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어둠을 뚫고 빛나는 영광의 소망 – 장재형 목사 (Olivet University)

이탈리아의 거장 카라바조가 남긴 명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의 성 바울의 회심」은 극단적인 명암 대비를 통해 한 인간의 철저한 무너짐을 포착한다. 거대한 말 아래로 고꾸라진 바울은 두 눈을 굳게 감은 채 캄캄한 흑암 속에 갇혀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의 영혼은 비로소 새로운 세계를 향해 눈을 뜬다. 평생을 확신하며 의지해 온 자신의 신념과 시야가 철저히 부서지는 이 낙마의 순간은 단순한 폭력적 상실이 아니라, 구원의 진리가 비로소 새겨지는 거룩한 캔버스가 된다. 기독교의 복음은 이처럼 우리의 시력이 닫히고 계산이 끝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영원한 섭리를 보게 하는 낯설고도 신비로운 문법을 지니고 있다.

허물어진 자리에 세워지는 섭리의 신학

우리는 흔히 신앙의 길을 걷는다는 것을 평안과 축복이 보장된 평탄한 대로로 기대하며, 예상치 못한 환난 앞에서 쉽게 길을 잃고 깊은 탄식을 내뱉는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골로새서 1장에 담긴 바울의 고백을 통해, 신앙의 여정이 결코 안락한 산책이 아니라는 엄연한 현실을 우리가 정면으로 마주하도록 이끈다. 그가 전하는 깊은 신학적 통찰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고난은 우연한 비극이나 무의미한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복음이 한 사람의 실제 삶을 치열하게 통과하며 빚어내는 거룩한 마찰이며, 인간의 계획이 꺾인 자리에 하나님의 섭리가 선명하게 세워지는 연단의 과정이다.

우리가 고난 앞에서 철저히 무력해질 때, 바로 그 무력함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의뢰와 믿음을 회복하는 출발점이 된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세상의 가치관과 충돌을 낳지만, 이 마찰은 신자를 파괴하기 위한 징벌이 아니라 진실한 회개를 이끌어내고 영혼을 정련하는 은혜의 도구다. 인간의 얄팍한 자존심과 자기 계획이 허물어진 바로 그 거친 자리에서,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서도 결코 놓지 않았던 그 영광의 소망이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찬란하게 닻을 내리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역설, 상처가 사명으로 번역되는 시간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도리어 기뻐한다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기꺼이 채우겠다고 선언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십자가 사건이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는 얄팍한 오해를 넘어서야 한다. 구속의 사건으로서 예수의 십자가는 이미 완전하며 단 하나의 부족함도 없지만, 그 위대한 구원의 소식이 한 시대의 문화와 거리에, 그리고 이웃의 팍팍한 삶 속에 온전히 스며들기 위해서는 시대를 사는 증인들의 몫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지점에 이르면 고난은 더 이상 나 개인의 억울하고 아픈 상처로만 머물지 않고, 세상을 향한 교회의 거룩한 소명으로 아름답게 변환된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상실과 실패를 완전히 새로운 렌즈로 해석하게 만든다. 그에게 신학이란 단순히 책 속에 갇힌 추상적인 사유나 지적 유희가 아니라, 우리의 피 흘리는 눈물과 기다림을 하나님의 구원 역사로 번역해 내는 생명의 언어다. 바울이 투옥의 공포와 굶주림 속에서도 끝내 복음 전파를 멈추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의 잃어버림이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 안에서 마침내 공동체의 유익으로 전환될 것을 굳게 신뢰했기 때문이다. 상처를 외면하거나 억지로 미화하는 대신, 그 아픔이 가리키는 십자가의 방향을 성경 묵상 속에서 고요히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영적 성숙의 시작이다.

흔들리는 현실을 덮는 더 큰 실재, 성령의 위로

이토록 무거운 십자가의 신비를 일상에서 살아내게 하는 유일한 동력은 바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임재다.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라는 바울의 선언은 감정적인 종교적 수사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왕좌가 완전히 재배치되는 실재적인 존재의 문장이다. 질병과 경제적 압박, 관계의 단절이라는 고난의 밤이 깊어 기도조차 나오지 않는 순간에도,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고립된 영혼의 바닥을 지탱하신다. 이것은 세상이 말하는 값싼 낙관이나 심리적 방어기제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영원한 차원의 굳건한 평안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나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참혹한 제단화가 웅변하듯, 진실한 신앙은 현실의 참혹한 고통을 결코 숨기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생생한 상처의 현실 위에 우리를 찾아와 찢긴 마음을 온전히 품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조용히 덧입혀질 뿐이다. 환난 속에서 우리는 고통을 일거에 제거하는 마술사가 아니라 환난의 한가운데서 묵묵히 동행하시는 위로의 하나님을 만난다. 이 깊은 위로를 온몸으로 경험한 성도는 비로소 타인의 고난에 귀 기울이며 이웃을 섬기는 온전한 사랑과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 그것은 억지로 짜내는 헌신이 아니라, 이미 나를 붙들고 계신 충만한 은혜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생명의 호흡이다.

길 끝에서 만나는 구속의 역사와 거룩한 질문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난을 통과하여 영광으로, 나라는 좁은 자아를 넘어 교회로,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넘어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동하는 장엄한 순례의 여정이다. 이 길을 걸으며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질 때마다, 우리는 고통이 파편화되어 무의미로 흩어지지 않도록 영적 좌표를 다잡아 주는 복음적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장재형 목사가 거듭 강조하듯, 교회는 단순한 감정의 위안소나 도피처가 아니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형상을 닮아 가도록 돕는 치열한 영적 훈련과 제자도의 공간이어야 한다.

우리의 깨어진 삶이 복음의 문법으로 다시 번역되고, 그 번역된 삶이 세상을 향한 가장 묵직한 증언이 될 때 비로소 고난은 흉터가 아닌 사랑의 표지로 남는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 내면의 지독한 어둠을 관통한 끝에 빛나는 구원의 희망을 펜끝으로 길어 올렸듯, 십자가를 통과한 신앙은 어둠 속에서도 끝내 잃어버릴 수 없는 아침을 향해 걷는 일이다.

그렇다면 오늘 당신의 삶을 짓누르는 그 서늘한 고난의 짐은, 지금 당신의 영혼을 어느 곳으로 이끌고 있는가? 이해할 수 없는 아픔과 깊은 침묵의 한가운데서, 당신은 지금도 당신의 삶을 구속의 역사로 정교하게 빚어가시는 그분의 조용한 손길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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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감옥의 냉기를 녹이는 온기 –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장재형 목사

로마의 마메르틴 감옥, 습하고 차가운 돌바닥 위로 늙은 사도의 거친 숨소리가 내려앉습니다. 쇠사슬의 냉기가 뼈마디를 파고드는 그 절망의 공간에서, 사도 바울은 젊은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실패자였고, 곧 처형될 사형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펜을 든 그의 손끝에서는 뜻밖의 문장이 흘러나옵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세상은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근육을 키우고 성을 쌓으라고 말하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노사도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강함을 주문합니다. 그것은 악바리 같은 의지가 아니라, 주어지는 은혜에 전적으로 기대는 ‘거룩한 의존’이었습니다.

그대, 스스로 타오르려 하지 말고 빛을 머금으라

바로크 시대의 거장 렘브란트가 1627년에 그린 명작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Saint Paul in Prison)>을 떠올려 봅니다. 그림 속 바울은 어두운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의 얼굴은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아니라 그가 묵상하고 있는 성경, 즉 말씀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빛에 의해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바울의 강함이 외부 환경이 아닌, 내면의 빛에서 기인함을 붓으로 웅변했습니다.

이 명화가 주는 울림은 장재형 목사의 디모데후서 2장 설교와 절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장 목사는 설교를 통해 바울이 디모데에게 요구한 강함이 인간적인 기질이나 타고난 담력과는 무관함을 역설합니다. 성도의 강함은 내 안의 자원을 짜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가 심장처럼 박동하며 공급하는 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목회 현장에서 수많은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더 애쓰는 ‘노력’ 대신 더 깊이 신뢰하는 ‘기도’를 선택했습니다. 은혜는 도피처가 아니라,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담대함이자 실패마저 성숙으로 빚어내는 탁월한 연금술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가 아니라, 은혜의 빛을 머금어 반사하는 반사체로 살 때 비로소 지치지 않고 강해질 수 있습니다.

무대 뒤에서 묵묵히 뿌리는 눈물의 씨앗

은혜로 채워진 내면은 필연적으로 흘러넘쳐 이웃에게로 향합니다. 바울은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며 복음의 계승을 명합니다. 이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이 아니라, 생명을 나누는 산파술에 가깝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한 명의 슈퍼스타가 이끄는 독주 무대가 아닙니다. 장재형 목사는 사역의 초기부터 이 원리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화려한 무대 위가 아니라, 사람을 세우고 살리는 무대 뒤편의 조력자를 자처했습니다.

진정한 복음의 확장은 요한복음이 묘사하듯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처럼 흘러나와 주변을 적시는 것입니다. 군사는 사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소명에 집중하며, 경기자는 편법의 유혹을 뿌리치고 정해진 규칙대로 달립니다. 그리고 농부는 가장 먼저 수고하고 가장 나중에 열매를 거듭니다. 이 비유들은 모두 ‘자기 부인’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합니다. 장재형 목사가 보여준 제자도의 길은 효율과 속도를 숭배하는 현대 사회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인정 욕구를 내려놓고, 당장의 결과보다 과정의 정직함을 택하는 것. 그것은 마치 수고하는 농부가 땀과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행위와 같습니다. 비록 더디게 보일지라도, 그 묵묵한 순종이 쌓여 폭풍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숲을 이루는 법입니다.

겨울을 견딘 나무만이 가장 깊은 봄을 맞이한다

바울은 감옥이라는 한계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단순한 정신 승리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믿음에서 터져 나온 승리의 개가입니다. 신학적 통찰이 삶의 구체적인 위로로 변환되는 순간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속 바울이 족쇄를 차고도 평온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시선이 감옥의 벽이 아닌 부활의 주님께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삶과 설교를 관통하는 핵심 또한 이 ‘부활 신앙’에 있습니다. 그는 오해와 핍박, 사방이 우겨쌈을 당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혹독할수록 봄의 꽃은 더 짙은 향기를 품듯, 고난은 성도를 단련시키는 하나님의 도구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죽으면 함께 살고, 참으면 함께 왕 노릇 하리라.” 이 약속은 막연한 희망 고문이 아닙니다. 매일 아침 말씀을 펴고 삶을 비추어 보는 치열한 성경 묵상을 통해, 우리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생명의 싹을 틔우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감옥과 같은 현실을 마주합니다. 경제적 위기, 관계의 단절, 미래의 불투명함이 우리를 옭아맬 때, 디모데후서 2장의 메시지는 선명한 이정표가 됩니다. 강함은 나의 결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부어지는 은혜만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장재형 목사가 전한 권면처럼, 얽매임을 끊고 단순한 삶으로 돌아가, 주어진 하루를 신실하게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 그리스도인의 품격입니다. 우리는 비록 미쁨이 없어 흔들릴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미쁘시니 우리를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그 변치 않는 신실함에 기대어, 오늘이라는 순례의 길을 다시 묵묵히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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