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명작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평생 동안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일처럼 까마득히 밀어 두었던 죽음이라는 무거운 명제가 어느 날 갑자기 한 인간의 가장 가까운 생생한 현실로 들이닥치는 절박한 순간을 깊이 있게 응시합니다. 죽음은 삶의 평온한 순간에는 한낱 멀리 있는 철학적 주제나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하지만, 내 집 문앞에 당장 다가오는 순간 인간이 한평생 땀 흘려 쌓아 올린 모든 세속적 확신과 안전한 질서를 한꺼번에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가장 근본적이고 엄중한 질문이 됩니다. 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의 강해 설교가 깊이 있게 붙드는 자리도 바로 이 절망의 지점입니다. 칠흑 같은 죽음의 공포와 허무함 속에 가둔 채 신음하는 인간을 향해, 복음은 그저 막연하고 상투적인 위로나 감상적인 다독임으로 다가오지 않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찬란하고 단호한 구원의 선포로 다가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들리는 부활의 복음
현대 문명이 자랑하는 첨단 과학과 의학의 발전이 우리의 삶을 이전보다 훨씬 안전하고 풍요롭게 만들었다는 세속적 믿음은, 갑작스러운 재난이나 뜻하지 않은 불치병의 위기 앞에서 너무나 손쉽게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평소 일상의 바쁨 속에서 사람들은 죽음을 자신과는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남의 일처럼 여기며 살아가지만, 예고 없이 찾아오는 생명의 위기는 죽음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정면 과제임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바로 그 비극의 순간, 인간의 영혼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 뜨겁게 솟구쳐 오르는 것은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간절한 생존의 갈망이며, 이 아픈 갈망은 피조물인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의 참된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금 절박하게 묻게 만듭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두려움과 절망의 한복판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찾고, 참된 예배와 교회,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 앞으로 겸허히 걸어 나오는 까닭을 바로 이 생명에 대한 본능적 갈망의 지점에서 바라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과 26절에 기록된 주님의 거룩한 말씀은 인간이 맞닥뜨리는 죽음의 참혹한 실재를 결코 외면하거나 모른 척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죽음이 인간의 존재와 역사의 최종적인 마지막 결말이라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주님의 위대한 약속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활의 소망을 가리키고, 살아서 주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선언은 끊어지지 않는 영생의 지평을 향해 활짝 열려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찬란한 중심에는 인간 스스로의 힘과 도덕적 노력으로 죽음의 그늘을 극복할 수 있다는 헛된 인문학적 낙관론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친히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생명의 길과 소망이 있다는 굳건한 믿음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비어 있는 무덤은 그저 사랑하는 이의 상실을 미화하거나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관념적인 상징이 아니며, 죄와 사망으로 무겁게 닫혀 있던 인간의 비극적 결말이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한 은혜 안에서 전혀 새롭게 열렸음을 선포하는 가장 명확한 복음의 이정표가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강해 설교를 통해 부활을 단순히 심리적인 위안이나 내면의 환상, 혹은 주관적인 신화로 축소하여 다루는 모든 시도를 경계합니다. 텅 비어 있는 역사적 무덤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제자들의 진실한 증언이라는 든든한 토대 위에서, 성경 묵상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사망 권세를 짓밟고 다함 없는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역사적·신학적 사실을 굳게 붙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품는 부활의 소망은 고단한 세속 현실을 피하기 위한 헛된 상상이 아니며, 죽음과 어둠이 인류의 삶에서 최종적인 왕권을 행사하는 절대적 권세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증언하는 굳건한 믿음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말씀은 단순히 육체의 목숨이 다한 이후에 펼쳐질 아득한 내세만을 말하며 일상의 삶을 다독이는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설교의 깊은 흐름 속에서 파악하는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죄로 말미암아 이미 영적인 의의 길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사망을 향해 달려가는 비참한 존재이며, 주님의 부활이 주는 은혜는 그처럼 영적으로 이미 죽어 있는 실존을 다시 강력하게 살려내는 생명의 능력으로 다가옵니다. 인간의 죄와 죽음은 서로 완전히 떨어진 별개의 문제가 아니며, 그 참혹한 비극에 대한 해답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완벽하게 하나로 얽혀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생명을 향한 갈망이 헛된 망상이 아니라 참된 구원의 소망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무엇이 우리 인간을 이토록 참혹한 죽음의 그늘 아래 무릎 꿇게 만들었는가를 하나님 말씀의 밝은 빛 아래서 정직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어둠을 통과해 피어나는 은혜
장재형 목사는 성도가 주님의 부활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풍성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십자가의 깊은 어둠과 수난의 현장을 통과해야만 한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환희만을 조급하게 붙드는 것으로는 부활 신앙이 지닌 신학적 깊이와 진정한 무게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그분이 도대체 왜 그렇게 참혹하게 죽으셔야만 했는지,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자신의 거룩한 몸과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셨는가를 아프게 물을 때 비로소 부활은 값싼 승리의 구호에 그치지 않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친히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사건으로 비로소 경험됩니다. 로마서 4장 25절의 말씀은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영광스러운 부활을 한 문장 안에서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거룩한 구속사의 사슬로 묶어 보여줍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엄중하고 거룩한 율법적 선포 앞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그 무거운 죄의 값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장 비참한 죄인의 자리에 친히 서셔서 인간의 온갖 죄악과 죽음의 짐을 짊어지셨다는 대속의 복음 메시지는,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결코 인간의 끔찍한 죄를 가볍게 덮어주는 얼렁뚱땅한 관용이 아님을 분명히 비추어 줍니다. 주님의 십자가 달리심에는 죄의 엄중한 무게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그 무서운 형벌의 잔을 독생자에게 대신 담당시키시는 그 깊은 십자가 사랑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함께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이 역사적 사실은, 인간의 구원이 결코 인간의 도덕적 공로나 자기 정당화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에게 거저 주어진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에서 비롯된다는 깊은 신학적 통찰을 열어 줍니다.
설교는 로마서 5장의 구속사적 맥락을 따라, 인류의 첫 조상인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죄와 사망이 들어왔고, 오직 또 다른 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의 새 시대가 활짝 열렸음을 차분히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곧 온 인류의 실존적인 ‘우리의 죽음’이 되고, 그분의 다시 살아나심이 곧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생명’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그분께서 온 인류를 대표하는 참된 머리로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구원이란 멀리 서서 관조하듯 바라보는 남의 나라 사건이 아니며, 오직 온전한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께 영적으로 접붙여진 성도가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을 자기 자신의 실제적인 삶과 실존의 현실로 겸허히 받아들이는 거룩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그분의 사역의 마지막 결말이었다면, 온 세상의 복음과 성도의 소망은 차가운 무덤 앞에서 영원히 멈추어 섰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대속의 완성이 참된 영원한 생명으로 온전히 이어졌음을 온 우주 앞에 확증하며, 죄와 사망의 어두운 권세가 결코 승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담하게 선포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웅장한 고백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나의 교만하고 죄악 된 옛 삶의 완전한 죽음이 되고, 그분의 다시 살아나심이 내 심령 안에서 끊임없이 작동하는 거룩한 새 생명의 출발점이 될 때, 성도의 믿음은 단순한 관념적 지식을 넘어 존재 전체의 삶의 방향을 180도 바꾸어 놓습니다. 십자가는 영광스러운 부활 없이는 결코 완성될 수 없으며, 부활 역시 아픔이 서린 십자가를 지운 채 제대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이 둘이 성도의 가슴속에 온전히 함께 놓일 때, 내면의 죄에 대한 참된 자각은 절망의 늪으로 떨어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숭고한 은혜 또한 값싼 위안으로 흐르지 않게 됩니다.
빈무덤을 향해 달린 사랑이 만난 생명
부활의 첫 아침을 가장 따뜻하고 아름답게 비추는 성경의 장면 속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흘린 거룩한 눈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모든 희망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여겨지는 절망의 무덤을 향해 새벽 일찍 걸음을 옮겼고, 비록 주님께서 돌아가셨을지라도 그 거룩한 시신이라도 자신이 정성껏 모셔 가겠다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차가운 그 자리를 차마 떠나지 못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마리아의 이 깊은 마음을 죽음보다 강한 숭고한 사랑의 모습으로 바라봅니다. 십자가의 깊은 수난과 아픔을 가슴 깊이 새긴 사람만이, 마침내 맞이하게 되는 부활을 그저 가벼운 환희나 세속적 기쁨이 아니라 사랑이 마침내 사망의 권세를 온전히 이겨낸 위대한 구원 사건으로 깊이 있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텅 비어 있는 빈무덤은 마리아가 바친 순전한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온 천하에 드러내 보여주었지만, 정작 마리아 자신은 처음부터 자기 곁에 가깝게 서 계신 부활의 주님을 속히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녀를 향해 던져진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는 주님의 친절한 질문은, 그녀가 절망하며 슬퍼하는 바로 그 눈물의 한가운데에 이미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영으로 서 계심을 똑똑히 보여 줍니다. 인간의 눈물이 너무나 크고 깊으면, 때로는 바로 곁에 현존하여 계신 주님의 찬란한 소망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수 있으며, 세속 현실의 고통이 너무나 깊으면 생명의 주님이 내 곁에 가까이 다가와 계시다는 사실조차 낯설고 생소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진실한 성경 묵상은 눈앞의 슬픔을 무조건 서둘러 지워버리려는 헛된 시도가 아니라, 그 깊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 내 이름을 따뜻하게 부르시는 살아 계신 주님의 음성을 다시금 인격적으로 듣는 복된 일입니다.
이 가슴 뭉클한 장면은 오늘을 살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과연 무엇으로 살아 숨 쉬고 있는가를 깊이 있게 묻게 만듭니다. 아무리 웅장하고 아름다운 예배당 건물이 서 있고, 과거에 일어났던 찬란한 영적 기억과 역사들이 수놓아져 있다 할지라도, 주님을 향한 예배자의 진실한 사랑과 영적 갈망이 사라져 버린다면 그 교회는 살아 계신 주님의 역사하심을 오늘 증언하기보다는 그저 지나간 과거의 화려한 흔적만을 보존하는 종교적 박물관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시신을 정성껏 귀히 모시고자 했던 마리아의 마음도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무덤 너머에 살아 계신 주님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사랑과 열정이 없다면 부활의 생명은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역사하는 사건이 되기 어렵습니다. 쇠퇴해 가는 교회를 다시금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참된 능력은 외형적인 장엄함이나 세속적인 프로그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까지 주님을 온전히 만나고자 하는 성도들의 진실한 갈망에서부터 강력하게 시작됩니다.
부활 신앙은 오늘의 삶을 어디로 이끄는가
장재형 목사가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강조하는 부활 신앙은, 그저 일 년에 단 한 번 찾아오는 부활절 하루의 일시적인 감동이나 머릿속 교리적 동의의 수준에 결코 머물지 않습니다. 죽음이 우리 삶의 절대적인 끝이 아니라는 굳건한 믿음은, 삶의 온가지 두려움을 인위적으로 지워내는 주술적인 주문이 아니라, 이 세상의 온갖 두려움과 공포가 더 이상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새로운 영적 중심축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날마다 인격적으로 함께 살아간다는 성도의 고백은, 내가 내 삶의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주관하던 자기중심적인 자리에서 겸허히 내려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걸어가신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 그리고 무조건적인 봉사와 섬김을 내 삶의 참된 방향이자 목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빛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성도에게는, 이 땅에서 겪는 잠깐의 물질적 손해나 세속적인 고난이 더 이상 존재의 최종적인 파멸이나 실패로만 해석되지 않는 법입니다.
이 위대한 부활의 믿음은 성도 개인의 내면적 평안을 넘어, 그들이 모인 거룩한 공동체의 외형과 체질까지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그저 부활의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가르치는 장소에 그쳐서는 안 되며, 삶에 절망한 수많은 영혼들이 찾아와 다시금 하늘의 소망을 배우고, 세상의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힌 이들이 용기 있게 사랑을 선택하며 걸어가는 거룩한 생명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십자가의 깊은 수난을 묵상한 이후에도, 성도는 부활의 참된 생명과 승리의 기쁨을 오랫동안 지속해서 되새겨야 한다는 장재형 목사의 권면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저 절기의 정해진 일정표보다 훨씬 더 깊고 풍성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과 오랫동안 함께 머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새롭게 깨닫고 간절한 기도 속에서 다음 걸음을 신중히 준비했듯이,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 역시 부활의 절기를 그저 스쳐 지나쳐 버리지 말고, 부활의 생명력이 나의 매일의 삶의 거룩한 습관과 인격이 될 때까지 주님 앞에 오래도록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의 그 어떤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숭고한 사랑의 정확한 표징이며, 그분의 영광스러운 부활은 그 십자가 사랑이 실제로 사망의 무서운 권세를 온전히 짓밟고 승리하여 영원한 생명의 길을 활짝 연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품는 참된 부활 신앙은 인간의 한계와 죽음을 아예 모르는 척 모면하려는 무책임한 낙관주의가 아니며, 이 땅에 실재하는 죄의 무거운 무게와 죽음의 두려움, 그리고 흘러내리는 눈물과 비통함을 정면으로 곧게 바라보면서도 그것들이 결코 인간 존재의 마지막 최종 선언이 될 수 없음을 굳게 믿는 찬란한 소망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우리 삶에 고통스러운 무덤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어두운 무덤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구주로 믿는 거룩한 성도들을 영원히 가두어 둘 수 없다고 온 천하에 대담하게 선언할 뿐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도, 이제는 참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느껴지는 지독한 절망의 자리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중압감과 도래할 죽음에 대한 깊은 두려움, 멈추지 않는 눈물과 비통함, 그리고 점차 영적인 생명력을 잃어가는 피폐한 공동체의 모습이 마치 소망이 완전히 사라진 차가운 무덤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 계신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이 완전히 멈춘 뒤에야 비로소 멀리서 찾아오시는 분이 결코 아니며, 오늘 슬픔으로 깊이 울고 있는 바로 그 절망의 곁에 친히 서셔서 생명의 새로운 길을 활짝 여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오늘 나는 내 삶의 어떤 문제와 상황을 향해 너무나 조급하게 ‘끝’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미 내 삶 바로 곁에 가까이 와 계신 부활의 주님을, 혹시 내 안의 슬픔과 고통이 너무나 가득하여 아직 온전히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