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 에베소서 4장이 말하는 교회의 성숙을 이끄는 사랑

장재형 목사
장재형 목사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소년은 한 송이 장미에 물을 주고, 바람을 막아 주고, 유리 덮개를 씌운다. 사랑은 꽃을 알아보는 눈에 머물지 않고, 그 곁을 지키는 손길이 된다. 소년이 매일 아침 장미를 들여다보고 벌레를 잡아 주고 저녁이면 유리 덮개를 씌우는 그 반복된 동작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에 가깝다. 장재형 목사(미국 Olivet University 설립)의 에베소서 4장 설교는 교회의 성숙 역시 서로를 돌보고 세우는 사랑과 떨어져 있지 않음을 일깨운다. 공동체의 크기는 눈에 보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이 자라나는 깊이는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숫자로 셀 수 있는 성장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성숙은 종종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교회가 몇 명이 모이는가는 누구나 셀 수 있지만, 그 안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자랐는가는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설교는 규모의 언어가 아니라 관계의 언어로 성숙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은사에 하나의 은혜가 흐른다

교회의 하나 됨은 모든 사람이 같은 능력을 갖추고 같은 일을 하는 상태가 아니다. 설교는 그 근원을 삼위 하나님에게서 찾고,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중심에 놓는다. 서로 다른 지체들이 한 몸에 속한다는 사실은 차이를 없애라는 요구가 아니라, 그 차이로 서로를 섬기라는 부름이다. 은혜는 사람을 같은 모양으로 깎아 내는 대신 각자의 은사가 공동체의 유익을 향하도록 이끈다. 연합의 출발이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주님께 있다는 사실은, 서로를 향한 존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탕을 놓는다.

이 바탕이 흔들리면 공동체는 쉽게 비교와 경쟁의 언어로 되돌아간다. 누구의 은사가 더 눈에 띄는가, 누구의 자리가 더 중요해 보이는가를 따지기 시작하면 몸의 지체라는 자각은 흐려진다. 반대로 연합의 출발점을 주님께 두면, 서로 다른 은사는 위협이 아니라 선물로 다가온다.

에베소서 4장 12절에서 은사의 목적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봉사의 일을 감당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은사는 영적 우월함을 증명하는 자격증이 아니라 맡겨진 책임에 가깝다.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만 높이고 다른 지체의 몫을 하찮게 여긴다면, 은사를 자랑할수록 정작 그 은사가 세워야 할 몸은 약해진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와 함께, 그것으로 누가 도움을 얻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일이 각자 원하는 방향으로 흩어지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모든 지체가 함께 향하는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다. 내게 없는 은사를 가진 사람을 경쟁 상대가 아니라 필요한 지체로 바라볼 때, 차이는 불편함을 넘어 감사의 이유가 된다. 나의 몫을 감당하면서 다른 이의 수고를 귀히 여기는 마음에서 하나 됨은 실제 관계의 모습을 얻는다.

교회를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의 성장을 혼자만의 성취로 소유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받은 도움이 나를 세웠듯, 나의 수고도 다른 이를 세우는 데 쓰여야 한다. 성숙한 믿음은 자신이 얼마나 자랐는지만이 아니라, 곁의 사람을 얼마나 자라게 하는지도 돌아본다. 이 물음은 편하지 않다. 자신의 성장에만 몰두하던 시선을 옆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앎은 사랑을 배운다

에베소서 4장 13절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이 하나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응답이다. 갈라디아서 3장을 따라 이 설교는 믿음으로 구원의 문턱을 넘고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설명한다. 앎은 그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삶에 체화하는 과정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결단과 그 복음의 의미를 알아 가는 배움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앎에는 관계의 깊이가 담겨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설명을 많이 기억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며 닮아 가는 인격적 교제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랑을 설명하는 말이 정교해졌는데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거칠다면, 배운 진리가 아직 삶에 충분히 스며들지 못한 것은 아닌지 살필 필요가 있다. 신학적 통찰은 타인을 판단하는 말에서보다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는 태도에서 깊어진다.

이 구분은 미묘하지만 중요하다. 사랑에 대해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것과 실제로 누군가를 참아 주고 섬기는 것은 다른 능력이기 때문이다. 앎이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앎은 아직 절반의 여정만 지난 셈이다.

믿음을 내세워 배움을 멈추는 것도, 지식을 앞세워 믿음의 결단을 비워 두는 것도 성숙의 길은 아니다. 설교는 지식 없는 믿음이 맹목과 피상성에 머물 수 있고, 믿음 없는 지식이 공허한 논쟁으로 기울 수 있음을 경계한다. 이 둘이 갈라지면 신앙은 한쪽으로 기운다. 믿는 진리를 배우고, 배운 진리대로 살아가려는 순종이 함께 필요하다.

그래서 성경과 교리를 공부하는 일은 예배와 기도, 성례의 자리와 연결된다. 머리로 이해한 말씀이 성령의 역사 안에서 삶의 지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이 부분적인 앎 너머의 온전한 앎을 바라보듯, 오늘의 배움에는 겸손과 소망이 함께 놓여 있다. 성경 묵상은 다 안다는 자신감을 굳히는 시간이 아니라, 아직 더 알아야 할 사랑 앞에 자신을 여는 시간이 된다.

흔들리는 풍조 앞에서 믿음은 뿌리를 내린다

이러한 성장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설교가 마태복음 13장의 겨자씨와 누룩을 통해 바라보는 교회는 점진적으로 자라고 깊어지는 생명체다. 눈에 띄는 규모의 변화만으로 그 생명의 상태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성령의 내적 역사와 믿음의 순종, 공동체의 연합이 함께할 때 성장은 성숙을 향해 나아간다.

히브리서 5장 12~14절의 젖과 단단한 음식은 그 여정에 필요한 돌봄과 책임을 보여 준다. 기초 단계에 있는 이에게는 기초를 세워 주는 가르침이 필요하고, 자라난 이에게는 배운 말씀을 봉사와 섬김으로 옮기는 실천이 따른다. 오랜 신앙 경력도 그 자체로 성숙을 보증하지 않는다. 신앙의 시간이 쌓였다면, 이제 다른 사람을 돌보고 세울 수 있는지도 함께 돌아보게 된다.

이 차이를 헤아린다는 것은 누가 앞섰는지 서열을 매기는 일과 다르다. 아직 기초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그에 맞는 가르침을, 다른 이를 돌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책임을 맡기는 일이다. 모두에게 같은 모습을 요구하기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자라도록 돕는 것이 공동체의 돌봄이다. 기다림과 권면이 함께할 때, 성장의 속도가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성숙의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성숙에는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하는 힘도 포함된다. 에베소서 4장 14절의 어린아이는 이 문맥에서 순수함보다 교묘한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미성숙을 가리킨다. 설교는 인터넷과 SNS에 떠도는 잘못된 가르침, 성공과 부를 믿음의 열매로 지나치게 포장하는 말을 경계한다. 그럴듯하게 들리거나 놀라운 현상이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진리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성공과 부가 믿음의 깊이를 대신하는 잣대가 되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방향은 흐려진다. 중요한 것은 가르침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들리는가가 아니라, 그 말이 말씀의 진리에 서 있는가이다. 설교가 영적 분별을 교회론과 연결하는 까닭은 거짓을 가려내는 목적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지키고 세우는 데 있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위해서는 무엇을 믿는지 분명하게 배우는 시간이 필요하다. 성경 연구와 교리 교육, 교회의 신앙고백을 익히는 일은 믿음의 뿌리를 말씀에 내리게 한다. 여기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와 서로를 점검하며 권면하는 공동체가 함께해야 한다. 분별은 혼자 옳다는 확신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도 말씀 앞에서 살피는 태도를 포함한다.

사랑으로 이어진 마디마다 소망이 자란다

그러나 분별력이 있다는 이유로 사랑을 뒤로 미룰 수는 없다. 에베소서 4장 15~16절이 보여 주는 성장의 방식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고, 각 마디가 도움을 주고받으며 연결되는 것이다. 진리를 굳게 붙드는 일과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따로 놓인 과제가 아니다. 사랑이 빠진 교회 활동은 많아질수록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공허한 소리로 남을 수 있다.

설교는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들이 연결되고 힘줄과 살이 돋아나 큰 군대로 일어서는 장면을 교회의 연합과 함께 읽는다. 흩어진 뼈들의 수만 늘어난다고 살아 있는 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맞닿고 연결되어야 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일어서야 한다. 이 장면은 공동체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그 사람들이 사랑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 사이의 거리를 돌아보게 한다.

그 거리는 일상의 작은 말과 태도에서 좁혀진다. 서로를 배려하고 온유와 겸손으로 대하는 일은 교회의 외양을 꾸미는 예절에 그치지 않는다. 몸의 마디를 돌보듯 관계를 돌보는 실천이며, 알고 있는 사랑을 실제로 살아 내는 순종이다. 이러한 사랑은 공동체가 외부의 갈등 앞에서도 서로를 붙드는 내적인 힘이 된다. 그렇게 자란 형제애는 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향한 섬김으로 흘러가야 한다.

장재형 목사가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함께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교회는 현재의 모습에 머물도록 부름받은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완성을 향해 자라가는 공동체다. 설교가 교회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전위대’로 부를 때, 그 부름은 사랑의 실천과 떨어져 있지 않다. 미래의 완성을 바라보는 믿음은 오늘 서로를 세우는 책임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말씀을 오래 들었다는 기억만으로 오늘의 성숙을 대신할 수는 없다. 내 안에 쌓인 앎이 관계를 살리는 사랑으로 흘러가는지, 내가 받은 은혜가 누군가를 돕는 손길이 되고 있는지 돌아볼 때다. 교회의 성숙을 바라는 나의 마음은, 오늘 내 곁의 한 사람을 대하는 말과 태도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그 대답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오늘 하루의 작은 말 한마디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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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걷는 부활 신앙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명작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평생 동안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일처럼 까마득히 밀어 두었던 죽음이라는 무거운 명제가 어느 날 갑자기 한 인간의 가장 가까운 생생한 현실로 들이닥치는 절박한 순간을 깊이 있게 응시합니다. 죽음은 삶의 평온한 순간에는 한낱 멀리 있는 철학적 주제나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하지만, 내 집 문앞에 당장 다가오는 순간 인간이 한평생 땀 흘려 쌓아 올린 모든 세속적 확신과 안전한 질서를 한꺼번에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가장 근본적이고 엄중한 질문이 됩니다. 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의 강해 설교가 깊이 있게 붙드는 자리도 바로 이 절망의 지점입니다. 칠흑 같은 죽음의 공포와 허무함 속에 가둔 채 신음하는 인간을 향해, 복음은 그저 막연하고 상투적인 위로나 감상적인 다독임으로 다가오지 않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찬란하고 단호한 구원의 선포로 다가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들리는 부활의 복음

현대 문명이 자랑하는 첨단 과학과 의학의 발전이 우리의 삶을 이전보다 훨씬 안전하고 풍요롭게 만들었다는 세속적 믿음은, 갑작스러운 재난이나 뜻하지 않은 불치병의 위기 앞에서 너무나 손쉽게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평소 일상의 바쁨 속에서 사람들은 죽음을 자신과는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남의 일처럼 여기며 살아가지만, 예고 없이 찾아오는 생명의 위기는 죽음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정면 과제임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바로 그 비극의 순간, 인간의 영혼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 뜨겁게 솟구쳐 오르는 것은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간절한 생존의 갈망이며, 이 아픈 갈망은 피조물인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의 참된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금 절박하게 묻게 만듭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두려움과 절망의 한복판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찾고, 참된 예배와 교회,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 앞으로 겸허히 걸어 나오는 까닭을 바로 이 생명에 대한 본능적 갈망의 지점에서 바라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과 26절에 기록된 주님의 거룩한 말씀은 인간이 맞닥뜨리는 죽음의 참혹한 실재를 결코 외면하거나 모른 척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죽음이 인간의 존재와 역사의 최종적인 마지막 결말이라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주님의 위대한 약속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활의 소망을 가리키고, 살아서 주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선언은 끊어지지 않는 영생의 지평을 향해 활짝 열려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찬란한 중심에는 인간 스스로의 힘과 도덕적 노력으로 죽음의 그늘을 극복할 수 있다는 헛된 인문학적 낙관론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친히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생명의 길과 소망이 있다는 굳건한 믿음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비어 있는 무덤은 그저 사랑하는 이의 상실을 미화하거나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관념적인 상징이 아니며, 죄와 사망으로 무겁게 닫혀 있던 인간의 비극적 결말이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한 은혜 안에서 전혀 새롭게 열렸음을 선포하는 가장 명확한 복음의 이정표가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강해 설교를 통해 부활을 단순히 심리적인 위안이나 내면의 환상, 혹은 주관적인 신화로 축소하여 다루는 모든 시도를 경계합니다. 텅 비어 있는 역사적 무덤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제자들의 진실한 증언이라는 든든한 토대 위에서, 성경 묵상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사망 권세를 짓밟고 다함 없는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역사적·신학적 사실을 굳게 붙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품는 부활의 소망은 고단한 세속 현실을 피하기 위한 헛된 상상이 아니며, 죽음과 어둠이 인류의 삶에서 최종적인 왕권을 행사하는 절대적 권세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증언하는 굳건한 믿음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말씀은 단순히 육체의 목숨이 다한 이후에 펼쳐질 아득한 내세만을 말하며 일상의 삶을 다독이는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설교의 깊은 흐름 속에서 파악하는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죄로 말미암아 이미 영적인 의의 길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사망을 향해 달려가는 비참한 존재이며, 주님의 부활이 주는 은혜는 그처럼 영적으로 이미 죽어 있는 실존을 다시 강력하게 살려내는 생명의 능력으로 다가옵니다. 인간의 죄와 죽음은 서로 완전히 떨어진 별개의 문제가 아니며, 그 참혹한 비극에 대한 해답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완벽하게 하나로 얽혀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생명을 향한 갈망이 헛된 망상이 아니라 참된 구원의 소망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무엇이 우리 인간을 이토록 참혹한 죽음의 그늘 아래 무릎 꿇게 만들었는가를 하나님 말씀의 밝은 빛 아래서 정직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어둠을 통과해 피어나는 은혜

장재형 목사는 성도가 주님의 부활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풍성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십자가의 깊은 어둠과 수난의 현장을 통과해야만 한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환희만을 조급하게 붙드는 것으로는 부활 신앙이 지닌 신학적 깊이와 진정한 무게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그분이 도대체 왜 그렇게 참혹하게 죽으셔야만 했는지,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자신의 거룩한 몸과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셨는가를 아프게 물을 때 비로소 부활은 값싼 승리의 구호에 그치지 않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친히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사건으로 비로소 경험됩니다. 로마서 4장 25절의 말씀은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영광스러운 부활을 한 문장 안에서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거룩한 구속사의 사슬로 묶어 보여줍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엄중하고 거룩한 율법적 선포 앞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그 무거운 죄의 값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장 비참한 죄인의 자리에 친히 서셔서 인간의 온갖 죄악과 죽음의 짐을 짊어지셨다는 대속의 복음 메시지는,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결코 인간의 끔찍한 죄를 가볍게 덮어주는 얼렁뚱땅한 관용이 아님을 분명히 비추어 줍니다. 주님의 십자가 달리심에는 죄의 엄중한 무게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그 무서운 형벌의 잔을 독생자에게 대신 담당시키시는 그 깊은 십자가 사랑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함께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이 역사적 사실은, 인간의 구원이 결코 인간의 도덕적 공로나 자기 정당화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에게 거저 주어진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에서 비롯된다는 깊은 신학적 통찰을 열어 줍니다.

설교는 로마서 5장의 구속사적 맥락을 따라, 인류의 첫 조상인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죄와 사망이 들어왔고, 오직 또 다른 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의 새 시대가 활짝 열렸음을 차분히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곧 온 인류의 실존적인 ‘우리의 죽음’이 되고, 그분의 다시 살아나심이 곧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생명’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그분께서 온 인류를 대표하는 참된 머리로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구원이란 멀리 서서 관조하듯 바라보는 남의 나라 사건이 아니며, 오직 온전한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께 영적으로 접붙여진 성도가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을 자기 자신의 실제적인 삶과 실존의 현실로 겸허히 받아들이는 거룩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그분의 사역의 마지막 결말이었다면, 온 세상의 복음과 성도의 소망은 차가운 무덤 앞에서 영원히 멈추어 섰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대속의 완성이 참된 영원한 생명으로 온전히 이어졌음을 온 우주 앞에 확증하며, 죄와 사망의 어두운 권세가 결코 승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담하게 선포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웅장한 고백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나의 교만하고 죄악 된 옛 삶의 완전한 죽음이 되고, 그분의 다시 살아나심이 내 심령 안에서 끊임없이 작동하는 거룩한 새 생명의 출발점이 될 때, 성도의 믿음은 단순한 관념적 지식을 넘어 존재 전체의 삶의 방향을 180도 바꾸어 놓습니다. 십자가는 영광스러운 부활 없이는 결코 완성될 수 없으며, 부활 역시 아픔이 서린 십자가를 지운 채 제대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이 둘이 성도의 가슴속에 온전히 함께 놓일 때, 내면의 죄에 대한 참된 자각은 절망의 늪으로 떨어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숭고한 은혜 또한 값싼 위안으로 흐르지 않게 됩니다.

빈무덤을 향해 달린 사랑이 만난 생명

부활의 첫 아침을 가장 따뜻하고 아름답게 비추는 성경의 장면 속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흘린 거룩한 눈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모든 희망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여겨지는 절망의 무덤을 향해 새벽 일찍 걸음을 옮겼고, 비록 주님께서 돌아가셨을지라도 그 거룩한 시신이라도 자신이 정성껏 모셔 가겠다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차가운 그 자리를 차마 떠나지 못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마리아의 이 깊은 마음을 죽음보다 강한 숭고한 사랑의 모습으로 바라봅니다. 십자가의 깊은 수난과 아픔을 가슴 깊이 새긴 사람만이, 마침내 맞이하게 되는 부활을 그저 가벼운 환희나 세속적 기쁨이 아니라 사랑이 마침내 사망의 권세를 온전히 이겨낸 위대한 구원 사건으로 깊이 있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텅 비어 있는 빈무덤은 마리아가 바친 순전한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온 천하에 드러내 보여주었지만, 정작 마리아 자신은 처음부터 자기 곁에 가깝게 서 계신 부활의 주님을 속히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녀를 향해 던져진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는 주님의 친절한 질문은, 그녀가 절망하며 슬퍼하는 바로 그 눈물의 한가운데에 이미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영으로 서 계심을 똑똑히 보여 줍니다. 인간의 눈물이 너무나 크고 깊으면, 때로는 바로 곁에 현존하여 계신 주님의 찬란한 소망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수 있으며, 세속 현실의 고통이 너무나 깊으면 생명의 주님이 내 곁에 가까이 다가와 계시다는 사실조차 낯설고 생소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진실한 성경 묵상은 눈앞의 슬픔을 무조건 서둘러 지워버리려는 헛된 시도가 아니라, 그 깊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 내 이름을 따뜻하게 부르시는 살아 계신 주님의 음성을 다시금 인격적으로 듣는 복된 일입니다.

이 가슴 뭉클한 장면은 오늘을 살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과연 무엇으로 살아 숨 쉬고 있는가를 깊이 있게 묻게 만듭니다. 아무리 웅장하고 아름다운 예배당 건물이 서 있고, 과거에 일어났던 찬란한 영적 기억과 역사들이 수놓아져 있다 할지라도, 주님을 향한 예배자의 진실한 사랑과 영적 갈망이 사라져 버린다면 그 교회는 살아 계신 주님의 역사하심을 오늘 증언하기보다는 그저 지나간 과거의 화려한 흔적만을 보존하는 종교적 박물관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시신을 정성껏 귀히 모시고자 했던 마리아의 마음도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무덤 너머에 살아 계신 주님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사랑과 열정이 없다면 부활의 생명은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역사하는 사건이 되기 어렵습니다. 쇠퇴해 가는 교회를 다시금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참된 능력은 외형적인 장엄함이나 세속적인 프로그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까지 주님을 온전히 만나고자 하는 성도들의 진실한 갈망에서부터 강력하게 시작됩니다.

부활 신앙은 오늘의 삶을 어디로 이끄는가

장재형 목사가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강조하는 부활 신앙은, 그저 일 년에 단 한 번 찾아오는 부활절 하루의 일시적인 감동이나 머릿속 교리적 동의의 수준에 결코 머물지 않습니다. 죽음이 우리 삶의 절대적인 끝이 아니라는 굳건한 믿음은, 삶의 온가지 두려움을 인위적으로 지워내는 주술적인 주문이 아니라, 이 세상의 온갖 두려움과 공포가 더 이상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새로운 영적 중심축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날마다 인격적으로 함께 살아간다는 성도의 고백은, 내가 내 삶의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주관하던 자기중심적인 자리에서 겸허히 내려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걸어가신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 그리고 무조건적인 봉사와 섬김을 내 삶의 참된 방향이자 목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빛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성도에게는, 이 땅에서 겪는 잠깐의 물질적 손해나 세속적인 고난이 더 이상 존재의 최종적인 파멸이나 실패로만 해석되지 않는 법입니다.

이 위대한 부활의 믿음은 성도 개인의 내면적 평안을 넘어, 그들이 모인 거룩한 공동체의 외형과 체질까지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그저 부활의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가르치는 장소에 그쳐서는 안 되며, 삶에 절망한 수많은 영혼들이 찾아와 다시금 하늘의 소망을 배우고, 세상의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힌 이들이 용기 있게 사랑을 선택하며 걸어가는 거룩한 생명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십자가의 깊은 수난을 묵상한 이후에도, 성도는 부활의 참된 생명과 승리의 기쁨을 오랫동안 지속해서 되새겨야 한다는 장재형 목사의 권면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저 절기의 정해진 일정표보다 훨씬 더 깊고 풍성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과 오랫동안 함께 머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새롭게 깨닫고 간절한 기도 속에서 다음 걸음을 신중히 준비했듯이,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 역시 부활의 절기를 그저 스쳐 지나쳐 버리지 말고, 부활의 생명력이 나의 매일의 삶의 거룩한 습관과 인격이 될 때까지 주님 앞에 오래도록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의 그 어떤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숭고한 사랑의 정확한 표징이며, 그분의 영광스러운 부활은 그 십자가 사랑이 실제로 사망의 무서운 권세를 온전히 짓밟고 승리하여 영원한 생명의 길을 활짝 연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품는 참된 부활 신앙은 인간의 한계와 죽음을 아예 모르는 척 모면하려는 무책임한 낙관주의가 아니며, 이 땅에 실재하는 죄의 무거운 무게와 죽음의 두려움, 그리고 흘러내리는 눈물과 비통함을 정면으로 곧게 바라보면서도 그것들이 결코 인간 존재의 마지막 최종 선언이 될 수 없음을 굳게 믿는 찬란한 소망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우리 삶에 고통스러운 무덤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어두운 무덤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구주로 믿는 거룩한 성도들을 영원히 가두어 둘 수 없다고 온 천하에 대담하게 선언할 뿐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도, 이제는 참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느껴지는 지독한 절망의 자리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중압감과 도래할 죽음에 대한 깊은 두려움, 멈추지 않는 눈물과 비통함, 그리고 점차 영적인 생명력을 잃어가는 피폐한 공동체의 모습이 마치 소망이 완전히 사라진 차가운 무덤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 계신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이 완전히 멈춘 뒤에야 비로소 멀리서 찾아오시는 분이 결코 아니며, 오늘 슬픔으로 깊이 울고 있는 바로 그 절망의 곁에 친히 서셔서 생명의 새로운 길을 활짝 여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오늘 나는 내 삶의 어떤 문제와 상황을 향해 너무나 조급하게 ‘끝’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미 내 삶 바로 곁에 가까이 와 계신 부활의 주님을, 혹시 내 안의 슬픔과 고통이 너무나 가득하여 아직 온전히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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