sintió como la irrupción de un ladrón, quedándose fuera y lamentándose. En cambio, para las vírgenes preparadas, no fue un hecho imprevisible, sino “el cumplimiento gozoso de una promesa largamente esperada”. Así era la iglesia de Tesalónica: semejante a esas cinco vírgenes sensatas, no vivían con ansiedad ni obsesión malsana por “no saber cuándo vendría”, sino “corriendo con perseverancia” en la fe de que “el Señor vendrá ciertamente”. Su coraza y casco eran “la fe, el amor y la esperanza”.
Entonces, ¿qué implica “velar y ser sobrios”? En primer lugar, “velar” significa no bajar la guardia espiritualmente. Descuidarse supone “vivir olvidando al Señor y dejándose seducir por el pecado y la tentación diaria”. Cuando se pierde el sentido de la escatología, es fácil hundirse en los valores mundanos o en el materialismo. Pero quienes creen firmemente en la venida de Cristo tienen presente, aun en su trabajo y quehaceres cotidianos, que “somos siervos del Señor, y llegará el día en que rindamos cuentas ante Él”. Tal como Jesús enseña en la parábola de los talentos (Mt 25:14-30), el amo regresa para ajustar cuentas con sus siervos. Éste es otro pilar escatológico: no se trata de un simple “ya viviremos mejor en el cielo nuevo y la tierra nueva”, sino de una invitación a vivir “responsablemente, hoy y ahora”. Los tesalonicenses no abandonaron el trabajo ni evadieron la realidad. Aunque anhelaban la venida del Señor, cumplían fielmente con sus obligaciones, demostrando así su responsabilidad social.
En segundo lugar, “ser sobrios” implica reflexión y moderación. Los que se embriagan, lo hacen de noche (5:7), y quienes duermen, caen en la indiferencia espiritual durante la noche. Pero nosotros, al ser “del día”, hemos de tomar la determinación de no dejarnos arrastrar por las corrientes de este mundo. Pablo menciona la “coraza de fe y de amor”. La coraza protege la parte central del cuerpo: el pecho, que representa lo más profundo del ser. La fe consiste en la confianza de que “Dios nos ha destinado a la salvación”; el amor es “esa fe puesta en acción”. Por otro lado, el “casco de la esperanza de salvación” es absolutamente esencial. Si la fe es la raíz que nos sostiene, la esperanza es la dirección hacia la cual miramos. Quien carece de esperanza se confunde en la adversidad y se rinde a la desesperación. Sin embargo, con la certeza de que “Cristo volverá y llevará todo a su plenitud y a su fin perfecto”, es posible conservar la lucidez en medio de cualquier caos.
Así, quienes velan y son sobrios no contemplan la escatología con pánico. Al contrario, entienden que ese día es “la manifestación gloriosa de la salvación” y el reencuentro con el Señor que tanto han anhelado. Por ello, Pablo declara: “Dios no nos ha destinado para ira, sino para alcanzar salvación por medio de nuestro Señor Jesucristo, quien murió por nosotros para que, ya sea que estemos velando o durmiendo, vivamos juntamente con Él” (1 Ts 5:9-10). Para los creyentes, el fin del mundo no es únicamente juicio y condenación, sino la culminación de la salvación. Una escatología bíblica y sana no impulsa al terror sino a la esperanza. A la vez, no da lugar a la irresponsabilidad ni al libertinaje. Proclamar “el Señor vuelve” significa que, desde ese momento, vivimos cada día buscando su voluntad, anhelando la salvación plena y preparándonos con gozo.
Bajo esta perspectiva, la iglesia ha de mantener siempre presente su “misión escatológica”. Si la iglesia olvida la escatología, corre el peligro de sumergirse en un afán excesivo por los valores e intereses de este mundo. Y si “el reino de Dios” y “la participación en Su reinado” dejan de resonar en nuestra visión de futuro, corremos el riesgo de convertirnos en una organización mundana, más aún que el propio mundo. Por esta razón, el pastor David Jang enseña que la iglesia debe recuperar su identidad como comunidad espiritual que aguarda con anhelo la venida del Señor, abrazando la esperanza escatológica y el ardor misionero de predicar el evangelio hasta lo último de la tierra. La labor de la iglesia —celebrar cultos, enseñar la Palabra, edificarse mutuamente— solo tiene sentido porque “esperamos el retorno de Cristo”.
En 1 Tesalonicenses 5:11, Pablo insiste: “Por lo cual, animaos unos a otros, y edificaos unos a otros, tal como lo estáis haciendo”. En otras epístolas, a veces reprende divisiones y contiendas, pero en Tesalónica los felicita por la forma admirable en que se exhortan y se edifican mutuamente. Esta actitud no se puede desligar de la fe escatológica. La escatología, en última instancia, consolida la conciencia de que “todos somos hijos de Dios y compañeros en la gloria venidera cuando Cristo regrese”. Cuanto más se acerca aquel día, con mayor razón la iglesia debe purificarse, perseverar con fervor y vivir con intensidad su comunión. Debe cubrir las faltas de los hermanos, animarse mutuamente y esforzarse por la edificación de cada uno.
En definitiva, la escatología provee un motor directo para la vida cotidiana. En medio de la incertidumbre del mundo, nos recuerda: “Soy hijo de Dios, hijo de la luz, y debo vivir hoy firme en la fe porque rendiré cuentas en la venida del Señor”. Lo mismo ocurre con la iglesia: es una “comunidad escatológica”. No se trata de un edificio ni de una institución dedicada a recaudar fondos, sino de un conjunto de “hijos de la luz” que esperan “el regreso de Cristo”, predican el evangelio al mundo y practican el amor hasta que se cumpla la redención final. A juicio del pastor David Jang, las actividades de la iglesia que influyen positivamente en la sociedad y propagan el evangelio son la aplicación directa de una fe escatológica. Llevar “aquí y ahora” la cultura del reino de los cielos, socorrer a los marginados, anhelar la venida del Señor… toda esta síntesis conforma la “vida en vela y sobriedad”.
En conjunto, la alabanza y las exhortaciones que Pablo dirige a la iglesia de Tesalónica son aplicables a la iglesia actual. Pablo les dice: “Hermanos, en este tema (la escatología, los tiempos y las ocasiones) ya habéis discutido y estudiado tanto que casi no tengo que añadiros nada”. De esta forma, reconoce que ya poseen una comprensión profunda de la historia y de su fin bajo el plan de Dios. Y los anima con las palabras: “Sois hijos de luz, por lo que aquel día no os sorprenderá como ladrón”. Esta es la identidad que recibimos: una iglesia que anhela la venida del Señor, se prepara, se exhorta y se edifica en el amor. Cuando esta fe arraiga por completo, la iglesia no se tambalea ante persecuciones ni dificultades, y se mantiene fiel al evangelio.
No obstante, es común que hoy día surjan malentendidos acerca de la escatología en el seno de la iglesia. Algunos, incluso, anuncian fechas precisas o siembran temor sobre el fin con propósitos egoístas, a menudo desviando a la gente con posturas sectarias. Por esta razón, necesitamos el “equilibrio escatológico” de la iglesia de Tesalónica. Este equilibrio se sustenta en dos premisas: (1) “nadie conoce el día ni la hora, de modo que es inútil fijar fechas o divulgar revelaciones privadas” y (2) “es esencial discernir los tiempos y, mediante la Palabra, la misión y la práctica del amor, permanecer alerta”. Cuando ambas convicciones se armonizan, la iglesia crece de forma saludable, abarcando la realidad presente y el futuro eterno. La vida cristiana no huye del mundo, pero a la vez mantiene la vista puesta en la consumación del reino de Dios.
El pastor David Jang, al exponer este tema, destaca una de las ideas clave: centrar la atención solo en la frase “vendrá como ladrón” puede conducirnos al miedo o a la obsesión por calcular fechas. Sin embargo, el propósito de Pablo es claro: “Si estáis en la luz, ese día no os llegará como ladrón. Velad y sed sobrios, revestíos de fe y amor, y proteged vuestra mente con la esperanza de la salvación”. Esta certeza llena de vida y gozo a la iglesia. En vez de sumergirla en la oscuridad de la incertidumbre, la escatología la impulsa con una esperanza viva.
Además, como recalca 1 Tesalonicenses 5:9-10: “Dios no nos ha destinado para ira, sino para alcanzar salvación por medio de nuestro Señor Jesucristo… para que, ya sea que vigilemos o que durmamos, vivamos juntamente con Él”. Este es el corazón del evangelio del Nuevo Testamento: la escatología no se reduce al juicio de Dios, pues el juicio y la salvación son dos caras de una misma moneda. Para quienes han creído en Jesús, incluso el juicio forma parte de la consumación de la salvación, el comienzo de la vida eterna ante la presencia del Señor. Pablo da así su respuesta contundente a las interrogantes escatológicas que inquietaban a los tesalonicenses: el “día del Señor” no es motivo de terror para los creyentes, sino el momento de la plenitud de su salvación. Por ello, la iglesia ha de exhortarse y edificarse mutuamente para estar preparada.
En la iglesia moderna, esta visión escatológica sigue siendo tan o más relevante que antes. La sociedad se encuentra cada vez más inmersa en el caos y los conflictos, y crece la sensación de inquietud ante un futuro incierto. La respuesta que la iglesia debe ofrecer no es “el mundo está a punto de hundirse, tened miedo y escondéos”, sino “Cristo volverá, y su venida completará nuestra salvación. Velemos y vivamos sobrios, sirviendo al mundo con amor”. Este es el evangelio. Es, a la vez, la esencia de la parábola de las diez vírgenes (que se preparan con aceite suficiente) y de la de los talentos (siervos que negocian y rinden fruto al amo). De este modo, cualquiera que sea el día, podremos recibir al Señor con júbilo.
El mensaje escatológico de 1 Tesalonicenses 5, pues, enseña de manera constante cómo la iglesia debe vivir en este mundo. El día del Señor llega como ladrón en la noche, pero los “hijos de luz” no son sorprendidos, porque ya están en vela y sobriedad. El pastor David Jang reitera que no debemos convertir la escatología en profecías alarmistas o en un calendario sensacionalista, sino usarla como un medio para fortalecer la salud espiritual, el ímpetu misionero y el amor mutuo en la iglesia. Tal como la iglesia de Tesalónica clamaba “¡Maranata, Señor Jesús!”, todas las iglesias de cada época han de edificarse y animarse mutuamente, preparándose para recibir con gozo el sonido de la trompeta final.
Dividiendo la enseñanza de 1 Tesalonicenses 5 en dos partes, hemos resaltado estas verdades:
Nadie conoce con exactitud los “tiempos y ocasiones”, pero el Señor ciertamente volverá.
Aunque llegue como ladrón para el mundo, para los “hijos de luz” no lo será, pues, al vivir velando y sobrios, están preparados.
Además, Jesús declaró que el fin no vendrá sino después de que el evangelio sea predicado a todas las naciones (Mt 24:14), de modo que la iglesia, al hablar del fin, debe igualmente volcarse a su misión de evangelizar al mundo. A fin de cuentas, la escatología impulsa a la iglesia no a la evasión, sino a la transformación de la realidad. Como sucedía en Tesalónica, en la aflicción y la persecución los creyentes se aferraban a la esperanza del “día del Señor” y, por eso, Pablo les escribió con profunda ternura y exhortación. Ojalá nuestra iglesia reciba hoy la misma aprobación: “Hermanos, en cuanto a los tiempos y las ocasiones, no tengo necesidad de escribiros…”. Es decir, que discutamos y reflexionemos lo suficiente en la Palabra acerca de la escatología y, a la vez, practiquemos cada día el amor, edificándonos como “hijos de la luz”. De esta forma, la iglesia alumbrará en medio de las tinieblas del mundo y clamará: “¡Ven, Señor Jesús!”, sirviendo adecuadamente al mundo con una fe escatológica. Y cuando el Señor regrese, podremos entrar con Él en el reposo y la gloria verdaderos. Tal es la bendita promesa que Pablo transmitió a la iglesia de Tesalónica, y sigue siendo una palabra vigente para todos nosotros hoy.
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에서 2절에 이르는 말씀, 즉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 5:1-2)는 초대교회 신앙의 한 축을 잘 보여 준다. 초대교회는 전반적으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다시 오시리라는 생각, 곧 임박한 종말론을 품고 살았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직후, 제자들은 ‘주님이 언제 오실 것인가?’라는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러한 종말론적인 물음을 매우 뜨겁게 묵상하고 토론하던 공동체였다. 특히 바울이 약 3주간(행 17장) 데살로니가에 머물며 회당에서 가르칠 때,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구원론, 그리고 종말론에 관하여 심도 깊은 문답을 지속적으로 주고받았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살전 5:1)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이미 그들의 ‘때’(크로노스)와 ‘시기’(카이로스)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깊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때’(크로노스)와 ‘시기’(카이로스)의 차이는 무엇인가? 헬라어로 크로노스(Chronos)는 양적인 시간을 뜻한다. 시간의 분량, 흐름, 순서 등을 가리키며, 연대기(Chronology), 크로노미터(Chronometer)라는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정확히 측정되고 분할되는 시간’이라는 개념이다. 반면 카이로스(Kairos)는 질적인 변화를 담아내는 ‘특별한 순간’, 곧 시점을 의미한다. 예컨대 한 사람이 결혼식 날을 맞이하면, 그 하루는 단순히 양적으로 흘러가는 날들 중 하나가 아니라 이전과 이후의 삶이 질적으로 변화되는 ‘특별한 날’이 된다. 이것이 카이로스의 개념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역사가 흐르는 크로노스 중에 주님이 다시 오시는 특별한 카이로스의 날, 즉 ‘주의 날’이 임박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성경이 말하는 ‘주의 날’은 구약에서 ‘야훼의 날’ 혹은 ‘여호와의 날’이라 불리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날’, 혹은 ‘주의 재림의 날’로 이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구원의 사역을 이 땅에서 완성하셨고, 부활·승천하심으로 구원 역사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고 하셨으니, 교회는 ‘그 날’을 향해, 즉 종말의 완성의 날을 소망하며 살아간다. 이처럼 성경은 순환론적 역사관을 제시하지 않는다. 동양사상이 흔히 말하듯이 역사가 봄·여름·가을·겨울처럼 반복되는 무의미한 순환을 거듭한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역사가 유일한 시초가 있었고(창조), 종국에는 끝이 있으며(종말), 그 끝에 최후의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한다는 직선론적 역사관을 선포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종말론적 신앙을 품었다는 것은, 이 교회가 언제나 ‘주님이 곧 다시 오신다’는 긴장감과 거룩한 소망 안에서 살았다는 뜻이다. 이들은 핍박과 환난이 많고 거짓 가르침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머지않아 임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억울함과 고난을 다 씻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굳게 붙들었다. 마태복음 10장 23절에서 예수님이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하셨듯이, 그들에게 있어서 주님의 재림은 언제 어떻게 실현될지 모를 만큼 임박한 실재였다. 더불어 사도행전 1장에서 천사가 말하기를, “왜 하늘을 쳐다보느냐? 예수께서 그대로 오시리라.”라고 선언했으니, 이것이 초대교회가 매일을 살아가는 동력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와 데살로니가후서를 통해 종말론적 물음에 대한 답변을 구체적으로 제공해 준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는 죽은 자들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물음(죽은 자들의 부활과 휴거 문제)에 대해 답을 주고, 5장에서는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 5:2)라고 하며 시기 설정 문제로 너무 얽매이지 말 것을 권면한다. 바울은 ‘때와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징조도 없이 막연히 기다려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도적 같이 온다’는 예수님의 가르침(마 24장, 눅 17장, 막 13장 등 소묵시록)을 재차 강조하면서, 그것을 이미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잘 알고 있다고 확인한다. 또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함을, 그러나 아들조차 그 날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으니 날짜나 연도를 특정하려는 시도는 무익함을 가르친다.
이처럼 종말론은 기독교 교리의 매우 중요한 세 축 중 하나다.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믿음과 삶을 바꾸어 가는 과정에 필수적이라면, 종말론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결속시키는 ‘시간관’과 ‘역사의식’의 핵심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부터 교회가 역사의 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 수많은 논의가 이어져 왔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과 같은 학설들도 그런 갈망의 산물이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서는 휴거와 대환난, 천년왕국 등의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나누고, 후천년설에서는 교회가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점진적으로 확장시켜 결국 그분의 재림을 맞이한다고 본다.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을 상징·비유적으로 이해하며, 지금도 교회 시대가 곧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영적 왕국’이라는 관점에서 종말을 바라본다. 이러한 학설 간의 신학적 논쟁이 존재함에도, 공통점 하나는 ‘종말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그날을 기다리며, 그리고 준비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대명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이런 문제의식을 품고 바울에게 적극적으로 물었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방문했을 때, 교인들은 주님의 재림 시점에 대한 물음을 거듭 내놓았고, 그 답을 바울이 서신으로 보낸 것이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다. 이처럼 신앙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말고 물어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교회사는 증언한다. 고린도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에베소에 있던 바울에게 신앙상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꼼꼼히 물었고(음행 문제, 우상 제물 문제, 은사 문제, 부활 문제 등), 그 답변을 바울이 전해 준 것이 고린도전서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 엄청난 유익이 되었다. 만약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고린도전서와 같은 풍성한 문서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교회 안에서 ‘질문과 답변’의 교류는 신앙의 체계를 세워 가는 핵심적인 과정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종말론에 대해 무질서하게 믿거나 극단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은, 바울이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살전 5:1)이라고 할 만큼 이미 충분한 학습과 토론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로 확인된다. 물론 일부 ‘주의 날이 곧 임박하니 일상의 노동을 중단하자’는 식의 극단적 믿음을 가진 자들도 없지 않았으나, 전체적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면서(살후 3장), 동시에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며 깨어 기도하던 균형 잡힌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바울은 이 교회의 균형감을 높이 평가하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 깨어 근신하도록 계속 권면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나오는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을 살펴보자. ‘도적 같다’는 비유는 구약과 신약 전반에서 재난이나 하나님의 심판, 혹은 주님의 재림이 예고 없이 임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준비되지 않은 자들에게 닥칠 갑작스럽고 참혹한 현실을 묘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말씀은 ‘오직 아버지만 그 날을 아신다’(마 24:36)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부합한다. 즉 사람은 어떤 계산법으로도 재림 시점을 특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는 여러 강론과 저술을 통해, 종말론의 핵심은 “날짜를 추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현재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우리가 그 날과 그 때를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맡기고, 주의 재림이 이 땅에 가져다줄 완전한 구원과 심판을 소망하면서도, 동시에 오늘을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면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는 말씀처럼, 교회가 종말을 논할 때 꼭 명심해야 할 사실은 ‘모든 민족, 모든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 사명’이다. 종말은 교회가 두려움에 굴복하여 세상 도피적인 자세를 취하라고 선포되지 않았다. 오히려 종말의 약속은 “너희가 깨어 준비하여 믿음과 사랑으로 살며, 온 땅에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추동한다.
여기에 비추어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칭찬받은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단순히 ‘재림 날짜 맞추기’에 골몰하지 않고, 주님을 사모하는 열정과 동시에 건강한 신앙 공동체성을 키워 나갔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살전 5:4)라고 했을 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미 빛의 자녀, 낮의 자녀이므로 주의 재림이 그들에겐 도둑처럼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다’라고 밝힌다. 밤에 자는 자들과 달리 그들은 깨어 있으므로, 주님이 언제 오셔도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 또한, 교회가 종말의 때를 이야기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항상 깨어 근신함’이라 말하며, 이 근신과 깨어 있음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복음에 기초한 적극적인 준비’라고 설명한다.
이제 종말론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살펴보자.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육체의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개인적 종말이다. 동시에 역사 전체가 끝나는 시점이 올 것이다. 이는 우주적 종말이자, 주의 재림의 때이다. 바울은 우리의 ‘개인적 종말’은 물론, ‘우주적 종말’에 대해서도 교회가 흔들림 없이 대비하고 있기를 요청한다. 그렇다면 그 대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말씀에 대한 꾸준한 묵상과 믿음과 사랑의 실천이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8)라는 구절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영적 전쟁 속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심장부를 보호하는 흉배(호심경)와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로 무장한다. 그 흉배는 ‘믿음과 사랑’이고, 투구는 ‘구원의 소망’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다시 오심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이라는 흉배로 자신의 영혼과 삶을 지키고, ‘구원의 소망’이라는 투구로 어떤 혼돈의 사상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여기서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다”(살전 5:5)라고 말한다. 빛은 곧 진리를 의미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말씀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며, 종말론적 소망을 품고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이다. 이들은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한다 해도 결코 어둠에 휩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 빛 안에서 깨어 있고, 어느 날 주님이 오시든지 ‘등불을 켜고 기다리는 열 처녀’(마 25장)의 자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데살로니가 교회는 신약 시대에 모범적인 ‘종말론 공동체’로서 칭찬을 받는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역사의 끝날’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이해를 이미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연히 종말을 두려워하거나, 혹은 잘못된 계산법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종말론과 역사의식,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소망과 사랑의 실천을 함께 추구한 것이다. 장재형목사도 이 지점을 여러 번 강조해 왔다. 종말론은 두려움을 부추기거나 날짜를 점쳐서 사람들을 현혹하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에게 ‘어떻게 매일을 살 것인가’, ‘교회가 이 땅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해 주는 소중한 신앙의 근본이다.
Ⅱ. 깨어 근신하는 삶의 필요성과 교회의 사명
이제 데살로니가전서 5장 4절 이하의 말씀, 즉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4-8)를 바탕으로, 초대교회의 종말론적 신앙이 실제로는 어떤 실천적 삶과 교회 사명으로 연결되는지를 살펴보자.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5:4). 이 말은, 준비되고 깨어 있는 사람에게 주의 날은 갑작스러운 공포가 아니라는 뜻이다. 누군가는 ‘도적 같이 온다’는 표현을 듣고서 ‘아무도 그 때를 모른다’는 데만 초점을 맞출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말한다. “너희가 빛의 자녀라면, 도적같이 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빛 가운데서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셨던 ‘열 처녀’ 이야기(마 25:1-13)와도 일맥상통한다.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했고, 나머지 다섯은 그렇지 못했다. 막상 신랑이 도착했을 때, 준비된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했으나, 준비되지 못한 이들은 문이 닫힌 뒤에야 왔다. 그들에게 주님의 재림은 ‘도둑같이’ 느껴졌을 것이고, 문 밖에 선 채 슬픔을 당했다. 그러나 준비된 이들에게는 전혀 도둑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간절히 기다리던 ‘약속의 실현’이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런 준비된 다섯 처녀와 같았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시점을 놓고 불안과 강박에 빠진 것이 아니라, ‘주님은 반드시 오신다’는 믿음을 경주하며, 믿음·사랑·소망의 무장(흉배와 투구)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깨어 근신한다’는 구체적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깨어 있음은 영적으로 방심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방심한다는 것은‘주님을 망각한 채 일상의 유혹과 죄에 빠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종말론적 감각을 잃으면, 세상 가치관이나 물질주의에 쉽게 함몰된다. 그러나 재림을 분명히 믿는 이들은 일상의 노동과 사역 가운데서도 ‘나는 주님의 종이다. 언젠가 주님 앞에서 결산할 날이 올 것이다’라는 의식을 놓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마 25:14-30)에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주인은 반드시 돌아와 종들과 결산한다. 이는 종말론의 또 다른 핵심 가르침이다. 곧 종말론은 ‘나중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잘 지내자’는 막연한 기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 이 순간을 책임감 있게 살라’는 현재적 도전을 촉구한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일을 게을리하거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주님의 날을 사모하면서도, 자신들의 생업을 충실히 감당함으로써 세상 속에서의 책임을 다하려 했다.
둘째, 근신한다는 것은 자기 성찰과 자제를 의미한다. 술 취하는 이들은 밤에 술 취하고(5:7), 밤에 자는 자들은 영적 무감각에 빠져든다. 그러나 빛의 자녀인 우리는 ‘낮에 속했으니’ 세상 풍조에 의해 무방비하게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바울은 이런 면에서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강조한다. 영혼의 중심부, 즉 가슴을 지켜 내는 장치가 믿음과 사랑이란 것이다. 믿음이란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이며, 사랑은 ‘그 믿음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는 실천’이다. 그리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 역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믿음이 우리의 삶을 세워 주는 뿌리라면, 소망은 우리가 바라보는 미래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머리(생각)가 흔들린다. 세상의 어려움을 만날 때, 머리가 혼돈과 절망에 빠져 버린다. 그러나 구원의 소망, 곧 주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선으로 마무리하시고 완성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렇듯 깨어 근신하는 사람은, 종말을 ‘도적같이 임하는 심판의 밤’으로만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날이야말로 ‘주님을 직접 대면하는 구원과 영광의 날’이요,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본향에 이르는 날’이 된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9-10)라고 선포한다. 이는 신자에게 종말이 ‘정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한 구원의 완성’을 의미한다는 핵심 진리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건전한 종말론을 지닌 사람은 불필요한 공포에 휩싸이지 않는다. 동시에 자기 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무책임이나 방종에 빠지지도 않는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 선포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그분의 뜻을 좇아 살며, 장차 맞닥뜨릴 충만한 구원을 사모하고 기쁨으로 예비하는 길을 택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세상과 달리 ‘종말론적 사명’을 늘 인식해야 한다. 교회가 종말론을 잊으면, 현세적 가치와 이익 추구에 매몰될 위험이 크다. 교회가 ‘장차 하나님 나라가 오고, 우리는 그분의 왕국에 참여한다’는 비전을 잃어버리면, 오히려 세상보다 더 세상적인 조직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주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영적 공동체로서, 종말론적 소망을 붙들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적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교회는 단순히 자기 교인수나 세력 확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마 24:14) 사명을 감당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이 땅에서 예배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서로 권면하여 덕을 세우는 것은 모두 ‘주의 다시 오심’이라는 소망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고 말한다. 다른 서신들에서는 때로 교회의 분열과 다툼을 책망하기도 하는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서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모습이 탁월했다. 이는 종말론적 신앙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태도다. 왜냐하면 종말론은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며, 주님이 오실 때 함께 영광에 들어갈 동역자들”이라는 의식을 키우기 때문이다. 그 날이 가까울수록 교회는 더 정결히, 더 간절히, 더 뜨겁게 함께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형제들의 허물을 서로 덮고, 격려하며, 서로가 세워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종말론은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에 직접적인 동기를 부여한다.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빛의 자녀이니, 주의 다시 오심에 대비해 믿음의 삶을 펼쳐 가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곧 종말론적 공동체다.건물이 아니라, 재정을 모으는 기관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리며(마라나타),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구원의 완성을 맞이할 ‘빛의 자녀들’의 모임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에서, 교회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복음을 확장해 나가는 활동이야말로 종말론적 신앙의 직접적 실천이라고 강조한다. ‘지금 여기’에서 천국 문화를 실현하고, 세상의 음지와 소외된 자들을 돌보고, 동시에 주님 오심을 갈망하는 이 복합적인 태도가 바로 ‘깨어 근신하는 삶’이다.
종합해 볼 때,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준 칭찬과 권면은,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가 이미 이 문제(종말론과 때와 시기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깊이 연구하고 토론하여 더 이상 내가 쓸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는 곧 이들이 이미 하나님의 역사와 종말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통찰을 가졌음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더욱이 “너희는 빛의 자녀이니,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할 수 없다”는 격려는, 우리가 주님 오심을 사모하고 준비하며, 서로 격려하고 서로 세워 가는 교회로 부름받았다는 정체성을 재확인시켜 준다. 이런 믿음이 온전히 자리잡힐 때, 교회는 세상의 환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복음에 충실하게 된다.
물론, 오늘날 교회 내에서도 종말론이 흔히 오해를 낳는 경우가 있다. 특정 날짜를 예언하거나, 종말 공포심을 부추겨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이단적 움직임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가졌던 ‘균형 잡힌 종말론’을 배워야 한다. 그 균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아무도 그 날과 그 때를 알 수 없으니, 무모한 추산과 사적인 계시를 내세우지 말라”는 것, 또 하나는“그러나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말씀과 선교, 그리고 사랑 실천을 통해 늘 깨어 있어라”는 것이다. 이 두 가르침이 조화를 이루면, 교회는 현세와 내세를 아우르며 건강하게 성장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적 현실도 무시하지 않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이중적 구조를 갖게 된다.
장재형목사가 이러한 주제를 강해할 때, 가장 강조하는 대목 중 하나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도적 같이 임할 그날”이라는 표현만을 들으면 두려움으로 위축되거나, 혹은 막연히 그 날을 계산해 내고자 애쓰는 것으로 치우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이 의도한 바는 명확하다. “너희는 그날이 언제 오더라도 이미 빛 가운데 있으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다만 깨어 근신하라. 믿음과 사랑, 그리고 구원의 소망으로 무장하라.” 이런 확신이 자리하면, 교회는 일상생활에서 오히려 더 큰 기쁨과 생명을 누리게 된다. 종말론이 교회를 음침한 불안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기와 소망으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데살로니가전서 5장 9-10절에서 바울이 강조했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진노)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신약의 복음이다. 종말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구원과 심판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오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 심판마저 구원의 한 과정이며, 주님을 대면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시작점이다. 그래서 “깨든지 자든지, 예수님과 함께 살게 하려 하셨다”(5:10)는 구절이 그들의 운명을 확정한다. 바울은 이렇듯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토록 궁금해하던 종말론적 문제에 명쾌한 결론을 제시한다. ‘주의 날’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성도의 구원 완성의 때다. 그러므로 교회는 서로를 권면하고 덕을 세우면서 그 날을 대비하라고 당부한다.
현대 교회에서도 여전히, 혹은 더더욱 이 종말론적 신앙과 태도가 필요하다. 세상은 점점 혼란과 갈등 속으로 치닫고, 사람들은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느끼며 불안을 호소한다. 이럴 때 교회가 줄 수 있는 대답은 “이제 곧 온 세상이 망할 것이니, 두려워하고 숨어 있어라”가 아니다. 교회가 전해야 할 소식은 “주님이 다시 오시며, 그날에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다. 그러므로 깨어 근신하며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자”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리고 그것이 ‘등을 준비하는 열 처녀의 모습’이며, ‘달란트를 장사해 남기는 착하고 충성된 종의 자세’다. 그러할 때, 주님이 오시는 어느 날이라도 우리는 그분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흐르는 종말론적 메시지는, 교회가 어떻게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시종일관 가르쳐 준다. 주의 날은 밤에 도적같이 이르지만, ‘빛의 자녀’인 우리는 그 날이 결코 우리를 기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빛 가운데 깨어 근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거듭 상기시키면서, “오늘날 교회가 종말론을 단지 말세 공포나 자극적인 예언으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종말론은 교회를 더욱 건강하게, 더욱 선교적으로, 더욱 사랑이 충만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도구다”라고 가르친다. 과거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모든 시대의 교회도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Maranatha)’라는 외침 속에서 서로 덕을 세우고 서로를 권면하며, 주님의 나팔 소리가 울릴 때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이렇게 두 소주제로 나누어 살펴본 데살로니가전서 5장의 종말론적 교훈은, 곧 우리에게 다음을 강조한다. 첫째,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분명히 주님은 오신다.’ 그리고 둘째, ‘도적같이 임하는 그 날이 빛의 자녀에게는 결코 도적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늘 깨어 근신함으로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된 후에야 끝이 올 것(마 24:14)이라 말씀하셨기에, 교회는 종말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해야 한다.
결국 종말론은 교회를 현실 도피가 아닌 현실 변혁으로 나아가게 하는 ‘굳건한 믿음의 동력’이다. 핍박과 어려움 중에서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주의 날’을 소망했고, 그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향해 한없이 따뜻한 칭찬과 권면을 섞어 편지를 썼다. 오늘날에도 우리 교회가 이 칭찬을 받기를 소망한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미 충분히 깊은 말씀의 토론과 묵상이 이루어지되, 동시에 날마다 사랑 안에서 성도들을 권면하고 세우는 ‘빛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는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등불을 밝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올바른 종말론적 신앙을 통해 세상을 섬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 오시는 날, 우린 그분과 함께 참된 안식과 영광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전했던 복된 약속이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이다.
Dans ce texte, nous allons nous concentrer sur la scène de la prière de Jésus à Gethsémané, relatée dans l’Évangile selon Marc au chapitre 14, versets 32 à 42, tout en approfondissant le sens de « marcher avec le Christ », thème que le pasteur David Jang a souvent souligné. Nous nous pencherons sur la souffrance de Jésus, la réaction des disciples et la prière solitaire qui révèle l’essence même de la foi, afin de discerner le message qui nous est adressé aujourd’hui et d’examiner l’enseignement principal que le pasteur David Jang souhaite transmettre. Le propos s’enchaînera sans divisions en sous-thèmes, suivant un seul fil conducteur : comment la scène de Jésus priant dans les larmes et la détresse au jardin de Gethsémané se relie-t-elle à la vie de chacun d’entre nous, et en quoi cette expérience nous éclaire-t-elle sur le chemin du disciple qui marche avec le Christ ?
Pour commencer, dans Marc 14, nous voyons que Jésus est à l’aube de la mort sur la croix. Après avoir célébré le repas de la Pâque avec ses disciples, il se rend au jardin de Gethsémané, au pied du mont des Oliviers, où il prie avec une intensité telle que sa sueur devient comme des gouttes de sang. Le « mont des Oliviers » évoque généralement une forêt d’oliviers, et « Gethsémané » signifie « pressoir à huile », c’est-à-dire un lieu où l’on pressait les olives pour en extraire l’huile.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ici la double portée symbolique de l’huile d’olive : elle est associée à la paix et à la pérennité, mais aussi à la tradition d’onction des rois, telle qu’on la retrouve dans la Bible. En hébreu, « Mashia’h » (Messie) et en grec, « Christos » (Christ) signifient tous deux « l’oint ». Ainsi, bien que Jésus se tienne à Gethsémané en tant que Christ, c’est-à-dire Roi oint, l’image que voient les disciples n’est pas celle d’un couronnement royal, mais bien celle de Jésus suant des gouttes de sang alors qu’il se prépare à la souffrance de la croix. Cette opposition entre la fonction royale de Jésus et la prière d’une douleur extrême forme un contraste d’une intensité unique dans l’ensemble de l’Écriture.
La prière de Jésus à Gethsémané, communément rapportée dans les Évangiles de Matthieu, Marc et Luc, ne figure pas dans l’Évangile de Jean. Le pasteur David Jang explique que Jean, dès son chapitre 13, éclaire déjà la manière dont Jésus a pleinement accepté de porter la croix, ce qui l’aurait amené à ne pas relater en détail l’épisode de la prière de Gethsémané. En Jean 13, Jésus annonce lors de la Cène avec ses disciples qu’il est désormais « glorifié » et prononce un discours d’adieu d’ordre eschatologique. Autrement dit, avant même que ne commencent ses souffrances, Jésus a déjà proclamé que la voie de la croix constitue sa « gloire », faisant de ce choix un acte décidé. Le pasteur David Jang interprète ce fait ainsi : « Dès avant le Calvaire, le Seigneur avait opté pour la voie du Christ. Jean, désireux de souligner la majesté royale d’un Jésus pleinement réceptif à la volonté du Père, pourrait avoir choisi d’omettre la prière de Gethsémané. »
Néanmoins, les Évangiles synoptiques (Matthieu, Marc, Luc) nous dévoilent la profondeur de l’angoisse humaine et des pleurs de Jésus. Dans Marc 14, 33-34, il est écrit que Jésus « commença à éprouver de la frayeur et des angoisses » et qu’il déclara : « Mon âme est triste à en mourir. » L’Épître aux Hébreux (5, 7) ajoute : « C’est lui qui, dans les jours de sa chair, offrit avec de grands cris et avec larmes des prières et des supplications à celui qui pouvait le sauver de la mort. » Voilà qui illustre de façon vivante l’humanité de Jésus : il est semblable à nous. En même temps, il manifeste un acte de foi suprême en s’adressant à Dieu comme à son « Abba, Père », et en demeurant obéissant jusqu’au bout. Le pasteur David Jang déclare : « Jésus a prié avec une ardeur telle que sa sueur en est devenue comme du sang. Cela montre sans détour combien la voie de la croix est terrible et ne peut être envisagée sans une terreur et une souffrance profondément humaines. » Pourtant, Jésus s’écrie : « Cependant, non pas ce que je veux, mais ce que tu veux », démontrant ainsi une soumission parfaite à la volonté divine.
À ce stade, nous devons retenir, comme le rappelle souvent le pasteur David Jang, que Jésus aurait effectivement pu « éviter » le chemin de la croix. Dans les récits de Matthieu 26 ou Marc 14, on retrouve la demande de Jésus : « Que cette coupe s’éloigne de moi. » D’un côté, Jésus, Fils de Dieu mais aussi pleinement homme, exprime la terreur et la souffrance extrêmes qu’entraîne la perspective de la mort. Et dans le même élan, il poursuit sa prière par : « Toutefois, non pas ce que je veux, mais ce que toi, tu veux. » Pour le pasteur David Jang, « lorsque nous affirmons vouloir suivre la volonté de Dieu dans notre vie de foi, il nous arrive souvent d’éprouver faiblesse et tentation de fuir. Jésus lui-même a traversé ce moment, mais il a persévéré dans la volonté du Père jusqu’au bout, nous montrant ainsi l’exemple. » Voilà un défi incontournable pour tous ceux qui veulent marcher avec le Christ, mais aussi un message de consolation et d’espérance.
Pendant ce temps, les disciples s’endorment. Pierre, notamment, avait affirmé pendant le repas : « Je ne te renierai en aucun cas ; je suis prêt à mourir avec toi. » Jésus lui avait rétorqué : « Avant que le coq chante deux fois, tu m’auras renié trois fois. » Or, au jardin de Gethsémané, alors que Jésus les invite à prier avec lui, Pierre et les autres disciples s’endorment, incapables de tenir ne serait-ce qu’une heure en prière. Jésus leur lance : « Simon, tu dors ! Tu n’as pu veiller une heure ? Veillez et priez afin de ne pas entrer en tentation. » Le pasteur David Jang, à ce sujet, remarque : « C’est le moment le plus décisif pour le Seigneur, un combat spirituel de toute une vie, mais les disciples, inconscients de la gravité de la situation, sombrent dans le sommeil comme s’ils faisaient une simple promenade nocturne. C’est hélas une image de nous-mêmes : bien souvent, alors que Dieu agit dans l’histoire et que tout est d’une grande solennité, nous ne percevons rien et nous nous couchons. »
Au moment de l’arrestation de Jésus, les disciples fuient précipitamment. Dans Marc 14, 51-52, un jeune homme qui le suivait, vêtu seulement d’un drap, est saisi ; il s’échappe en laissant le drap et s’enfuit nu. Selon la tradition, ce « jeune homme » serait l’évangéliste Marc lui-même. Le pasteur David Jang explique : « On suppose souvent que le dernier repas pascal s’était tenu dans la maison de Marc et qu’après le départ de Jésus et des disciples vers le mont des Oliviers, Marc, réveillé en sursaut, aurait voulu se ruer à leur suite. Mais par peur, il a fini par s’enfuir nu, abandonnant son drap. » Marc n’a pas dissimulé cette scène honteuse dans son Évangile ; au contraire, il la dévoile sans ambages, soulignant à quel point la faiblesse humaine peut se manifester, tout en témoignant que cette faiblesse peut être restaurée par l’amour de Jésus. Le pasteur David Jang qualifie cela de « confession de foi sincère » et ajoute : « Marc reconnaît publiquement ses propres faiblesses et célèbre la grâce du Seigneur qui l’a transformé. Nous aussi, plutôt que de masquer nos faiblesses, devons les reconnaître, afin de laisser la puissance de Dieu se déployer. »
Ainsi, Gethsémané, lieu où Jésus, Roi oint, aurait dû être intronisé, est devenu un lieu de douleur et de détresse, où il sue sang et eau. Cet événement montre qu’avant que le titre de « Christ » ne soit pleinement assumé – c’est-à-dire avant que Jésus ne soit officiellement reconnu et confessé comme « l’oint de Dieu » –, la croix et la résurrection étaient inévitables. Les disciples n’étaient pas prêts à le reconnaître comme Roi, ni à marcher résolument à ses côtés sur ce chemin. De là, la solitude qui entoure Jésus, solitude qui atteint son paroxysme dans la sueur de sang de Gethsémané et sur le Calvaire. Le pasteur David Jang précise : « Les disciples, même après avoir reçu le pain et le vin et entonné un hymne pendant la Pâque, étaient complètement ignorants de la souffrance imminente. Au moment où le sang de l’agneau pascal coulait dans le torrent du Cédron, ils ne saisissaient pas la portée du sacrifice du Seigneur. Jésus a traversé seul ces eaux rougies pour pénétrer dans Gethsémané, où il a prié avec larmes et sang. »
Dans cette scène, Jésus s’adresse à Dieu en l’appelant « Abba, Père ». Ce terme combine l’araméen « Abba » (Papa) et le grec « Patêr » (Père), exprimant l’intimité et la confiance absolue qui unissent Jésus au Père. Durant son ministère en Galilée, Jésus parlait déjà de « votre Père qui est aux cieux », mais dans cette vallée de souffrance, sa prière prend la forme encore plus intime et pressante de « Papa, Père ! ».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 « Dans le parcours de la foi, la plus grande tentation survient quand nous mettons en doute l’amour de Dieu à notre égard. Même Jésus, dans sa souffrance extrême, a crié “Abba, Père”, nous laissant l’exemple que, dans la crainte la plus profonde, nous devons placer notre confiance entière en Dieu. » Même face au pouvoir le plus écrasant de la mort, nous ne renonçons pas à croire en la bonté de Dieu ; nous confessons : « Père, tout t’est possible. »
Autre élément notable : la prière de Jésus ne vise pas à « obtenir » un avantage, mais à « engendrer » l’obéissance. Jésus demande que « cette coupe s’éloigne » si possible, mais conclut finalement avec : « Non pas ce que je veux, mais ce que toi, tu veux. » À ce propos, le pasteur David Jang déclare : « Nous voulons souvent, par la prière, “faire changer” la volonté de Dieu. Mais la prière que Jésus nous enseigne, c’est celle qui nous “change” pour adhérer à la volonté de Dieu. C’est là toute l’essence de la prière de Gethsémané : au-delà de notre volonté et de nos émotions, nous soumettre jusqu’au bout au Père. » Ainsi, la prière de Gethsémané demeure le modèle intemporel pour tous les chrétiens, offrant la force de suivre le Seigneur dans n’importe quelle situation.
Pourtant, des disciples encore fragiles n’ont pu se joindre à Jésus dans cette prière. Pierre s’est endormi, Jacques et Jean n’ont pas saisi la gravité de l’heure. Alors que Jésus leur dit : « Vous n’avez pu veiller une heure ? Veillez et priez, afin de ne pas entrer en tentation ; l’esprit est ardent, mais la chair est faible », ils demeurent sans réaction. Le pasteur David Jang voit dans ces hommes l’image de « l’Église dans sa dimension humaine » : « Même des croyants au discours assuré peuvent, quand la crise survient, s’endormir ou s’enfuir. C’était vrai à l’époque de Jésus, et c’est pareil de nos jours. D’où la nécessité de méditer la prière de Gethsémané, de percevoir notre vraie condition, et plutôt que de nous enorgueillir comme Pierre, de nous agenouiller comme Jésus, abandonnant tout dans les mains du Père. »
Après cette troisième prière, Jésus s’exclame : « Dormez maintenant et reposez-vous ! C’est fait, l’heure est venue ! » puis il accueille volontiers son destin de croix. Quand les soldats arrivent, les disciples se dispersent. Le pasteur David Jang commente : « Même avec de bonnes résolutions et une détermination ardente, sans la prière dans l’Esprit, nous tombons aisément. Pierre, qui criait qu’il ne renierait jamais le Seigneur, finit par le renier de la façon la plus humiliante. Mais Jésus, sachant d’avance sa chute, a continué de l’aimer et de le relever. » C’est là un message d’espérance : malgré nos fautes et nos moments de honte, le Seigneur nous offre la grâce de revenir à lui.
La prière de Gethsémané amène donc Jésus à assumer, en obéissance à la volonté du Père, la « coupe de la mort » impossible à surmonter humainement. Et c’est au Calvaire, sur la croix, que cette obéissance se concrétise. Le pasteur David Jang insiste : « La croix de Jésus ne sert à rien pour qui se contente de la contempler de loin en spectateur. Nous sommes appelés à cheminer avec lui sur cette voie. Tel est le sens de “marcher avec le Christ” et la porte d’accès à la vie éternelle en lui. » Nous sommes appelés à suivre le chemin d’obéissance qu’il a ouvert à Gethsémané. Même si ce chemin paraît tragique et solitaire, la gloire de la résurrection en est l’aboutissement promis.
Par ailleurs, s’agissant de l’omission de la prière de Gethsémané dans l’Évangile de Jean, le pasteur David Jang rappelle : « L’accent de Jean est mis sur le fait que Jésus considère déjà la croix comme une gloire, dès le chapitre 13. Son intention éditoriale pourrait avoir été de souligner la majesté de Jésus Roi, plutôt que son angoisse humaine. » De son côté, l’Évangile de Jean met en relief, au chapitre 17, la grande prière sacerdotale où Jésus intercède pour le monde et pour ses disciples, ce qui fait ressortir son autorité royale. Les synoptiques, eux, mettent l’accent sur la souffrance humaine de Jésus et la manière dont il l’a surmontée dans la prière. Ces deux approches ne se contredisent pas ; elles se complètent, nous révélant plus largement Jésus vrai Dieu et vrai homme.
Le pasteur David Jang commente : « Nous aussi, dans notre parcours spirituel, vivons parfois des “Gethsémané”. Devant la violence de ce monde, représentée par la couleur rouge sang qui peut nous faire peur, nous nous sentons seuls ou incompris. Pourtant, Jésus y est passé avant nous, nous laissant pour modèle cette prière “non pas ce que je veux, mais ce que toi, tu veux”. Quand nous faisons de cette prière la nôtre, alors même dans la solitude, le chemin avec le Christ ne conduit pas à l’abandon : il nous mène à la joie de Pâques. » Ainsi, Gethsémané et le Calvaire incarnent à la fois le drame le plus sombre et la manifestation la plus éclatante de la puissance et de l’amour de Dieu.
Cette scène de Gethsémané ne nous renvoie pas seulement à la situation des disciples, mais à celle de tout chrétien d’aujourd’hui. Si nous avions été là, aurions-nous agi différemment ? Peut-être serions-nous, comme Marc, sortis en hâte avec pour seul vêtement un drap, finissant par nous enfuir. Le pasteur David Jang pointe la limite évidente des résolutions humaines : « Pierre avait beau dire qu’il était prêt à affronter n’importe quelle difficulté, s’il ne reste pas éveillé en prière devant Dieu, il suffit d’une petite épreuve pour le faire chuter. La foi ne se fortifie que lorsque nous nous abandonnons totalement à Dieu dans la prière. » Plus que le zèle apparent, c’est l’humilité intérieure et la foi qui importent.
La fin du chapitre 14 de Marc décrit l’arrestation de Jésus et son interrogatoire devant le grand prêtre, tandis que Pierre, conforme à la prophétie de Jésus, le renie trois fois. Au chant du coq, il se souvient de la parole du Seigneur et se met à pleurer amèrement. Le pasteur David Jang relève ici l’ampleur de la misère humaine et des larmes : « Nous sommes susceptibles de chuter et d’échouer. Mais ce n’est pas la fin. Après sa résurrection, Jésus est allé vers Pierre, lui confiant à nouveau la mission de paître ses brebis. Ainsi, la prière de Gethsémané, qui débouche sur la croix, montre l’immensité de l’amour de Jésus pour des pécheurs incapables de le suivre. »
De fait, le pasteur David Jang signale que « marcher avec le Christ » n’est pas un chemin facile ; c’est un chemin parfois solitaire, douloureux et semé de larmes. Mais il est aussi vrai que Jésus a précédé chacun de nos pas et a tout porté, y compris les échecs de ses disciples. Ainsi, si nous chutons, il nous relève. La prière de Gethsémané devient alors « un autoportrait de la souffrance qui nous guide vers l’espérance de la résurrection ». Oui, un chrétien peut traverser des situations qui ressemblent à l’obscurité et à la tristesse de Gethsémané, mais en priant, dans la soumission à la volonté du Père, nous accédons nous aussi à l’aube de Pâques.
Pour résumer : pour vaincre la « coupe de la mort » que nul ne saurait affronter par ses seules forces, Jésus obéit au Père par la prière à Gethsémané, et cette obéissance trouve son aboutissement sur la croix du Calvaire. Le pasteur David Jang déclare : « Si nous restons simples spectateurs, la croix ne produit rien pour nous. Il nous faut y prendre part aux côtés du Seigneur. C’est ce que signifie marcher avec le Christ : entrer dans la vie éternelle qu’il nous offre. La route de l’obéissance inaugurée à Gethsémané, nous devons la suivre dans la foi. Même si elle semble solitaire et tragique, la gloire de la résurrection nous est promise. »
D’autre part, le pasteur David Jang revient sur l’idée que Jean ne relate pas la prière de Gethsémané pour souligner la « gloire » de la croix dès le chapitre 13 de son Évangile. Ainsi, Jean 17 met en avant la prière royale où Jésus intercède pour le monde et pour les siens. Les Évangiles synoptiques, eux, exposent la souffrance humaine de Jésus, montrant comment il la surmonte grâce à la prière. Ces visions se complètent pour approfondir notre compréhension du Jésus Fils de Dieu et Fils de l’homme.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ensuite : « Il est fréquent qu’au cours de notre pèlerinage spirituel, nous soyons confrontés à un “Gethsémané”. Nous voyons, telles ces eaux rouges du Cédron, les indices sanglants d’un monde violent, et nous tremblons, parfois seuls et effrayés. Or, Jésus nous a précédés sur ce chemin. Il nous a laissé cet exemple : “Non pas ce que je veux, mais ce que toi, tu veux.” Si nous adoptons cette prière, alors même isolés et dans la souffrance, nous pouvons avancer avec le Seigneur vers la joie de la résurrection. » Dès lors, Gethsémané et le Calvaire, malgré l’horreur qu’ils manifestent, sont aussi les lieux où la puissance et l’amour de Dieu se révèlent de la manière la plus manifeste.
De plus, l’événement de Gethsémané nous sert de « miroir spirituel ». Aurions-nous été meilleurs que les disciples ? Nous aurions probablement, comme Marc, suivi Jésus en vitesse, un drap pour seul habit, avant de prendre la fuite. Le pasteur David Jang commente l’extrême fragilité des serments et larmes humains : « Même si nous clamons haut et fort, comme Pierre, que rien ne nous fera abandonner le Seigneur, si nous ne restons pas en prière devant Dieu, la moindre secousse nous fera vaciller. La foi ne se fortifie que dans la dépendance absolue envers Dieu, nourrie par la prière. » En somme, il ne s’agit pas de forcer une apparence de piété, mais de cultiver une humilité et une confiance radicales.
Le texte de Marc 14 montre ensuite Jésus amené devant les grands prêtres, tandis que Pierre le renie par trois fois avant que le coq chante, conformément à la prophétie. À l’instant même où le coq se fait entendre, Pierre se souvient de la parole de Jésus et pleure amèrement. Le pasteur David Jang note que ces larmes traduisent la détresse humaine, mais souligne aussi que ce n’est pas la fin de l’histoire : « Jésus, ressuscité, ne rejette pas Pierre, il va le chercher pour lui confier de nouveau la mission de prendre soin de ses brebis. Voilà qui illustre la grandeur de l’amour de Jésus, déjà visible dans sa décision de prendre la croix, et sa fidélité à relever des pécheurs démunis. »
Pour le pasteur David Jang, on comprend donc que « marcher avec le Christ », loin d’être facile, peut ressembler à un parcours de solitude, de détresse et de larmes. Toutefois, Jésus l’a parcouru avant nous, et il a pris sur lui l’échec de ses disciples. Ainsi, nous pouvons tomber, mais il nous donne la grâce de nous relever. La prière de Gethsémané est donc « le portrait d’une épreuve dont la finalité est la résurrection ». Le chrétien doit s’attendre à traverser, lui aussi, des situations de nuit noire et de combat solitaire. Pourtant, à travers la prière et l’abandon à la volonté du Père, nous accédons à la lumière de la résurrection.
La prière de Jésus à Gethsémané nous exhorte à nous rappeler les paroles de Jésus : « Si quelqu’un veut venir après moi, qu’il se renie lui-même, qu’il se charge de sa croix, et qu’il me suive. » Le pasteur David Jang déclare : « Jésus a cheminé seul. Les disciples se sont endormis ; l’un s’est enfui ; un autre l’a trahi. Ce chemin de la croix n’a jamais été facile. Toutefois, Jésus ne recula pas d’un pas et, au bout de la route, il y eut la victoire de la résurrection. » Ce message demeure inchangé pour tous les disciples, hier comme aujourd’hui, et nous invite à entendre la voix de Jésus qui nous dit : « Venez avec moi. »
En conclusion, le pasteur David Jang relève quelques points clés que nous enseigne la prière de Gethsémané. Premièrement, Jésus a connu la peur et la souffrance humaines, et nous ne sommes pas épargnés de telles épreuves. Deuxièmement, même au cœur de la douleur, Jésus s’est écrié « Abba, Père ! », et nous sommes appelés à croire sans réserve en la bonté de Dieu. Troisièmement, l’obéissance de Jésus, « non pas ma volonté, mais la tienne », trouve sa source dans la prière, d’où l’importance de « veiller » comme il l’a demandé. Quatrièmement, nous devons reconnaître notre faiblesse, à l’exemple des disciples assoupis, et mettre notre confiance dans la grâce qui nous relève. Enfin, la prière de Gethsémané aboutit à la croix et à la résurrection : la croix signifie la pire détresse de l’humanité, mais la résurrection est la plus grande espérance, et c’est en traversant ces deux réalités que notre foi se fortifie.
Ainsi, Gethsémané et le Calvaire ne sont pas de simples événements historiques survenus il y a 2 000 ans en Palestine, mais un miroir spirituel pour les croyants d’aujourd’hui. Le pasteur David Jang remarque : « Nous avons vite fait de blâmer les disciples, mais posons-nous la question : “Si j’avais été là, comment aurais-je agi ?” Se l’avouer, c’est découvrir qu’on est tout aussi prêt à faillir, et c’est alors avec humilité et repentance qu’on s’approche du Seigneur. » Au bout du compte, la foi n’est pas affaire de force personnelle, mais repose sur la grâce de Jésus crucifié pour nous, et sur la reconnaissance de notre faiblesse, dans la prière.
Aujourd’hui, quand l’Église et les croyants affrontent diverses épreuves et tentations, nous n’avons en réalité que deux options. La première, comme Pierre et les autres disciples, consiste à vouloir tenir coûte que coûte par soi-même, pour finalement fuir ou s’écrouler. La seconde, à l’exemple de Jésus, consiste à tout déposer devant le Père et à confesser : « Que ta volonté soit faite. » Cette seconde voie, rappelle le pasteur David Jang, est la forme concrète du « marcher avec le Christ ». Jésus l’a empruntée le premier, prouvant par sa résurrection que ce chemin ne mène pas au désespoir. Si nous le suivons, malgré nos faiblesses et nos larmes, nous verrons la puissance de la résurrection et goûterons à la gloire du Royaume de Dieu.
À travers ce parcours, nous redécouvrons le rôle essentiel de la prière. Pourquoi Jésus, au moment le plus pénible, a-t-il tenu à conduire ses disciples en un lieu de prière, leur demandant de veiller ? Le pasteur David Jang indique : « La prière approfondit notre relation avec Dieu et nous permet de nous soumettre à sa volonté. La délaisser revient à renier sa souveraineté, à retomber dans l’orgueil de vouloir tout résoudre par soi-même. Jésus n’a jamais renoncé à la prière et a exhorté les disciples à veiller, mais ils ne l’ont pas compris. Résultat : ils n’ont pu ni épauler Jésus dans sa souffrance ni contribuer à quoi que ce soit, et ils se sont éparpillés. Or, après la résurrection, Jésus les rassemble et leur confie de nouveau la mission de proclamer l’Évangile, à la force de l’Esprit et dans la communion de la prière. C’est ainsi que, dans le livre des Actes, la prière et la puissance du Saint-Esprit font d’eux les piliers de l’Église naissante. »
Il en va de même pour nous. Quel que soit notre zèle apparent, si nous négligeons la prière, nous chuterons comme Pierre au premier obstacle. Mais si, à l’exemple de Jésus à Gethsémané, nous approchons Dieu avec des larmes et des cris, aucune tentation ne peut nous vaincre. Le pasteur David Jang remarque à ce sujet : « L’Église peine à demeurer lumière du monde, et les croyants manquent de force intérieure, car ils ont souvent perdu l’esprit même de Gethsémané. Celui-ci comporte une ardeur et une sincérité radicales, ainsi qu’un abandon total à la volonté de Dieu. Sans cet esprit, nous finissons par nous endormir ou par fuir. »
Par conséquent, il ne s’agit pas de ne réfléchir à la souffrance du Christ et de prier que pendant le Carême ou une semaine de prière spéciale. Nous sommes plutôt appelés à maintenir constamment vivant, au cœur de notre quotidien, le souvenir de Gethsémané. Que l’image de Jésus prêt à affronter la croix reste présente, de sorte que nous persévérions en prière pour demeurer éveillés dans l’Esprit. Le pasteur David Jang appelle cela la « sainte répétition » : l’histoire unique de Gethsémané doit se « répéter » dans notre vie quotidienne. Ainsi, même si nous avons, comme Marc, un passé honteux, nous pouvons devenir auteurs de la Bonne Nouvelle, porteurs de la croix et du témoignage de la résurrection. Comme Pierre, qui a renié Jésus trois fois mais s’est vu ensuite confier la mission de paître le troupeau, nous pouvons être relevés pour devenir des colonnes de l’Église.
Bref, le récit de la prière de Gethsémané en Marc 14 montre à la fois la faiblesse humaine des disciples et la miséricorde de Jésus, tout en soulignant de manière saisissante ce que signifie l’obéissance totale à la volonté de Dieu. Selon le pasteur David Jang, « marcher avec le Christ » puise ses racines dans cette spiritualité de Gethsémané : même face à la mort, nous nous en remettons à l’amour du Père en proclamant : « Non pas ma volonté, mais la tienne. » Une telle disposition nous empêche de sombrer, même dans la solitude. En effet, Jésus a déjà parcouru ce chemin, et la résurrection prouve que cette voie est celle de la victoire ultime. Tout croyant en Christ est appelé à incarner cette foi.
Pour conclure, le pasteur David Jang nous invite, à la lumière de Gethsémané, à nous demander quelle « croix » nous sommes tentés d’esquiver. « Devant quelles épreuves nous endormons-nous, et pour quels combats devrions-nous implorer Dieu dans les larmes ? Ne sommes-nous pas comme Pierre, prêts à tout promettre alors que, dans la réalité, nous cédons parfois à l’indifférence ou nous “tuons le temps” ? » Quand nous répondons honnêtement à ces questions, nous approchons davantage de la prière de Jésus à Gethsémané, et nous apprenons à ne plus nous appuyer sur notre propre volonté ou nos émotions, mais à nous reposer sur la volonté du Père et sa toute-puissance.
Le pasteur David Jang répète souvent que « la foi ne repose pas d’abord sur notre décision, mais sur l’amour de Dieu qui a livré son Fils unique à la croix, et sur l’obéissance de Jésus qui est allé jusqu’au bout ». Notre rôle consiste à nous appuyer sur cette obéissance, pour affronter nous aussi les « Gethsémané » de notre existence, en criant : « Abba, Père, je continue malgré tout à te faire confiance. » C’est là le sens concret du « marcher avec le Christ ». Celui-ci ne se trouve ni dans des manifestations spectaculaires ni dans un certain artifice religieux, mais dans les larmes et la prière à l’écart, au cœur de la nuit. Dans de tels moments, Dieu agit pour transformer notre cœur, actualisant dans notre vie la puissance de salut et de vie qu’il a déjà accomplie en Jésus.
Ainsi, la prière à Gethsémané, où Jésus se livre entièrement, dévoile la pleine mesure de sa faiblesse humaine comme de son obéissance divine. Elle nous exhorte à tout remettre entre les mains du Père. Le pasteur David Jang réaffirme inlassablement l’importance de cette spiritualité de Gethsémané, dont l’essence est : « Si nous voulons véritablement marcher avec le Christ, nous devons, nous aussi, connaître les larmes de Gethsémané, porter notre croix, et croire fermement que cette route mène à la gloire. » Veiller et prier pour que Gethsémané s’actualise dans notre vie quotidienne, c’est faire l’expérience incomparable de la communion avec le Christ. Même nos défaillances n’empêchent pas cette communion, car Jésus, qui connaissait déjà les faiblesses de ses disciples, les a aimés jusqu’au bout. De même, il peut relever nos échecs et sécher nos larmes, en les revêtant de la force victorieuse de sa résurrection.
This writing focuses on the scene of Jesus praying in Gethsemane, recorded in Mark 14:32–42, and explores in depth the meaning of “walking with Christ,” a theme Pastor David Jang has consistently emphasized. By reflecting on the core values of faith as revealed in the agony Jesus experienced, the behavior of the disciples, and the solitary prayer in that scene, we will look at the message conveyed to us today, along with the main teachings Pastor David Jang seeks to impart. The discussion flows seamlessly as a single narrative without subdividing into multiple subtopics, guiding us to ponder how the scene of Jesus praying with loud cries and tears in the Garden of Gethsemane connects to each of our lives and what it means to walk as a disciple with Christ.
First, from Mark 14 we learn that Jesus was facing His imminent death on the cross. After sharing the Passover meal with His disciples, He went to the Garden of Gethsemane at the foot of the Mount of Olives, where He prayed so earnestly that His sweat became like drops of blood. Commonly, the “Mount of Olives” is an area filled with olive trees, and “Gethsemane” is a place name meaning “oil press,” where olives were crushed to extract oil. Pastor David Jang points out that olive oil symbolizes two important things—peace and eternity—while also recalling the tradition of anointing kings with oil in the Old Testament. In Hebrew “Messiah” and in Greek “Christos” both mean “the Anointed One.” Therefore, although Jesus was in Gethsemane as Christ, the anointed King, what we see here is not the disciples anointing Him for His enthronement, but rather Jesus sweating great drops of blood as He prepared for His suffering on the cross. This is a striking and paradoxical contrast in Scripture—He is the One who should have been enthroned as King, yet He is found in deep distress, offering up a pitiable prayer.
Although Jesus’ prayer in Gethsemane is recorded as an extremely important passage in Matthew, Mark, and Luke, it is notably absent from the Gospel of John. Pastor David Jang explains that this might be because John, starting from chapter 13, already sheds light on Jesus having fully accepted the path of the cross, thereby not focusing on the Gethsemane prayer scene in detail. In John 13, while Jesus was sharing the Last Supper with His disciples, He declared that He had now been glorified, and He left them with eschatological exhortations and a farewell discourse. In other words, even before the suffering of the cross began, Jesus already proclaimed that path as “glory,” signifying His resolute determination. According to Pastor David Jang, “The Lord chose the way of the Christ even before Golgotha. John likely omitted Gethsemane’s prayer to emphasize Jesus’ regal majesty, completely embracing the Father’s will with no trace of wavering.”
Yet the Gethsemane prayer described in the Synoptic Gospels shows us Jesus’ “human struggle” and “intense lament.” In Mark 14:33–34, Jesus says, “He began to be deeply distressed and troubled. ‘My soul is overwhelmed with sorrow to the point of death.’” Hebrews 5:7 testifies, “During the days of Jesus’ life on earth, He offered up prayers and petitions with loud cries and tears to the One who could save Him from death.” This shows that Jesus truly became human like us, and at the same time it reveals His noble faith, crying out to God the Father as “Abba, Father” and obeying Him to the very end. Pastor David Jang underscores that “Jesus prayed so earnestly that His sweat became like drops of blood. Within Him we see the raw reality that the path of the cross is so dreadful, and that human trembling and pain were inevitable in walking that path.” Nonetheless, Jesus voluntarily declares, “Yet not what I will, but what You will be done,” demonstrating complete submission to the will of God.
At this point, as Pastor David Jang often stresses, we must not miss the fact that Jesus could have “avoided” bearing the cross. In Jesus’ prayer found in Matthew 26 and Mark 14, He says, “Take this cup from Me.” Even though Jesus is the Son of God, He expresses, in His humanity, the terror and agony of facing death. Yet in the same breath, His prayer continues, “Nevertheless, not as I will, but as You will.” Commenting on this scene, Pastor David Jang says, “Even though we may resolve to follow God’s will in our walk of faith, our will and emotions are weak and we often long to flee in another direction. Jesus also experienced that moment, yet He ultimately held onto the Father’s will and walked it to completion, providing an example for us all.” This is the challenge that all who walk with Christ must face, and at the same time it serves as a truth offering us comfort and hope.
Meanwhile, as Jesus prays in Gethsemane, the disciples are sleeping. Specifically, at the supper table Peter had boasted, “I will not deny You under any circumstances. Even if I must die with You, I will not forsake You.” But Jesus predicted, “Before the rooster crows, you will disown Me three times.” Moreover, when they enter Gethsemane, Peter and the other disciples fail to stay awake for even one hour; they simply fall asleep. The Lord says, “Could you not keep watch for one hour?” and urges them to pray so as not to fall into temptation. Pastor David Jang observes, “At this crucial hour for the Lord, in the midst of a decisive spiritual battle, the disciples have no idea what is truly happening. They behave like people out on a leisurely evening stroll, and they fall asleep. This is our own picture as well. Often, at pivotal moments when God is working, we lie down in ignorance, missing it completely.”
Ultimately, when Jesus is arrested, the disciples scatter in confusion. Mark 14:51–52 tells of a young man who followed Him wearing nothing but a linen cloth; when he was seized, he ran away naked, leaving the cloth behind. Traditionally, many interpret this “young man” to be Mark, the author of the Gospel. Pastor David Jang explains, “Because the Last Supper took place in his home, Mark, who was likely asleep, realized what was happening late at night and hurriedly went out to follow Jesus. But in the end, he too was overcome by fear and fled, leaving the cloth behind.” By including such an embarrassing scene about himself so transparently in his Gospel, Mark testifies to how easily human frailty can surface, and also shows that even such frailty can be restored in the love of Jesus. Pastor David Jang calls this “an honest confession of faith,” stating, “Mark frankly confesses his own shame and writes this scene to boast in the grace of the Lord who transformed him. We too must not hide our weaknesses but reveal them, opening the way for God’s power to be manifest.”
Thus, Gethsemane—a place where Jesus, as the One who deserved to be anointed King, instead sweated drops of blood in sorrow—became a tragic location. From this we realize that the cross and resurrection were inevitable before the title “Christ” could be fully embraced and affirmed, that is, before Jesus could truly be confessed and recognized as “the Anointed One.” The disciples were not at all prepared to crown Jesus King, nor were they spiritually and faithfully mature enough to walk His path. Consequently, Jesus had to walk in solitude, culminating in the bloody sweat of Gethsemane and the cross of Calvary. Pastor David Jang notes, “Even at the Last Supper, the disciples received the bread and wine, sang a hymn, and then failed to anticipate the suffering that lay ahead. Even as the blood of the lamb sacrificed at Passover flowed down the Kidron Valley, staining the waters red, they did not clearly grasp the significance of the Lord’s death. The Lord alone crossed that red current and entered Gethsemane, where He soon prayed earnestly until His sweat became like drops of blood.”
In that lonely, desperate moment, Jesus addressed God as “Abba, Father.” This expression combines the Aramaic “Abba” (Dad) with the Greek “Pater” (Father), symbolizing Jesus’ intimate relationship with God the Father and His absolute trust in Him. While ministering in Galilee, Jesus also referred to God as “your Father in heaven,” yet in this valley of suffering He cries out even more urgently and intimately, “Abba, Father.” Pastor David Jang comments, “When we walk the path of faith, one of the greatest temptations is the doubt, ‘Does God really love me?’ Even Jesus, in the depths of extreme suffering, called upon ‘Abba, Father.’ This shows us that, in our own fearful moments, we must put our total trust in the Father.” Ultimately, even when the power of death looms with full force, we must never relinquish our faith in the goodness of God and must be able to confess, “Everything is possible for You.”
Another crucial aspect here is that Jesus’ prayer reveals the essence of prayer as leading to obedience, rather than functioning as a mere “means” to an end. Jesus asked, “If possible, let this cup pass from Me,” yet ultimately concluded,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On this point, Pastor David Jang emphasizes, “We often try in prayer to ‘change God’s will.’ However, the prayer that Jesus taught is about letting God’s will ‘change me.’ The very essence of prayer displayed in Gethsemane is this: complete submission to the Father, transcending our own wishes and emotions. That is the ultimate aim of genuine prayer.” Hence, Jesus’ prayer in Gethsemane serves as a foundational model throughout the ages, empowering Christians everywhere to follow the Lord’s way regardless of circumstance.
But in their human frailty, the disciples could not join this prayer. Peter fell asleep, and so did James and John, all failing to sense the Lord’s urgency. Although Jesus asked, “Could you not keep watch for one hour?” urging them to stay alert and pray that they might not fall into temptation—declaring,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flesh is weak”—they remained in a state of unawareness. Pastor David Jang likens them to the “human face of the church,” saying, “In the world, some believers boast and act fearless. Yet when real crisis strikes, they often fall asleep or flee. It was true in Jesus’ day, and it is the same in our lives today. That is why we must revisit the Gethsemane prayer to recognize our true nature, and rather than displaying foolish self-confidence like Peter, we must kneel before the Father and entrust everything to Him.”
After His third prayer, Jesus says, “Are you still sleeping and resting? Enough! The hour has come,” willingly accepting His destiny of the cross. Then, as the soldiers arrive to seize Him, the disciples scatter. Pastor David Jang observes, “No matter how strong our resolve and willpower appear, without praying in the Holy Spirit and relying on God’s power, we can easily stumble. Peter boldly declared, ‘Even if I must die with You, I will not deny You,’ yet in reality, he ended up denying Him in the most shameful way. But Jesus already knew Peter would fall and still loved him to the end and brought him back.” This is a hopeful message that even though we may fall and betray the Lord, He grants us the grace of restoration.
Through His prayer in Gethsemane, Jesus embraced the “cup of death” that is humanly impossible to overcome, submitting to the Father’s will; the reality of this submission was then carried out on Calvary’s cross. Pastor David Jang states, “The cross of Jesus is of no use if we remain bystanders or mere onlookers. We must walk that way of the cross with the Lord. That is walking with Christ, and it becomes the gateway to eternal life in Him.” In other words, we too must follow in faith the path of Jesus’ obedience that began in Gethsemane. Though that path appears lonely and tragic, the glory of the resurrection is promised at its end.
Regarding John’s omission of the Gethsemane prayer, Pastor David Jang reiterates, “John may have deliberately left out Jesus’ human agony to underscore Jesus’ declaration in John 13 that the cross was already His glory.” The Gospel of John accentuates Jesus’ “regal” majesty through the farewell prayer in chapter 17, in which Jesus prays for the world and for His disciples. Conversely, the Synoptic Gospels emphasize the intensity of Jesus’ human suffering and the kind of prayer He lifted up to overcome it. These two approaches are by no means contradictory; rather, they offer complementary perspectives, presenting Jesus as both the Son of God and fully human.
Pastor David Jang notes, “We, too, often confront difficulties like Gethsemane in our own walk of faith. Observing the traces of blood like the Kidron Brook, we can feel fear and trembling, and we can be lonely when no one seems to understand our pain. But Jesus has already walked that path, leaving us the example of praying,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even in the midst of agony. When we make that prayer our own, walking with the Lord will indeed transcend loneliness and lead us to the joy of resurrection.” Thus, Gethsemane and Calvary, while being places of the most intense suffering, are simultaneously the very places where God’s power and love manifest most powerfully.
Moreover, the Gethsemane event stands as a “spiritual mirror,” not only for the disciples but also for all of us today. If we had been there, we would likely have acted no differently from the disciples; perhaps, like Mark, we would have run away wearing only a hastily wrapped linen cloth. Pastor David Jang points out how limited our human determination and promises are, remarking, “Even if we, like Peter, confidently declare we will never abandon the Lord, if we do not watch and pray, we can fall before the slightest provocation. Therefore, faith can only be strengthened through absolute dependence on God and through prayer, not through outward zeal.” This shows that internal humility and trust matter far more than external enthusiasm.
In the latter part of Mark 14, Jesus is arrested and brought before the high priests, and Peter does exactly as Jesus had foretold—he denies the Lord three times. When the rooster crows, Peter remembers Jesus’ words and weeps bitterly. Pastor David Jang addresses these tears and human wretchedness: “We can fail and fall. But that is not the end. Jesus rose again and sought out Peter, restoring his calling by telling him, ‘Feed My sheep.’ This reaffirms how great Jesus’ love is and how He holds on to sinners like us to the very end, just as He chose the cross in His Gethsemane prayer.”
This makes clear that what Pastor David Jang emphasizes—“walking with Christ”—is by no means an easy road. It is often lonely, isolated, and filled with tears. But it is also a road the Lord has already trodden, where He embraced the disciples’ every failing. Thus, even if we stumble, we have a path open for renewal. Indeed, Jesus’ prayer in Gethsemane is a “portrait of suffering” that leads us toward the hope of resurrection. While Christians may experience dark nights like Gethsemane—facing sorrow and trials with no one to share them—in prayerful obedience to the Father we too will find the dawn of resurrection. That is the pinnacle of our hope in Christ.
Ultimately, Pastor David Jang summarizes the significance of the Gethsemane prayer by pointing out five essential truths. First, Jesus experienced genuine human fear and pain, just as we do, and we cannot avoid such trials in our own lives. Second, even amid such terror, we must trust fully in God’s goodness, as Jesus did when He cried out, “Abba, Father.” Third, true submission to God’s will—especially when it clashes with our own—comes only through prayer, and this requires us to “stay awake,” as the Lord commanded. Fourth, we must honestly acknowledge our own frailty, just as the disciples’ weakness was laid bare; yet we must also believe that God’s grace is sufficient to lift us up again. Lastly, we need to remember that Jesus’ Gethsemane prayer ultimately was fulfilled through His cross and resurrection. The cross may seem like humanity’s greatest despair, but it is the path leading to the ultimate hope of resurrection, and through that path our faith matures.
Therefore, Gethsemane and Calvary are not merely historical events that occurred two thousand years ago in Palestine; rather, they continue to illuminate the spiritual reality of Christians in every age. Pastor David Jang emphasizes this point, saying, “We too easily criticize the disciples, but we should ask ourselves, ‘If I had been there, how would I have responded?’ That question reveals our own potential to abandon Jesus and run away, prompting us to approach the Lord with far greater humility and repentance.” In the end, faith stands not on our strength but on God’s love in giving His only Son to the cross, and Jesus’ choice to follow that path to the end. Once we recognize this, we realize our endurance depends on the Lord holding us firmly, and on our confession of weakness and dependence upon His grace.
Moreover, when confronted by various crises and temptations, today’s churches and believers need to be aware that we essentially face two choices. One is to rely on our own will like Peter and the other disciples, only to collapse or flee. The other is to act as Jesus did, pouring out everything before the Father and confessing, “Father, let Your will be done,” which is precisely the practical shape of “walking with Christ” that Pastor David Jang repeatedly proclaims. The Lord has already walked that path in Gethsemane, and by His resurrection has shown that path never ends in despair. Therefore, even though our human weakness and tears may follow, resurrection power ultimately unfolds, leading us to experience the glory of God’s kingdom.
Throughout this process, we rediscover the significance of “prayer.” Why did Jesus, at His darkest hour, bring His disciples to pray, hoping they would stay awake with Him? Pastor David Jang answers, “Prayer deepens our relationship with God and leads our hearts to surrender to His will. Ceasing to pray can be an act of pride that refuses to acknowledge God’s sovereignty and instead tries to solve problems by our own strength. Hence, Jesus never gave up prayer and wanted His disciples to keep watch and pray.” But the disciples did not understand. Consequently, during Jesus’ arrest and crucifixion, they dispersed without offering any meaningful involvement. Still, after His resurrection, Jesus again appeared to His disciples, leading them into a life of prayer and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ultimately entrusting them with the mission of spreading the gospel. In the Book of Acts, they become the main instruments of the early church’s growth, bolstered by prayer and the Spirit’s power.
The same applies to us. No matter how passionate and resolute we seem, if we lose our life of prayer, we may fall like Peter at the slightest temptation. Yet if we follow the Lord’s example in Gethsemane, crying out to God with tears, we can overcome any test that seeks to bring us down. Pastor David Jang points out that “one reason the church loses its place in this world, and why individual believers lose their profound inner strength, is that they have lost the true spirit of Gethsemane prayer. Gethsemane prayer is marked by urgency, deep need, and absolute submission to God’s will. Without it, we, too, will fall asleep and flee.”
Thus, we must not limit our meditation on Jesus’ suffering and prayer only to Lenten seasons or early morning prayer meetings. Instead, in our everyday lives, we must continually recall Gethsemane. We need to pray in such a way that the image of Jesus before the cross, unable to avoid His ultimate decision, comes alive in our hearts. Pastor David Jang calls this a “holy repetition.” That is, though the Gethsemane event happened only once in history, it must be reenacted in our hearts even today. When that happens—whether we have a shameful past like Mark or not—we can still experience the grace of being transformed into one who proclaims the cross and resurrection. Even if we have denied the Lord three times like Peter, we can still receive the commission “Feed My sheep” and become a pillar of the church in the future.
In this way, the Gethsemane prayer recorded in Mark’s Gospel is not only a stark example of “complete obedience to God’s will over one’s own,” but also a scene where the disciples’ weakness and Jesus’ kindness stand in sharp contrast. What Pastor David Jang calls “walking with Christ” ultimately originates in the spiritual ethos of Gethsemane. No matter how frightening death may be, those who have absolute trust and love for the Father, saying,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will never truly collapse, even in the most desolate circumstances. Why not? Because Jesus already took that path, and we confirm through the resurrection that such a path leads to everlasting victory. For anyone who believes in Christ, it becomes our task to put this faith into action.
Summarizing this Gethsemane event, Pastor David Jang urges each of us to ask ourselves, “Which cross do I want to escape right now?” He continues: “What hardships am I sleeping through? Over what matters should I be weeping and desperately pleading before God? Am I, like Peter, declaring that I would die for the Lord while in reality falling asleep or idly passing time?” When we honestly address these questions, we meet Jesus’ prayer in Gethsemane more personally. Through this encounter, we learn not to rely on human strength or determination but to entrust ourselves completely to the Father’s will and power. Pastor David Jang often says, “Faith does not stand on our decisions; it stands on God’s love in giving His only begotten Son, and on Jesus’ obedience in walking that path to the end.” By standing on His obedience, we also inevitably face many “Gethsemanes” in life, but at each one we must cry out “Abba, Father,” confessing, “I still trust You,” despite fear and trembling. This confession is the key that makes “walking with Christ” a reality in our daily lives, not just a theological concept. And it is neither spectacular nor flashy but is instead formed in tearful prayer in the darkness. In that prayer, God renews our hearts, and the saving power declared in Jesus is tangibly revealed in our lives.
Thus, in Gethsemane, where Jesus prayed and the disciples’ frailty was unmasked, and in Jesus’ firm decision to go to the cross, we recall the words, “Whoever wants to be My disciple must deny themselves and take up their cross and follow Me.” Pastor David Jang states, “The Lord walked that road alone. The disciples slept, others fled, and someone else betrayed Him. So the way of the cross was never easy. Nonetheless, Jesus went that way unhesitatingly, and its destination was the triumph of the resurrection.” This message remains equally valid for anyone invited to follow as a disciple, both in former times and now, urging each of us to hear Jesus calling, “Come and follow Me.”
In conclusion, the Gethsemane prayer, as Pastor David Jang interprets it, powerfully proclaims that every one of us should move into “prayer that leads to surrendering ourselves entirely to God’s will.” It displays the paradox of Jesus’ human weakness and divine obedience in vivid detail, and Pastor David Jang has repeatedly stressed how central the spirituality of Gethsemane is. Its core is this: “If we truly wish to walk with Christ, we, too, must endure Gethsemane’s cries, bear the cross, and believe that path leads to glory.” As we remain watchful and prayerful, bringing Gethsemane into our everyday lives, we experience that walking with Christ is indeed the most blessed path, unlike any other. In the process, though our frailties and shortcomings may appear, Jesus—just as He knew His disciples’ frailty—will love us to the end, and in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will restore us and make us n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