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동행 –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와 동료들

이 글에서는 마가복음 14장 32-42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중점적으로 다루되, 장재형목사가 강조해 온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라는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성경 본문에서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과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그 고독한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신앙의 핵심 가치를 되새기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메시지와 함께 장재형목사가 전하고자 하는 주요 가르침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전개는 여러 소주제나 구분 없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며,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장면이 우리 각자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성찰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마가복음 14장에 기록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마친 후 감람산 기슭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고, 거기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한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일반적으로 ‘감람산’은 올리브나무 숲이 가득하며, 그 가운데 ‘겟세마네’는 ‘채유소’, 즉 올리브 열매를 짜서 기름을 얻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장소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올리브 기름이 가져다주는 두 가지 상징, 즉 평화와 영원성, 그리고 메시아에게 기름 부음을 주던 전통을 함께 묵상해 볼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히브리어로 ‘메시야’, 헬라어로 ‘크리스토스’라는 표현이 모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즉 기름 부음받은 왕으로서 겟세마네 동산에 계셨음에도, 여기서 제자들에게는 그분을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우는 장면이 아니라 오히려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며 십자가 수난을 준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왕으로 즉위하셔야 할 분이 극도로 비참한 기도를 드리시는 장면이기에, 성경 전체에서 매우 강렬하고도 역설적인 대조를 형성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마태·마가·누가복음에 공통적으로 기록된 대단히 중요한 본문이지만,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특징이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에 대해, 요한이 이미 13장부터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는 길을 완전히 수락하셨음을 조명했기에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자신이 ‘이제 영광을 받았다’고 선언하셨고, 제자들에게 종말론적 당부와 고별 설교를 남기셨습니다. 즉, 십자가 수난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당신은 스스로 그 길을 ‘영광’이라 선포하심으로 결단하셨다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주님은 갈보리 언덕 이전부터 이미 그리스도의 길을 선택하셨다. 요한은 예수님의 내면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수용하는 왕적 위엄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에 겟세마네 기도를 생략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가 기록한 겟세마네 기도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인간적 고민’과 ‘극렬한 통곡’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14장 33-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참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께 ‘아바 아버지’라 간구하며 끝까지 순종하신 고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께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 그분 안에는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처절한 길인지, 또 그 길을 가는 데 있어 인간적 떨림과 고통이 없을 수 없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스스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고백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복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장재형목사가 자주 강조해 왔듯, 예수님이 사실상 십자가를 지는 길을 ‘피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이나 마가복음 14장에 드러난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 죽음 앞에서 느끼는 극심한 두려움과 고통을 토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이어집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단하고는 있지만, 종종 우리의 의지와 감정은 연약하기 때문에 다른 길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들이 많다. 예수님 또한 그 순간을 겪으셨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을 붙들고 끝까지 걸어가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본을 보여주셨다”고 풀이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모든 이가 반드시 직면해야 할 도전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는 진리입니다.

한편,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를 올리시는 동안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식사 자리에서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큰 소리를 쳤는데, 예수님은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로 들어와서 기도하시는 동안에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들어 버립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시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주님께는 지금이 가장 절박한 시간이고, 일생일대의 영적 투쟁이 벌어지는 중인데, 제자들은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밤에 산책을 나온 사람들처럼 무심하게 잠에 든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종종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엄중한 순간에 우리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버릴 때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제자들은 허둥지둥 도망쳐 버리는데, 마가복음 14장 51-52절에는 베 홑이불을 두르고 따라오던 한 청년이 붙잡히자 홑이불을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전통적으로 이 ‘한 청년’을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자신의 집에서 최후의 만찬이 있었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감람산으로 나아가자, 밤중에 일단 잠들어 있던 마가가 뒤늦게 모든 상황을 감지하고 황급히 예수님을 따라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도 두려움 앞에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친다”라고 설명합니다. 마가는 이토록 부끄러운 장면을 자기 복음서에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기록함으로써, 인간적인 연약함이 얼마나 쉽게 드러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연약함조차도 결국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정직한 신앙고백’의 모범이라 칭하며, “마가는 자신이 부끄러운 존재임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런 자신도 변화시키신 주님의 은혜를 자랑하기 위해 이 장면을 그대로 쓴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약점을 숨기기보다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길을 열어 놓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셔야 마땅한 예수님께서 오히려 고통과 슬픔 속에 땀을 핏방울같이 흘리시는 비극적인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완전히 받아들여지기까지, 즉 예수가 진실로 ‘기름 부음받은 이’로 공인되고 고백되기까지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불가피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분의 길을 함께 걸어갈 영적·신앙적 성숙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홀로 고독의 길을 가야 했고, 그 절정이 바로 겟세마네의 땀방울과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였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에 대해,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도 떡과 포도주를 받고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나, 곧 이어서 펼쳐질 고난의 현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유월절에 희생된 양의 피가 기드론 시내로 흘러내려 붉게 물들어 있는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도, 주님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를 선명히 알지 못했다. 주님은 홀로 그 붉은 물살을 건너 겟세마네로 들어가셨고, 이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고독하고 처절한 순간,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이는 아람어 ‘아바’(아빠)와 헬라어 ‘파테르’(아버지)가 결합된 표현으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맺고 계신 친밀하고도 절대적인 신뢰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에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 부르셨으나, 이 고통의 골짜기에서 그분은 더욱 간절하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아빠 아버지여”라 부르며 부르짖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을 때 가장 큰 유혹은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하는 의심이 생길 때다. 예수님조차 그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아바 아버지’를 찾으심으로, 인간적인 두려움의 순간에 우리도 전적으로 아버지를 신뢰해야 한다는 본을 보이셨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우리는 죽음의 세력이 가장 강력하게 덮쳐 올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을 놓지 말아야 하며,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의 기도 안에 ‘수단’으로서의 기도가 아니라 ‘순종’을 낳는 기도로서의 본질이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셨으나, 결국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결론지으셨습니다. 이 장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우리는 종종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바꿔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나를 바꾸도록’ 내어맡기는 태도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도의 정수는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뜻과 감정을 초월해 아버지께 끝까지 복종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된 기도의 목표”라고 강조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길을 따를 힘을 주는 근원적 모범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약함을 지닌 제자들은 이 기도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잠들었고, 야고보와 요한도 주님의 절박함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시며,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권면하셨으나, 그들은 여전히 무감각한 상태였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들을 ‘교회 내의 인간적인 모습’으로 비유하면서, “세상에서는 큰소리치고 대범해 보이는 신자도, 실상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잠들어 버리거나 도망가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고,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욱 겟세마네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하며, 베드로처럼 망령된 자신감을 내세우기보다, 예수님처럼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후 예수님은 세 번째 기도 후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라고 하시며, 십자가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군병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몰려오자 제자들은 흩어집니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는 “아무리 강한 결심과 의지를 보여도, 결국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넘어지기 쉽다.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실제로는 가장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을 부인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가 넘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돌이키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곧 우리가 넘어지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지라도 주님께서 돌이킴의 은혜를 주신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됩니다.

결국,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죽음의 잔’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 수용하셨고,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신 현장이 바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방관자나 구경꾼의 위치로 남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며, 주님 안에 주어진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고 역설합니다. 즉, 겟세마네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순종의 길을 우리 또한 믿음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고독하고 비극적으로 보일지라도, 부활의 영광이 그 끝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한편, 요한복음이 겟세마네 기도를 생략한 것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영광으로 선포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의 인간적 고뇌 부분을 생략하는 편집 의도를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다시 한 번 짚어 줍니다. 요한복음은 17장의 고별 기도를 통해 세상과 제자들을 위해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왕적’ 위엄을 더욱 부각합니다. 반면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고통을 당하셨고,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기도를 드리셨는가에 포커스를 둡니다. 이 둘은 결코 모순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더 풍부하게 보여주는 보완적 시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도 종종 겟세마네 같은 어려움을 맞이한다. 세상에서 기드론 시내처럼 붉은 피의 흔적을 보며 때로 두렵고 떨리기도 하고, 아무도 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해 외롭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길을 이미 가셨고, 우리에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본을 남겨주셨다. 우리가 그 기도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때, 주님과 동행하는 길은 분명히 고독을 넘어 부활의 환희로 이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겟세마네와 갈보리 언덕은 고통이 극심하게 드러나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는 자리라는 진리가 우리에게 제시됩니다.

더 나아가, 겟세마네 사건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모두를 돌아보게 하는 ‘영적 거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며, 어쩌면 마가처럼 겨우 홑이불만 두른 채 뛰어갔다가 결국 도망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적인 결심과 맹세가 얼마나 한계가 뚜렷한지를 지적하면서, “베드로처럼 어떠한 어려움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큰소리쳐도, 하나님 앞에 깨어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작은 자극 하나에도 무너지고 만다. 그러므로 신앙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과 기도를 통해서만 단단해진다”고 합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열심보다 내면의 겸손과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14장 후반부에 보면, 예수님이 실제로 체포되시고 대제사장들 앞에서 신문받으시는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베드로는 정확히 예수님의 예언대로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맙니다. 닭이 울자마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죠.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인간적인 비참함과 눈물을 지적하면서, “우리는 실패하고 넘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베드로를 찾아가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다. 이는 겟세마네 기도에서 십자가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죄인인 우리를 얼마나 끝까지 붙드시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만든다”고 설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며, 때로는 고독하고 외롭고 눈물겨운 길임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길을 주님이 먼저 가셨기에, 그리고 그 길에서 제자들의 모든 실패까지도 주님이 포용하셨기에, 우리가 실패한다 할지라도 다시금 회복될 수 있는 길이라는 희망이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바로 이 ‘부활의 희망으로 이끌어가는 고난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겟세마네와 같은 어둠과 슬픔, 홀로 씨름해야 할 시험을 맞닥뜨릴 수 있으나, 기도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며 나아갈 때 우리 또한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을 통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첫째, 예수님도 인간적인 두려움과 고통을 겪으셨고, 우리 역시 그러한 시험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둘째, 그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를 부르짖으셨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라는 복종은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이를 위해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넷째, 제자들처럼 잠에 빠지거나 도망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도 솔직히 인정해야 하며, 그 연약함 속에 임하는 주님의 은혜로 인해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결국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점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십자가는 인간적인 최악의 절망이지만, 부활이라는 최후의 소망으로 이어지는 통로이며, 그 길에서 우리의 믿음은 성숙해집니다.

이처럼 겟세마네와 갈보리는 단순히 2000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영적 현실을 비추어 줍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에 주목하며, “우리는 너무 쉽게 제자들을 비난하지만, 사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라고 물어봐야 한다. 그 질문을 통해 자기 자신도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날 잠재력을 가진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 훨씬 더 큰 겸손과 회개의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신앙은 ‘내가 강해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끝까지 붙들어 주시고, 우리가 연약함을 인정하며 은혜를 구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나아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각종 위기와 유혹을 만날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처럼 그저 의지로 버티다가 결국 도망치거나 무너져 버리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처럼 아버지 앞에 모든 것을 토로하며 “아버지의 원대로 되길 원합니다”라는 고백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 후자의 길이, 장재형목사가 끊임없이 설파해 온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실질적 모습입니다.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먼저 그 길을 가셨고, 부활하심으로써 그 길이 결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따를 때, 비록 인간적인 약함과 눈물이 따른다 해도, 마지막에는 부활의 능력이 펼쳐지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맛보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틀어 우리는 ‘기도’의 역할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가장 힘겨운 순간에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의 자리에 가셨고, 그들이 함께 깨어 기도하기를 원하셨을까요? 장재형목사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 마음의 항복을 이끌어낸다. 기도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교만의 표현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코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제자들도 깨어 기도하기를 원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동안 어떤 의미 있는 역할도 하지 못하고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 후에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기도의 자리’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복음 전파 사명을 맡기십니다. 결국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초대교회 부흥을 일으키는 주역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정적이고 결단력 있어 보인다 해도, 기도를 잃어버리면 베드로와 같이 작은 유혹 앞에서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의 주님처럼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어떤 시험도 결국 극복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점에서 “교회가 이 땅에서 설 자리를 잃고, 개인의 신앙이 깊은 내면적 능력을 잃어버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진정한 의미의 겟세마네 기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겟세마네 기도는 간절함과 절실함,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순종을 담고 있는데, 이를 놓치면 우리도 잠자고, 멀리 도망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순절 기간이나 특별 새벽기도회 등 특정 절기에만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자리에서 늘 겟세마네를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피할 수 없는 결단을 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하는 영적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거룩한 반복’이라 부릅니다. 즉, 역사 속에서 단 한 번 있었던 겟세마네의 이야기가 오늘도 우리 안에서 반복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가처럼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끝내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복음서의 저자로 세워지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세 번씩 주님을 부인했다 해도, 다시금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부여받고 장차 교회 기둥으로 쓰임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렇듯, 마가복음에 기록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은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가장 강렬한 예시이자, 제자들의 연약함과 예수님의 인자하심이 극명히 대비되는 자리입니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은 결국 이 겟세마네 영성에서 비롯됩니다. 아무리 무서운 죽음이 다가온다 해도, 아바 아버지를 향한 절대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내 원대로 하지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외롭고 고독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그 길을 먼저 가셨고, 그 길이 영원한 승리로 이어졌음을 우리는 부활 사건을 통해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믿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과제입니다.

이러한 겟세마네 사건을 정리하며, 장재형목사는 우리 각자가 ‘내가 피하고 싶은 십자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라고 조언합니다. “혹은 내가 잠들어 버리고 있는 고난은 무엇이며,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매달려야 할 일은 무엇인가? 또 나는 지금 베드로처럼 ‘주를 위해 목숨도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실상은 쉬지 못할 잠에 빠져 있거나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들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진실하게 답해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와 한층 더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더 이상 인간적인 힘이나 의지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늘 “신앙은 나의 결단 위에 서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과 예수님이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신 순종 위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순종에 발붙여, 우리 역시 삶의 크고 작은 겟세마네를 만나게 될 때마다 “아바 아버지”를 부르짖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신뢰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라는 영적 현실을 우리 일상에서 구체화시키는 열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신앙 행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밤중에 흘리는 눈물과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그 기도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이미 선언하신 구원과 생명의 능력을 우리 삶에 실제로 펼쳐 보이십니다.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에 담긴 예수님의 기도와 제자들의 연약함, 그리고 결국 십자가의 길을 향해 굳게 일어나신 예수님의 순종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상기하게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주님은 홀로 그 길을 가셨다. 제자들은 자고 있었고, 누군가는 도망쳤으며, 다른 누군가는 배신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길은 본래부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 치의 후퇴 없이 그 길을 가셨고, 그 길의 종착지는 부활이라는 승리였다”고 말합니다. 이 메시지는 예나 지금이나 제자도로 초청받은 모든 이에게 변함없이 유효하며, 우리 각자를 향해 ‘함께 가자’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초청입니다.

정리하자면, 장재형목사가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강조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은 다음과 같은 함의를 지닙니다. 첫째, 우리의 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되, 그 약함을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이 우리 의지와 다를 때에도, 나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이 더 선하고 옳음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어떤 강한 결심과 맹세도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넷째, 비록 내가 실패한다 해도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에도 제자를 버리지 않으셨듯, 우리 역시 다시 일으키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부활의 영광을 내포하는 역설적 상징이기에, 지금 눈앞에 보이는 고난에만 매몰되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달려갈 때 그 영광을 맛보게 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결국 겟세마네 기도를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내 인생에서 지금 겪고 있는 혼돈과 시련이 어떤 의미인가? 그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하게 만듭니다. 주님은 그 끝에 분명한 답을 주십니다. 내가 부담스러워하고 피하고 싶은 십자가가 있다면, 그 십자가 너머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영광과 부활의 승리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절정이며, 장재형목사가 거듭거듭 전해 온 복음의 실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겟세마네에서 통곡하던 예수님을 향해 비로소 깨어 일어나 함께 걸어가는 결단입니다. 이제 더는 자고 있지 말고, 또 도망가지 말고, 주님과 함께 가는 진정한 동행자로 서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요약하면, 겟세마네의 기도는 예수님이 가지신 인간적 약함과 신적 순종의 역설을 여실히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기도’로 나아가야 함을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겟세마네 영성의 중요성을 수없이 설파해 왔으며, 그 핵심은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과 동행하려면 우리도 겟세마네의 통곡을 치러야 하고, 십자가를 감당해야 하며, 끝내 그 길이 영광으로 가는 길임을 믿어야 한다”라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깨어 기도하며 겟세마네를 다시금 내 삶의 현장에 구현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동행이야말로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된 길이 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록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이 드러나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시고도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의 실패와 눈물도 마침내는 주님의 부활 능력 안에서 회복되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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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eo 1: por qué la genealogía de Jesús no oculta las faltas humanas | Pastor David Jang

Si alguien escribiera la historia de mi vida, ¿qué pasaje le pediría que omitiera antes que ningún otro? La genealogía de Jesucristo en Mateo 1 conserva, junto con la gloria de los reyes, el sufrimiento del exilio, la presencia de mujeres extranjeras y las huellas del pecado. En su sermón, el pastor David Jang, fundador de Olivet University en Estados Unidos, descubre en esta genealogía una promesa de salvación que las faltas humanas no lograron interrumpir. En el centro del relato no está una familia intachable, sino el Salvador que entró personalmente en una historia imperfecta.

Tres períodos de catorce generaciones: una promesa que continúa en medio del sufrimiento

Mateo presenta tres períodos de catorce generaciones: desde Abraham hasta David, desde David hasta la deportación a Babilonia y desde la deportación hasta Cristo (Mt 1:17). El tiempo en que se estableció la monarquía y aquel en que se perdió la nación aparecen dentro de una misma genealogía. La salvación prometida por Dios no llegó a través de una historia marcada únicamente por la prosperidad. La caída de una dinastía y una larga espera también forman parte del relato que conduce a Cristo.

El pastor David Jang destaca que los valores numéricos de las consonantes que componen el nombre de David en hebreo suman 4 + 6 + 4 = 14. En este sermón, la repetición de las catorce generaciones subraya el mensaje de que Jesús vino como Rey, como descendiente de David. Asimismo, mediante una interpretación simbólica que relaciona las cuarenta y dos generaciones de los tres períodos con los cuarenta y dos meses bíblicos, entendidos como una imagen del sufrimiento, explica el curso de una salvación que llega a su cumplimiento después de la espera.

El sentido al que apuntan estos números va más allá de recuperar la gloria de una casa real. Su significado reside en la llegada del Mesías que salvará a los pecadores y en la restauración de una vida en comunión con Dios. Por eso, el sermón también contempla las palabras de Gálatas 4:4: «cuando vino el cumplimiento del tiempo». Lo que para los seres humanos parecía una espera larga y sin horizonte se convierte, dentro de la promesa de Dios, en una historia que aguarda a Cristo.

Que la genealogía comience con Abraham y tenga a David en su centro muestra que esta espera no era una expectativa imprecisa. La promesa se transmitió a través de personas y generaciones concretas, y continuó incluso después del exilio. Al leer la historia, la pregunta decisiva no es tanto quién logró mantenerse en el éxito hasta el final, sino qué permaneció cuando los logros humanos se derrumbaron. Precisamente allí sitúa este sermón la soberanía de Dios y su promesa de salvación.

Aferrarse a esta promesa no borra el dolor del sufrimiento. La mención del exilio en Babilonia permite recordar la pérdida sin disimularla. Sin embargo, el hecho de que aquel tiempo no fuera el final de la genealogía nos invita a detener la prisa con la que pretendemos juzgar toda una vida a partir de un fracaso presente. La razón para confiar en Dios, aun en medio de un tiempo que todavía no comprendemos, no se encuentra tanto en nuestro optimismo como en su fidelidad.

Tamar, Rahab, Rut y Betsabé: nombres que no fueron borrados

La mirada que seguía los altibajos de la historia se detiene ahora en las personas que los vivieron. Al conocer las historias de las mujeres que aparecen en la genealogía de Jesús, resulta difícil reducir a una persona a una etiqueta conocida. En la historia de Tamar se entrelazan las responsabilidades familiares y la vergüenza, pero finalmente Judá reconoce que ella es más justa que él (Gn 38:26). La historia de la salvación conserva incluso ese momento en que quien condenaba a otra persona se ve obligado a reconocer su propia falta.

Rahab aparece como una prostituta de Jericó, pero la carta a los Hebreos recuerda la fe con la que recibió a los espías (Heb 11:31). En la genealogía de Mateo figura como madre de Booz. Rut, una mujer moabita, hace del pueblo y del Dios de Noemí su propio pueblo y su propio Dios, y junto con Booz da continuidad a la genealogía que conduce a David. Una mirada que juzga a las personas únicamente por su origen y su pasado no alcanza a reconocer plenamente su fe y su entrega.

La expresión que se refiere a Betsabé como «la mujer de Urías» conserva un recuerdo todavía más incómodo. Junto al nombre de David quedan también el pecado que cometió y la muerte de Urías. Es un episodio que quizá se habría querido borrar para proteger el honor del rey, pero su presencia en el relato impide olvidar el mal que podría quedar oculto detrás de la gloria. Por eso, el hecho de que personas pecadoras hayan participado en la historia de la salvación no puede convertirse en una justificación del pecado mismo.

En este punto, leer la genealogía se convierte en un ejercicio para aprender a comprender a las personas. Si solo miramos la vergüenza asociada a Tamar, pasamos por alto la falta que Judá reconoció. Si solo vemos el pasado de Rahab, no percibimos la fe que manifestó. Si encerramos a Rut en la categoría de extranjera, dejamos de escuchar su confesión de fe. Detenernos ante los nombres que la Escritura ha conservado significa resistirnos a explicar toda la vida de alguien a partir de un único dato que conocemos.

La gracia que transmiten estos nombres no es un permiso para embellecer el pasado. La responsabilidad de reconocer las faltas permanece, mientras se tambalean las barreras que mantenían a las personas excluidas por su origen y sus errores. La genealogía de la salvación no demuestra que los seres humanos sean irreprochables. Revela el amor de Dios, que no renunció a una humanidad imperfecta. Por eso necesitamos tanto el arrepentimiento que examina nuestra propia vida como la humildad con la que miramos a los demás.

El significado de Emanuel: Dios vino al encuentro de los pecadores

Después de los nombres de aquellas mujeres, la genealogía llega a María. Mateo 1 relata que ella concibió por obra del Espíritu Santo y que José, sin conocer todavía lo sucedido, pensaba poner fin a su compromiso en secreto. El ángel del Señor le dice que no tenga miedo. Ante un acontecimiento que superaba la comprensión humana, se le pedía la obediencia de acoger la palabra de Dios.

Los dos nombres que aparecen a continuación iluminan el sentido de toda la genealogía. Jesús es quien salvará a su pueblo de sus pecados (Mt 1:21), y Emanuel significa que Dios está con nosotros (Mt 1:23). La promesa de la presencia de Dios no se limita a que permanezca a nuestro lado haciendo como si nuestras faltas no existieran. Es la declaración de que él mismo entró en la vida humana para salvar a quienes estaban sometidos al pecado y a la muerte.

Aquí, el registro de una ascendencia se conecta con la vida de quienes hoy creen en Cristo. El sermón describe la unión con Jesús como la entrada en una «genealogía espiritual»: la pertenencia al pueblo de Dios. No es el hecho de nacer en una familia determinada ni de tener una trayectoria más distinguida que la de otros lo que establece esa relación. Es una nueva pertenencia que se abre a quien recibe a Cristo por la fe, y en ella no tiene cabida la actitud que convierte el origen o el sexo en criterios de superioridad.

El pastor David Jang relaciona esta presencia de Dios con la restauración del templo derribado. Según esta interpretación, Cristo viene como el verdadero templo y, al habitar el Espíritu Santo en quienes lo reciben, se restaura la vida en comunión con Dios. Desde esta perspectiva, la salvación es algo más fundamental que construir una nueva trayectoria para obtener el reconocimiento ajeno. Consiste en la renovación de nuestro interior y de nuestra vida para vivir en la presencia de Dios.

El camino de humildad de Cristo que presenta Filipenses 2:6–7 profundiza este significado. El Señor no se limitó a contemplar desde lejos la fragilidad humana, sino que vino tomando la condición de siervo. Por eso, Emanuel no es un consuelo que solo pueda reconocerse después de que todo dolor haya desaparecido. Porque Dios vino al corazón de nuestra realidad imperfecta, podemos mirar hacia la salvación sin dar la espalda a esa realidad.

Leer la genealogía desde la gracia transforma nuestra mirada de hoy

Si después de leer esta genealogía seguimos utilizando los mismos criterios para dividir a las personas, quizá todavía exista una distancia entre conocer aquellos nombres y recibir el evangelio. Eso sucede cuando pedimos comprensión para nuestras propias circunstancias, pero ante los demás nos fijamos primero en sus errores del pasado. Necesitamos examinar a la luz de la Palabra esa contradicción: pedir gracia para nosotros mismos y exigir méritos a nuestro prójimo.

La exhortación con la que concluye el sermón es la de tener la misma actitud que hubo en Cristo Jesús (Flp 2:5). Confesar que seguimos al Señor que se humilló nos lleva a revisar, antes que nada, las distancias que hemos establecido por el origen, el sexo o las circunstancias de otra persona. Un comienzo puede ser no decidir cómo tratar a alguien que llega por primera vez a la comunidad en función de su procedencia, o no explicar su presente únicamente por los errores de su pasado. El amor que supera la discriminación se manifiesta menos en una consigna lejana que en la manera de tratar a una persona cercana.

También necesitamos dirigir esa mirada hacia nosotros mismos. Debemos sostener a la vez la responsabilidad de reconocer y corregir nuestras faltas y la esperanza de no quedar encerrados en el pasado. Si para acercarnos a Dios tuviéramos que ser primero personas perfectas, quienes cargan con recuerdos imborrables permanecerían para siempre fuera de la puerta. Sin embargo, Mateo 1 no dice que el Salvador viniera solo después de que los seres humanos hubieran dejado su historia libre de toda mancha.

Volvamos al relato de nuestra vida que imaginamos al principio. Lo importante ahora no es cuánto hemos logrado borrar los episodios que nos avergüenzan, sino si podemos reconocerlos con honestidad y, aun así, mirar a Cristo. La genealogía de Jesús muestra una gracia que no borra las faltas del relato, pero tampoco encierra a las personas en ellas. ¿Podré poner hoy ante esa gracia tanto el episodio de mi vida que deseaba borrar como el nombre del prójimo al que juzgué con demasiada facilidad?

マタイの福音書1章、イエスの系図が過ちを隠さない理由|張ダビデ牧師

誰かが私の人生を書き記すとしたら、真っ先に「ここは書かないでほしい」と頼みたくなるのは、どのような一節だろうか。マタイの福音書1章にあるイエス・キリストの系図は、王の栄光と共に、捕囚の苦しみ、異邦の女性たち、そして罪の痕跡までも書き残している。張ダビデ牧師(米国Olivet University創立者)の説教は、この系図から、人間の過ちによっても途絶えることのなかった神の救いの約束を読み解く。記録の中心にあるのは、非の打ちどころのない家系ではなく、不完全な歴史の中へ自ら来てくださった救い主である。

十四代を三度――苦難の中でも受け継がれた約束

マタイは、アブラハムからダビデまで、ダビデからバビロン捕囚まで、そして捕囚の後からキリストまでを、それぞれ十四代からなる三つの区分として示している(マタイ1章17節)。王が立てられた時代と、国を失った時代が、同じ系図の中に置かれている。神が約束された救いは、繁栄だけが続く歴史を通して訪れたのではない。崩れた王朝も、長い待望の時も、キリストへと至る記録から除かれてはいない。

張ダビデ牧師は、ダビデのヘブライ語の名前を構成する子音の数値を足すと、4+6+4=14になることに注目する。この説教では、十四代という数の繰り返しが、イエスこそダビデの子孫として来られた王であるというメッセージを強調している。さらに、三つの区分を合わせた四十二代を、聖書に登場する四十二か月という苦難の表象と象徴的に結びつけ、待ち望む時を経て成就する救いの流れを説き明かしている。

これらの数字が指し示すものは、王家の栄光を取り戻すことよりも深い。罪人を救うメシアが来られ、神と共に生きる人生が回復されることに、その意味がある。説教が、ガラテヤ人への手紙4章4節の「時が満ちて」という言葉にも目を向けるのは、そのためである。人間には長く、先の見えないものに思えた時間が、神の約束の中では、キリストを待ち望む歴史としてつながっていく。

系図がアブラハムから始まり、その中心にダビデがいるという事実は、この待望が漠然とした期待ではなかったことを示している。約束は、具体的な人々と世代を通して伝えられ、捕囚の時を越えても受け継がれた。歴史を読む私たちが注目すべきなのは、誰が最後まで成功を収めたかということよりも、人間の成し遂げたものが崩れ去った後にも、何が残ったかということである。この説教は、まさにそこに神の主権と救いの約束を見いだしている。

この約束にすがるからといって、苦難の痛みまで消えてしまうわけではない。バビロン捕囚の記録は、喪失を喪失のまま記憶にとどめる。ただ、その時が系図の終わりにはならなかったという事実は、今の失敗だけで人生全体に結論を下そうとする性急さに歯止めをかける。まだ理解できない時を抱えながらも神を信頼できる根拠は、自分の楽観的な見通しよりも、神の真実さにある。

タマル・ラハブ・ルツ・バテ・シェバ――消されなかった名

時代の起伏をたどっていたまなざしは、やがて、その時代を生き抜いた人々にとどまる。イエスの系図に登場する女性たちの物語を読むと、一人の人間を、世間で貼られたレッテルだけで説明することは難しくなる。タマルの物語には、家族の責任と恥辱が絡み合っているが、最後にはユダ自身が、彼女のほうが自分より正しいと認める(創世記38章26節)。人を責めていた者が自らの過ちに向き合う場面までもが、救いの歴史に残されている。

ラハブはエリコの遊女として登場するが、ヘブル人への手紙は、偵察に来た者たちを迎え入れた彼女の信仰を記している(ヘブル11章31節)。マタイの系図では、彼女はボアズの母として記される。モアブ人の女性ルツは、ナオミの民と神を自分の民、自分の神として受け入れ、ボアズと共にダビデへと至る系譜をつなぐ。出自や過去だけで人を判断するまなざしは、彼女たちの信仰と献身を十分に読み取ることができない。

バテ・シェバを「ウリヤの妻」と呼ぶ表現は、さらに直視しがたい記憶を残している。ダビデの名の傍らには、彼が犯した罪とウリヤの死が共に置かれている。王の名誉のためには消してしまいたくなるような一節だが、その記述は、栄光の陰に隠された過ちを忘れさせない。罪人が救いの歴史に加えられたという事実を、罪そのものに問題がなかったという意味にすり替え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ある。

ここで系図を読むことは、人を読み解く練習にもなる。タマルにつきまとった恥辱だけに目を向けるなら、ユダが認めた自らの過ちを見落とす。ラハブの過去だけを見るなら、彼女が示した信仰を見落とす。ルツを異邦人という枠の中だけに押し込めれば、その信仰告白は聞こえてこない。聖書に残された名の前でしばし立ち止まることは、自分が知っているたった一つの事実で、誰かの人生全体を説明し尽くそうとしない姿勢である。

これらの名が伝える恵みは、過去を美化する免罪符とは違う。過ちを認める責任は残る一方で、出自や過ちだけを理由に人をいつまでも排除してきた境界線は揺さぶられる。救いの系譜は、人間に欠けがないことを証明するものではない。欠けのある人間を見捨てなかった神の愛を明らかにするものである。 自分を省みる悔い改めと、他者に対する謙遜が共に求められるのも、そのためである。

インマヌエルの意味――罪人のもとに来られた神

先に登場した女性たちの名を経て、系図はマリアに至る。マタイの福音書1章は、マリアが聖霊によって身ごもったことと、その事情を知らなかったヨセフが、ひそかに離縁しようとしていたことを伝えている。主の使いはヨセフに、恐れないようにと告げる。人間の理解が及ばない出来事を前に、神の言葉を受け入れる従順が求められたのである。

続く二つの名は、系図全体の意味を明らかにする。イエスは、ご自分の民をその罪から救う方であり(マタイ1章21節)、インマヌエルは、神が私たちと共におられるという意味である(マタイ1章23節)。神が共におられるという約束は、過ちに目をつぶったまま、そばにとどまってくださるというだけの意味ではない。罪と死に縛られた人間を救うために、神ご自身がその人生のただ中に来られたという宣言である。

ここで、血統の記録は、今日キリストを信じる者の人生と結びつく。この説教は、イエスにつながることを、神の民という「霊的な系図」に加えられることとして説明する。特定の家系に生まれたことや、他人より優れた経歴が、その関係を生み出すのではない。それは、信仰によってキリストを受け入れる人に開かれた、神の民としての新たな帰属である。その中では、出自や性別を優劣の基準とする態度は成り立たなくなる。

張ダビデ牧師は、この神が共におられることを、崩れた神殿の回復と結びつける。真の神殿であるキリストが来られ、キリストを受け入れた人のうちに聖霊が住まわれることによって、神と共に生きる人生が回復されるという解釈である。この視点に立つなら、救いは、他者に認められるために新しい経歴を作り上げることよりも根本的な出来事である。それは、神を迎えて共に生きる者として、私たちの内面と人生そのものが新しくされることである。

ピリピ人への手紙2章6~7節が伝える、キリストがご自身を低くされたことも、この意味をいっそう深める。主は、人間の弱さを遠くから眺めるだけではなく、しもべの姿を取って来てくださった。だからこそ、インマヌエルは、苦痛がすべて消え去った後になって初めて確かめられる慰めではない。不完全な現実のただ中に来られた神がおられるゆえに、私たちはその現実から目を背けず、救いを仰ぎ望むことができる。

恵みによって読み解く系図が、今日のまなざしを変える

この系図を読んでもなお、人を分け隔てる基準が変わらないなら、その名を知ることと福音を受け入れることの間には、まだ隔たりがあるのかもしれない。自分のことは事情を理解してほしいと願いながら、他者にはまず過去の過ちを問いただすような場合がそうだ。自分には恵みを求めながら、隣人にはその恵みを受けるにふさわしいかどうかを問う矛盾を、御言葉の前で省みなければならない。

説教の結びで示されるのは、キリスト・イエスの心を抱きなさいという勧めである(ピリピ2章5節)。自らを低くされた主に従うという告白は、誰かの出自や性別、境遇を理由に自分が設けてきた隔たりを、まず見直すよう促す。共同体に見知らぬ人が訪れたとき、その背景によって態度を決めないことや、過去の過ちだけで誰かの今を説明しないことが、その始まりとなるだろう。差別を越える愛は、遠くに掲げる標語よりも、身近な一人にどう接するかに表れる。

そのまなざしは、自分自身にも必要である。過ちを認めて正す責任と、自分を過去だけに閉じ込めない希望とを、共に握り締めることが大切だ。神の前に進み出るために、まず完全な人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としたら、消せない記憶を持つ者は、いつまでも扉の外に立ち続けることになる。しかし、マタイの福音書1章は、人間が歴史をきれいに整えた後で、ようやく救い主が来られたとは語っていない。

最初に思い浮かべた人生の記録に戻ってみよう。今、大切なのは、恥ずかしい一節をどれほどきれいに消したかということよりも、それを正直に認めながら、なおキリストを仰ぎ見ることができるかということである。イエスの系図は、人の過ちを記しながらも、人をその過ちの中に閉じ込めない恵みを示している。今日、私が消し去りたいと願った自分の人生の一節と、軽々しく裁いてしまった隣人の名を、その恵みの前に共に差し出す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

張ダビデ牧師 公式ホームページ:www.davidjang.org

马太福音第1章:耶稣的家谱为何不掩盖人的过犯 | 张大卫牧师

Pastor David Jang

若有人要记录我的一生,哪一段会是我最想请求他删去的?马太福音第1章的耶稣基督家谱,不仅记下君王的荣耀,也保留了被掳的苦难、外邦女子的名字,以及罪的痕迹。张大卫牧师(美国 Olivet University 创办人)的讲道,从这份家谱中读出神的救赎应许:即使人有过犯,这应许也从未中断。整段记录的中心,并不是一个毫无瑕疵的家族,而是那位亲自进入不完美历史之中的救主。

三个十四代:苦难中仍未中断的应许

马太将从亚伯拉罕到大卫、从大卫到被掳至巴比伦,以及从被掳之后到基督的历史,分为三个各十四代的阶段(太1:17)。君王兴起的岁月与国家覆亡的岁月,被放在同一份家谱之中。神所应许的救恩,并不是沿着一段只有繁荣的历史而来。衰败的王朝与漫长的等候,也没有从通向基督的记录中被删去。

张大卫牧师特别指出,大卫的希伯来文名字中,各辅音字母所对应的数值相加,恰好是4+6+4=14。在这篇讲道中,十四代的反复出现,强调了耶稣是以大卫子孙的身份降临的君王。讲道也将三个阶段合计的四十二代,与圣经中作为苦难象征的四十二个月联系起来,借着这一象征性的解读,阐明救恩如何经过等候而得以成就。

这些数字所指向的意义,远比重振王室的荣光更为深刻。那位拯救罪人的弥赛亚将要来到,使人与神同在的生活得以恢复。这也是讲道将这段家谱与加拉太书4章4节“及至时候满足”一同思考的缘由。在人看来漫长而茫然的岁月,在神的应许中,却延续为一段等候基督的历史。

家谱始于亚伯拉罕,而大卫位于其中一个关键位置,这表明这种等候并不是模糊的期待。应许经过具体的人物与一代又一代的传承,即使穿越被掳的岁月,也没有中断。阅读历史时,与其只关注谁成功到了最后,不如追问:当人的成就崩塌之后,究竟还有什么存留下来?这篇讲道正是在此处,让我们看见神的主权与救赎的应许。

持守这份应许,并不意味着苦难的疼痛也会被抹去。被掳至巴比伦的记录,使人如实记得失去所带来的伤痛。然而,那段岁月并没有成为家谱的终点。这一事实提醒我们,不要急于凭眼前的失败,就为整个人生下定论。即使仍有无法理解的岁月,我们依然可以信靠神;这份信靠的根据,不在于自己的乐观,而在于祂的信实。

他玛、喇合、路得、拔示巴:未被抹去的名字

当我们的目光沿着历史的曲折前行,便会停留在那些亲历这一切的人身上。读到耶稣家谱中这些女子的故事,就很难再用习惯性的标签解释一个人。他玛的故事交织着家族的责任与羞耻,但最终,犹大承认她比自己更有义(创38:26)。那个曾经定罪别人的人,终于面对自己的过错;连这样的场景,也被保留在救赎的历史之中。

喇合以耶利哥城中妓女的身份出现在圣经中,但希伯来书所记念的,是她接待探子时显出的信心(来11:31)。在马太的家谱中,她被记为波阿斯的母亲。摩押女子路得以拿俄米的民为自己的民,以拿俄米的神为自己的神,并与波阿斯一同延续了通向大卫的家系。若只凭出身与过去判断一个人,就无法充分看见她们的信心与委身。

以“乌利亚的妻子”称呼拔示巴,更留下了一段令人无法轻易回避的记忆。大卫的名字旁边,同时保留着他所犯的罪,以及乌利亚的死亡。这原本可能是为了维护君王的名誉而想要删去的部分,但这段记录使人无法忘记荣耀背后隐藏的过错。罪人参与了救赎的历史,并不意味着罪本身就可以被认可。

读到这里,阅读家谱,也成为学习如何看待人的过程。若只看见加在他玛身上的羞耻,就会忽略犹大所承认的过错;若只盯着喇合的过去,就会错过她所显出的信心;若只是把路得归入“外邦人”的类别,就听不见她的信仰告白。在圣经所保留的名字面前稍作停留,意味着我们不愿再用自己所知道的一件事,代替对他人整个人生的认识。

这些名字所传递的恩典,并不是粉饰过去、为罪开脱的凭据。承认错误的责任依然存在,但那些仅凭出身与过犯,就不断将人排斥在外的界限,也因此受到挑战。救恩的家谱并不证明人毫无瑕疵,而是彰显神的爱:祂没有放弃有瑕疵的人。 因此,省察自己的悔改,与面对他人的谦卑,缺一不可。

以马内利的含义:来到罪人身边的神

经过前面这些女子的名字,家谱最终来到马利亚。马太福音第1章记述了马利亚因圣灵而怀孕的事实,也记下了当时尚不明白这件事的约瑟,曾打算暗暗与她解除婚约。主的使者告诉约瑟,不要害怕。面对超越人理解的事情,所需要的是接纳神话语的顺服。

接着出现的两个名字,照亮了整份家谱的意义。耶稣是要将自己的百姓从罪恶里拯救出来的那一位(太1:21);以马内利的意思,则是神与我们同在(太1:23)。神应许与人同在,并不只是对人的过错视而不见,仍然留在人身边。这更是在宣告:为了拯救被罪与死亡捆绑的人,神亲自进入了他们的生活。

在这里,血统的记录与今天相信基督之人的生命连接起来。这篇讲道将人与耶稣的连接,解释为进入神子民的“属灵家谱”。这种关系,并不是由一个人出生于某个家族,或拥有比别人更出色的履历而建立的。它是一种向凭信心接受基督之人敞开的新归属。在这份归属中,以出身与性别划分高下的态度,便失去了立足之地。

张大卫牧师将这样的同在,与被毁圣殿的恢复联系起来。按照这一理解,基督作为真正的圣殿来到世上,圣灵又住在接待祂的人里面,使人与神同在的生活得以恢复。从这一角度看,救恩比为自己打造一份获得他人认可的新履历更为根本。救恩使我们的内心与生活得以更新,使我们成为迎接神住在其中、与祂一同生活的人。

腓立比书2章6至7节所述基督的降卑,也使这一意义更加深刻。主并未只是远远地看着人的软弱,而是取了奴仆的形象来到世间。因此,以马内利并不是一种要等到所有痛苦消失之后,才能得到确认的安慰。正因为神来到不完美的现实之中,我们才能不逃避现实,仍然仰望救恩。

以恩典读家谱,改变今天的眼光

如果读过这份家谱之后,我们区分人的标准仍旧没有改变,那么,知道这些名字与真正领受福音之间,或许仍有一段距离。我们一边请求别人理解自己的处境,一边却先追问他人过去的错误,就是这样的例子。对自己求恩典,却对邻舍论资格——这种矛盾,需要放在神的话语面前省察。

讲道最后所持守的劝勉,是“你们当以基督耶稣的心为心”(腓2:5)。当我们承认自己愿意跟随降卑的主,就应当先省察:是否曾因他人的出身、性别或境况,而与他们拉开距离?当一个陌生人初次来到共同体时,不因他的背景决定自己的态度;看待一个人的今天时,不只以他过去的错误为依据。这些都可以成为起点。跨越歧视的爱,并不首先体现在遥远的口号中,而是显明在我们如何对待身边的一个人。

这份眼光,也同样需要转向自己。我们既要承担承认并纠正错误的责任,也要持守不把自己永远囚禁于过去的盼望。如果必须先成为完美的人,才能来到神面前,那么,那些背负着无法抹去的记忆的人,就只能一直站在门外。然而,马太福音第1章并没有说,只有当人把历史整理得干干净净之后,救主才来到世上。

让我们再回到起初想到的那份人生记录。如今,重要的已不是把羞耻的段落删得多么干净,而是能否在诚实承认它们的同时,仍然仰望基督。耶稣的家谱向我们显明一种恩典:它保留了人的过犯,却不将人永远禁锢在过犯之中。今天,我能否将自己曾想抹去的那段人生,与那个曾被我轻易论断的邻舍的名字,一同放在这份恩典面前?

张大卫官方网站:www.davidjang.org

Matthew 1: Why Jesus’ Genealogy Does Not Hide Human Failings | Pastor David Jang

If someone were to write the story of my life, which part would I first ask them to leave out? The genealogy of Jesus Christ in Matthew 1 preserves not only the glory of kings but also the suffering of exile, the presence of Gentile women, and the traces of human sin. In his sermon, Pastor David Jang, founder of Olivet University in the United States, reads this genealogy as a testimony to God’s promise of salvation—a promise that remained unbroken despite human failings. At the heart of this record is not an unblemished family line, but the Savior who personally entered an imperfect human history.

Three Sets of Fourteen Generations: A Promise Sustained Through Suffering

Matthew presents the genealogy in three sections of fourteen generations: from Abraham to David, from David to the Babylonian exile, and from the exile to Christ (Matthew 1:17). The rise of a kingdom and the loss of a nation appear within the same family line. God’s promised salvation did not come through an uninterrupted history of prosperity. A fallen dynasty and long years of waiting are not omitted from the record that leads to Christ.

Pastor David Jang draws attention to the numerical values of the consonants in David’s Hebrew name, which add up to 4 + 6 + 4 = 14. In this sermon, the repetition of fourteen generations emphasizes the message that Jesus came as the King descended from David. He also offers a symbolic interpretation connecting the forty-two generations represented by the three sections with the biblical image of forty-two months as a period of suffering. Through this connection, he traces the movement of salvation through waiting toward fulfillment.

These numbers point to something deeper than the restoration of royal glory. Their significance lies in the coming of the Messiah to save sinners and in the restoration of life with God. This is why the sermon also considers the words “when the fullness of time had come” in Galatians 4:4. What seemed long and bleak from a human perspective remained, within God’s promise, part of a history awaiting Christ.

The fact that the genealogy begins with Abraham and places David at its center shows that this waiting was not a vague expectation. The promise passed through particular people and generations, continuing even through the years of exile. As we read this history, the more important question is not who remained successful to the end, but what endured after human achievements collapsed. It is precisely there that the sermon directs our attention to God’s sovereignty and His promise of salvation.

Yet holding fast to this promise does not erase the pain of suffering. The record of the Babylonian exile preserves the reality of loss without disguising it. Nevertheless, the fact that this period did not mark the end of the genealogy calls us to stop hastily judging the whole of our lives by our present failures. Our reason for trusting God, even while living through a season we do not yet understand, rests more in His faithfulness than in our own optimism.

Tamar, Rahab, Ruth, and Bathsheba: Names That Were Not Erased

Having followed the turns of history, our attention now rests on the people who lived through them. Reading the stories of the women in Jesus’ genealogy makes it difficult to reduce a person to a familiar label. Tamar’s story is entangled with family responsibility and shame, yet Judah ultimately acknowledges that she is more righteous than he is (Genesis 38:26). The history of salvation preserves even the moment when someone who had condemned another confronts his own wrongdoing.

Rahab appears as a prostitute in Jericho, but Hebrews remembers the faith with which she welcomed the spies (Hebrews 11:31). Matthew records her as the mother of Boaz. Ruth, a Moabite woman, embraces Naomi’s people as her own and Naomi’s God as her God. Together with Boaz, she continues the family line leading to David. To judge these women solely by their origins or their past is to fail to appreciate the fullness of their faith and devotion.

The description of Bathsheba as “the wife of Uriah” preserves an even more uncomfortable memory. Alongside David’s name stand the sin he committed and the death of Uriah. This is the sort of detail one might wish to erase to protect a king’s reputation, yet the record refuses to let us forget the wrongdoing concealed behind his glory. The fact that sinners participated in the history of salvation cannot be turned into a claim that the sin itself was acceptable.

At this point, reading the genealogy becomes an exercise in learning to understand people. If we see only the shame associated with Tamar, we miss the wrongdoing Judah acknowledged. If we see only Rahab’s past, we miss the faith she demonstrated. If we confine Ruth to the category of a foreigner, we cannot hear her confession of faith. To pause before the names Scripture has preserved is to resist using a single fact we know about someone as a substitute for the whole story of that person’s life.

The grace conveyed through these names is not a license to dress up the past as something beautiful. The responsibility to acknowledge wrongdoing remains, even as the barriers that have continually excluded people because of their origins and failings are challenged. The genealogy of salvation does not prove that human beings are without fault. It reveals the love of God, who did not give up on flawed humanity. This is why repentance that examines our own lives must go hand in hand with humility toward others.

The Meaning of Immanuel: God Comes to Sinners

After the women who appear earlier in the record, the genealogy reaches Mary. Matthew 1 tells us that Mary conceived through the Holy Spirit and that Joseph, who did not yet know this, intended to end their relationship quietly. An angel of the Lord tells Joseph not to be afraid. Faced with an event beyond human understanding, he is called to receive God’s word in obedience.

The two names that follow illuminate the meaning of the entire genealogy. Jesus is the One who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Matthew 1:21), while Immanuel means that God is with us (Matthew 1:23). God’s promise to be with us is not a promise simply to overlook our wrongdoing and remain by our side. It declares that He has personally entered human life to save those held captive by sin and death.

Here, the record of a family line connects with the lives of those who believe in Christ today. The sermon describes being joined to Jesus as entering the “spiritual genealogy” of God’s people. Neither birth into a particular family nor a more impressive record than someone else’s can establish that relationship. It is a new belonging opened to those who receive Christ in faith. Within it, there is no place for attitudes that treat a person’s origins or gender as grounds for superiority or inferiority.

Pastor David Jang connects this divine presence with the restoration of the ruined temple. In this interpretation, Christ comes as the true temple, and life with God is restored as the Holy Spirit dwells within those who receive Him. From this perspective, salvation is more fundamental than assembling a new set of credentials to gain the approval of others. It is the renewal of our inner being and our lives, so that we become people who live in the presence of God.

Christ’s self-humbling, described in Philippians 2:6–7, deepens this meaning. The Lord did not merely observe human frailty from a distance; He came in the form of a servant. Immanuel, therefore, is not a comfort we can recognize only after all suffering has disappeared. Because God has come into the very midst of our imperfect reality, we can look toward salvation without turning away from that reality.

Reading the Genealogy Through Grace Changes How We See Life Today

If we can read this genealogy and still use the same standards to divide people, there may remain a gap between knowing the names and receiving the gospel. Consider how we ask others to understand our circumstances while beginning our assessment of them with their past mistakes. Before God’s word, we must examine the contradiction of seeking grace for ourselves while demanding that our neighbors prove their worthiness.

The sermon’s final exhortation is to have the mind of Christ Jesus (Philippians 2:5). To confess that we follow the Lord who humbled Himself is to reconsider the distance we have placed between ourselves and others because of their origins, gender, or circumstances. A beginning might be to refuse to let a newcomer’s background determine how we treat them in our community, or to stop defining someone’s present solely by their past mistakes. Love that overcomes discrimination is revealed less in distant slogans than in the way we treat the person close at hand.

This perspective is also necessary in how we see ourselves. We must hold together the responsibility to acknowledge and correct our wrongdoing and the hope that refuses to imprison us in our past. If we must become perfect before we can approach God, anyone carrying memories that cannot be erased will remain forever outside the door. Yet Matthew 1 does not say that the Savior came only after humanity had cleaned up its history.

Let us return to the record of our lives that we imagined at the beginning. The question now is not how thoroughly we have erased the shameful parts, but whether we can acknowledge them honestly and still look to Christ. The genealogy of Jesus shows us a grace that leaves human failings in the record without confining people to them. Today, can I place before that grace both the part of my life I wished to erase and the name of the neighbor I was too quick to judge?

David Jang Official Website: www.davidjang.org

Matthieu 1 : pourquoi la généalogie de Jésus ne cache pas les fautes humaines | Pasteur David Jang

Si quelqu’un devait raconter ma vie, quel passage lui demanderais-je de supprimer en premier ? La généalogie de Jésus-Christ, en Matthieu 1, conserve non seulement la gloire des rois, mais aussi l’épreuve de l’exil, la présence de femmes étrangères et les traces du péché. Dans sa prédication, le pasteur David Jang, fondateur d’Olivet University aux États-Unis, y discerne une promesse de salut que les fautes humaines n’ont pas interrompue. Au centre de ce récit ne se trouve pas une famille irréprochable, mais le Sauveur qui est entré lui-même dans une histoire imparfaite.

Trois fois quatorze générations : une promesse qui traverse l’épreuve

Matthieu présente trois périodes de quatorze générations : d’Abraham à David, de David à la déportation à Babylone, puis de la déportation au Christ (Mt 1.17). Le temps où la royauté s’établit et celui où le peuple perd son pays figurent dans une seule et même généalogie. Le salut promis par Dieu n’est pas venu au fil d’une histoire faite uniquement de prospérité. L’effondrement de la dynastie et la longue attente ont eux aussi leur place dans le récit qui conduit au Christ.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que les valeurs numériques des consonnes composant le nom hébreu de David donnent la somme suivante : 4 + 6 + 4 = 14. Dans cette prédication, la répétition des quatorze générations met en relief le message selon lequel Jésus est le roi venu comme descendant de David. Le pasteur propose également une lecture symbolique reliant le total de quarante-deux générations aux quarante-deux mois bibliques, compris comme une image de l’épreuve. Ce rapprochement lui permet de décrire le mouvement du salut qui s’accomplit au terme de l’attente.

Ces nombres orientent le regard vers une réalité plus profonde que le rétablissement de la splendeur d’une maison royale : la venue du Messie qui sauve les pécheurs et la restauration d’une vie avec Dieu. C’est pourquoi la prédication rapproche ce passage de cette parole de Galates 4.4 : « lorsque les temps ont été accomplis ». Ce qui semblait aux êtres humains un temps interminable et sans issue devient, dans la promesse de Dieu, une histoire tendue vers la venue du Christ.

Le fait que la généalogie commence avec Abraham et accorde une place centrale à David montre que cette attente n’était pas une espérance vague. La promesse a été transmise à travers des personnes et des générations bien réelles ; elle s’est poursuivie au-delà même du temps de l’exil. En lisant l’histoire, la question essentielle n’est pas tant de savoir qui a réussi jusqu’au bout que de discerner ce qui demeure lorsque les accomplissements humains s’effondrent. C’est précisément là que cette prédication situe la souveraineté de Dieu et sa promesse de salut.

S’attacher à cette promesse n’efface pourtant pas la douleur de l’épreuve. La mention de la déportation à Babylone nous invite à reconnaître la perte pour ce qu’elle est, sans l’édulcorer. Mais le fait que cette période ne constitue pas le dernier chapitre de la généalogie nous retient de juger trop vite toute notre vie à partir d’un échec présent. Ce qui nous permet de faire confiance à Dieu, même au milieu de temps que nous ne comprenons pas encore, repose moins sur notre optimisme que sur sa fidélité.

Tamar, Rahab, Ruth, Bath-Shéba : des noms qui n’ont pas été effacés

Après avoir suivi les vicissitudes de l’histoire, notre regard s’arrête maintenant sur les personnes qui les ont traversées. À lire les récits des femmes mentionnées dans la généalogie de Jésus, il devient difficile de réduire une personne à une étiquette toute faite. Dans l’histoire de Tamar, les responsabilités familiales et la honte s’entremêlent ; mais Juda finit par reconnaître qu’elle s’est montrée plus juste que lui (Gn 38.26). L’histoire du salut conserve ainsi la trace du moment où celui qui condamnait autrui se retrouve face à sa propre faute.

Rahab apparaît comme une prostituée de Jéricho, mais l’épître aux Hébreux retient la foi avec laquelle elle accueillit les espions (Hé 11.31). Dans la généalogie de Matthieu, elle est présentée comme la mère de Boaz. Ruth, la Moabite, fait du peuple et du Dieu de Noémi son propre peuple et son propre Dieu ; avec Boaz, elle prend place dans la lignée qui conduit à David. Un regard qui juge les personnes uniquement d’après leur origine et leur passé ne sait pas reconnaître pleinement leur foi ni leur dévouement.

Désigner Bath-Shéba comme « la femme d’Urie » ravive un souvenir plus dérangeant encore. Au nom de David restent associés le péché qu’il a commis et la mort d’Urie. On aurait pu être tenté d’effacer ce passage pour préserver l’honneur du roi ; le texte empêche pourtant d’oublier les fautes que sa gloire pourrait masquer. Voilà pourquoi le fait que des pécheurs aient pris part à l’histoire du salut ne saurait signifier que le péché lui-même soit acceptable.

À cet endroit, lire la généalogie devient un apprentissage du regard porté sur autrui. Si nous ne voyons que la honte associée à Tamar, nous passons à côté de la faute reconnue par Juda ; si nous ne regardons que le passé de Rahab, nous manquons la foi dont elle a fait preuve. Si nous enfermons Ruth dans la seule catégorie de l’étrangère, nous n’entendons plus sa confession de foi. S’arrêter un instant devant ces noms conservés par l’Écriture, c’est refuser de laisser un seul fait connu résumer à lui seul la vie entière d’une personne.

La grâce dont témoignent ces noms n’est pas un blanc-seing qui embellirait le passé. La responsabilité de reconnaître ses fautes demeure, tandis que vacillent les frontières qui excluaient indéfiniment les personnes en raison de leur origine et de leurs défaillances. La généalogie du salut ne démontre pas que les êtres humains sont irréprochables. Elle révèle l’amour de Dieu, qui ne les a pas abandonnés malgré leurs fautes. C’est pourquoi la repentance qui nous conduit à nous examiner et l’humilité envers autrui doivent aller de pair.

Emmanuel : Dieu venu à la rencontre des pécheurs

Après ces femmes, la généalogie conduit à Marie. Matthieu 1 rapporte qu’elle conçut par le Saint-Esprit et que Joseph, qui l’ignorait, envisageait de rompre discrètement leurs fiançailles. L’ange du Seigneur lui dit de ne pas avoir peur. Devant un événement qui dépasse l’entendement humain, il est appelé à une obéissance qui accueille la parole de Dieu.

Les deux noms qui suivent éclairent le sens de toute la généalogie. Jésus est celui qui sauvera son peuple de ses péchés (Mt 1.21), et Emmanuel signifie « Dieu avec nous » (Mt 1.23). La promesse de la présence de Dieu ne veut pas simplement dire qu’il demeure à nos côtés en faisant semblant de ne pas voir nos fautes. Elle proclame qu’il est lui-même entré dans la vie humaine pour sauver ceux que le péché et la mort tenaient captifs.

À ce point du récit, l’histoire d’une lignée rejoint la vie de ceux qui croient aujourd’hui au Christ. Cette prédication présente le fait d’être uni à Jésus comme l’entrée dans la « généalogie spirituelle » du peuple de Dieu. Ni l’appartenance à une famille particulière ni un parcours plus honorable que celui des autres ne créent ce lien. Il s’agit d’une nouvelle appartenance, ouverte à quiconque accueille le Christ par la foi. En son sein, toute attitude qui fait de l’origine ou du sexe un critère de supériorité ou d’infériorité perd sa raison d’être.

Le pasteur David Jang relie cette présence de Dieu à la restauration du Temple détruit. Selon cette lecture, le Christ vient comme le véritable Temple et, par la présence du Saint-Esprit en ceux qui l’accueillent, la vie avec Dieu est restaurée. Dans cette perspective, le salut est bien plus fondamental que l’acquisition de nouveaux titres de mérite destinés à obtenir la reconnaissance des autres. Il renouvelle notre être intérieur et notre existence, afin que nous vivions en accueillant Dieu dans notre vie.

L’abaissement du Christ décrit en Philippiens 2.6-7 approfondit encore ce sens. Le Seigneur ne s’est pas contenté de contempler de loin la fragilité humaine : il est venu en prenant la condition de serviteur. Ainsi, Emmanuel n’est pas une consolation que l’on ne pourrait reconnaître qu’une fois toute souffrance disparue. Parce que Dieu est venu au cœur même d’une réalité imparfaite, nous pouvons espérer le salut sans détourner les yeux de cette réalité.

Lire la généalogie à la lumière de la grâce transforme notre regard

Si, après avoir lu cette généalogie, nos critères pour classer les personnes restent inchangés, un écart peut subsister entre la connaissance de ces noms et l’accueil de l’Évangile. C’est le cas lorsque nous demandons que l’on comprenne notre situation tout en commençant par interroger les fautes passées des autres. Devant la Parole, il nous faut examiner cette contradiction : réclamer la grâce pour nous-mêmes, mais exiger de notre prochain qu’il prouve qu’il la mérite.

L’exhortation sur laquelle s’achève la prédication est celle d’adopter les dispositions du Christ Jésus (Ph 2.5). Confesser que nous suivons le Seigneur qui s’est abaissé nous invite à reconsidérer d’abord les distances que nous avons instaurées en raison de l’origine, du sexe ou de la situation d’une personne. Ne pas laisser le milieu d’origine d’un nouveau venu déterminer notre accueil dans la communauté, ne pas résumer la vie présente de quelqu’un à ses fautes d’hier : voilà par où nous pouvons commencer. L’amour qui dépasse les discriminations se révèle moins dans des slogans que dans notre manière de traiter la personne qui se trouve tout près de nous.

Ce regard, nous devons aussi le porter sur nous-mêmes. Il nous faut tenir ensemble la responsabilité de reconnaître et de réparer nos fautes, et l’espérance qui nous empêche de rester enfermés dans notre passé. S’il fallait d’abord devenir parfait pour s’approcher de Dieu, ceux qui portent des souvenirs impossibles à effacer resteraient à jamais sur le seuil. Mais Matthieu 1 ne dit pas que le Sauveur a attendu que les êtres humains aient effacé toutes les taches de leur histoire avant de venir.

Revenons au récit de notre vie évoqué au début. L’essentiel n’est plus de savoir avec quel soin nous en avons effacé les passages honteux, mais si nous pouvons les reconnaître honnêtement tout en gardant les yeux tournés vers le Christ. La généalogie de Jésus révèle une grâce qui ne dissimule pas les fautes, sans pour autant y enfermer les personnes. Aujourd’hui, puis-je déposer ensemble devant cette grâce ce passage de ma vie que je voulais supprimer et le nom de ce prochain que j’ai jugé trop vite ?

Site officiel de David Jang : www.davidjang.org

마태복음 1장, 예수 족보가 허물을 감추지 않는 이유 | 장재형 목사

누군가 내 삶을 기록한다면, 가장 먼저 빼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대목은 무엇일까. 마태복음 1장의 예수 그리스도 족보는 왕의 영광과 함께 포로의 고난, 이방 여인과 죄의 흔적까지 남긴다. 장재형목사(미국 Olivet University 설립)의 설교는 이 족보에서 인간의 허물에도 끊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읽는다. 기록의 중심에는 흠 없는 가문이 아니라, 불완전한 역사 속으로 친히 들어오신 구원자가 있다.

열네 대씩 세 번, 고난 속에서도 이어진 약속

마태는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다윗에서 바벨론 포로까지, 포로 이후부터 그리스도까지를 열네 대씩 세 구간으로 제시한다(마 1:17). 왕이 세워진 시간과 나라를 잃은 시간이 같은 계보 안에 놓여 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은 번영만 이어지는 역사를 통해 오지 않았다. 무너진 왕조와 긴 기다림도 그리스도에게 이르는 기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장재형 목사는 다윗의 히브리어 이름을 이루는 자음의 수적 가치를 더하면 4+6+4=14가 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설교에서 열네 대의 반복은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왕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또한 세 구간을 합한 마흔두 대를 성경의 마흔두 달이라는 고난의 표상과 연결하는 상징적 해석을 통해, 기다림을 지나 성취되는 구원의 흐름을 설명한다. 

이 숫자들이 향하는 곳은 왕가의 영광을 되찾는 일보다 깊다. 죄인을 구원하실 메시아가 오시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회복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설교가 갈라디아서 4장 4절의 ‘때가 차매’라는 말씀을 함께 바라보는 까닭이다. 인간에게는 길고 막막했던 시간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역사로 이어진다. 

계보의 출발이 아브라함이고 그 한가운데 다윗이 있다는 사실은, 이 기다림이 막연한 기대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약속은 구체적인 사람과 세대를 거쳐 전해졌고, 포로의 시간을 지나서도 이어졌다. 우리가 역사를 읽으며 주목해야 할 것은 누가 끝까지 성공했는가보다, 인간의 성취가 무너진 뒤에도 무엇이 남았는가이다. 이 설교는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약속을 놓는다.

이 약속을 붙든다고 고난의 아픔까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바벨론 포로라는 기록은 상실을 상실 그대로 기억하게 한다. 다만 그 시간이 계보의 마지막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금의 실패로 삶 전체를 판정하려는 성급함을 멈추게 한다. 아직 이해하지 못한 시간을 품고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는 자신의 낙관성보다 그분의 신실하심에 있다.

다말·라합·룻·밧세바, 지워지지 않은 이름들

시간의 굴곡을 따라가던 시선은 이제 그 시간을 살아 낸 사람들에게 머문다. 예수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사연을 읽으면, 한 사람을 익숙한 낙인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다말의 이야기에는 가족의 책임과 수치가 얽혀 있지만, 끝내 유다는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고 인정한다(창 38:26). 정죄하던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직면하는 장면까지 구원의 역사에 남아 있다.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으로 등장하지만, 히브리서는 정탐꾼을 영접한 그의 믿음을 기억한다(히 11:31). 마태의 계보에서 그는 보아스의 어머니로 기록된다. 모압 여인 룻은 나오미의 백성과 하나님을 자신의 백성과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며, 보아스와 함께 다윗에게 이르는 계보를 잇는다. 출신과 과거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시선은 이들의 믿음과 헌신을 충분히 읽어 내지 못한다.

밧세바를 ‘우리야의 아내’라고 부르는 표현은 더욱 불편한 기억을 남긴다. 다윗의 이름 곁에는 그가 저지른 죄와 우리야의 죽음이 함께 놓여 있다. 왕의 명예를 위해 지우고 싶을 법한 대목이지만, 그 기록은 영광 뒤에 가려진 잘못을 잊지 않게 한다. 죄인이 구원의 역사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죄 자체가 괜찮았다는 뜻으로 바꿀 수 없는 이유다. 

이 대목에서 족보를 읽는 일은 사람을 읽는 연습이 된다. 다말에게 붙은 수치만 바라보면 유다가 인정한 잘못을 놓치고, 라합의 과거만 바라보면 그가 보인 믿음을 놓친다. 룻을 이방인이라는 범주 안에만 두면 그의 신앙 고백은 들리지 않는다. 성경이 남긴 이름 앞에서 잠시 멈추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지 사실로 누군가의 삶 전체를 대신 설명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이 이름들이 전하는 은혜는 과거를 아름답게 꾸미는 면죄부와 다르다. 잘못을 인정할 책임은 남고, 사람을 출신과 허물만으로 끝없이 밀어내던 경계는 흔들린다. 구원의 계보는 인간의 흠 없음을 증명하지 않는다. 흠 있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다. 자신을 돌아보는 회개와 다른 이를 향한 겸손이 함께 필요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임마누엘의 뜻, 죄인을 찾아오신 하나님

앞선 여인들의 이름을 지나 계보는 마리아에게 이른다. 마태복음 1장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과, 이를 알지 못한 요셉이 조용히 관계를 정리하려 했던 상황을 전한다. 주의 사자는 요셉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일러 준다. 인간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사건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종이 요청된 것이다.

이어지는 두 이름은 족보 전체의 의미를 밝혀 준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며(마 1:21),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마 1:23).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약속은 잘못을 모른 척한 채 곁에 머문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죄와 죽음에 매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그 삶 속으로 오셨다는 선언이다. 

여기서 혈통의 기록은 오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삶과 연결된다. 이 설교는 예수께 연결되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영적 족보’ 안에 들어가는 일로 설명한다. 특정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나 남보다 나은 이력이 그 관계를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열리는 새로운 소속이며, 그 안에서 출신과 성별을 우열의 기준으로 삼던 태도는 설 자리를 잃는다. 

장재형 목사는 이 함께하심을 무너진 성전의 회복과 연결한다. 참성전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그분을 영접한 사람 안에 성령이 거하심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회복된다는 해석이다. 이 관점에서 구원은 남에게 인정받을 새 이력을 만드는 일보다 근본적이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존재로 우리의 내면과 삶이 새로워지는 일이다. 

빌립보서 2장 6~7절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도 이 의미를 깊게 한다. 주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멀리서 바라보는 데 머물지 않고 종의 형체로 오셨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은 고통이 모두 사라진 뒤에야 확인할 수 있는 위로가 아니다. 불완전한 현실 한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그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구원을 바라볼 수 있다.

은혜로 읽은 족보가 오늘의 시선을 바꾼다

이 족보를 읽고도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그대로라면, 그 이름들을 아는 것과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 거리가 남아 있을 수 있다. 나에게는 사정을 이해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과거의 잘못부터 묻는 일이 그렇다. 자신을 향해서는 은혜를 구하고 이웃을 향해서는 자격을 따지는 모순을 말씀 앞에서 살펴야 한다.

설교가 마지막에 붙드는 권면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이다(빌 2:5). 낮아지신 주님을 따른다는 고백은 누군가의 출신과 성별, 형편을 이유로 세운 거리부터 돌아보게 한다. 공동체에 낯선 사람이 찾아왔을 때 그의 배경으로 태도를 정하지 않는 일, 지난 잘못만으로 누군가의 오늘을 설명하지 않는 일이 그 시작일 수 있다. 차별을 넘는 사랑은 멀리 있는 구호보다 가까이 있는 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그 시선은 자신에게도 필요하다.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을 책임과, 자신을 과거에만 가두지 않는 소망을 함께 붙들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먼저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 지울 수 없는 기억을 가진 사람은 끝내 문밖에 서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1장은 인간이 역사를 깨끗하게 정리한 뒤에야 구원자가 오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처음 떠올렸던 삶의 기록으로 돌아가 보자. 이제 중요한 것은 부끄러운 대목을 얼마나 말끔하게 지웠는가보다,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는가이다. 예수의 족보는 허물을 남겨 두되 사람을 허물 안에 가두지는 않는 은혜를 보여 준다. 오늘 내가 지워 버리고 싶었던 내 삶의 한 대목과, 쉽게 판단했던 이웃의 이름을 그 은혜 앞에 함께 놓을 수 있을까.

장재형 목사, 에베소서 4장이 말하는 교회의 성숙을 이끄는 사랑

장재형 목사
장재형 목사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소년은 한 송이 장미에 물을 주고, 바람을 막아 주고, 유리 덮개를 씌운다. 사랑은 꽃을 알아보는 눈에 머물지 않고, 그 곁을 지키는 손길이 된다. 소년이 매일 아침 장미를 들여다보고 벌레를 잡아 주고 저녁이면 유리 덮개를 씌우는 그 반복된 동작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에 가깝다. 장재형 목사(미국 Olivet University 설립)의 에베소서 4장 설교는 교회의 성숙 역시 서로를 돌보고 세우는 사랑과 떨어져 있지 않음을 일깨운다. 공동체의 크기는 눈에 보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이 자라나는 깊이는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숫자로 셀 수 있는 성장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성숙은 종종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교회가 몇 명이 모이는가는 누구나 셀 수 있지만, 그 안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자랐는가는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설교는 규모의 언어가 아니라 관계의 언어로 성숙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은사에 하나의 은혜가 흐른다

교회의 하나 됨은 모든 사람이 같은 능력을 갖추고 같은 일을 하는 상태가 아니다. 설교는 그 근원을 삼위 하나님에게서 찾고,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중심에 놓는다. 서로 다른 지체들이 한 몸에 속한다는 사실은 차이를 없애라는 요구가 아니라, 그 차이로 서로를 섬기라는 부름이다. 은혜는 사람을 같은 모양으로 깎아 내는 대신 각자의 은사가 공동체의 유익을 향하도록 이끈다. 연합의 출발이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주님께 있다는 사실은, 서로를 향한 존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탕을 놓는다.

이 바탕이 흔들리면 공동체는 쉽게 비교와 경쟁의 언어로 되돌아간다. 누구의 은사가 더 눈에 띄는가, 누구의 자리가 더 중요해 보이는가를 따지기 시작하면 몸의 지체라는 자각은 흐려진다. 반대로 연합의 출발점을 주님께 두면, 서로 다른 은사는 위협이 아니라 선물로 다가온다.

에베소서 4장 12절에서 은사의 목적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봉사의 일을 감당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은사는 영적 우월함을 증명하는 자격증이 아니라 맡겨진 책임에 가깝다.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만 높이고 다른 지체의 몫을 하찮게 여긴다면, 은사를 자랑할수록 정작 그 은사가 세워야 할 몸은 약해진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와 함께, 그것으로 누가 도움을 얻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일이 각자 원하는 방향으로 흩어지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모든 지체가 함께 향하는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다. 내게 없는 은사를 가진 사람을 경쟁 상대가 아니라 필요한 지체로 바라볼 때, 차이는 불편함을 넘어 감사의 이유가 된다. 나의 몫을 감당하면서 다른 이의 수고를 귀히 여기는 마음에서 하나 됨은 실제 관계의 모습을 얻는다.

교회를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의 성장을 혼자만의 성취로 소유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받은 도움이 나를 세웠듯, 나의 수고도 다른 이를 세우는 데 쓰여야 한다. 성숙한 믿음은 자신이 얼마나 자랐는지만이 아니라, 곁의 사람을 얼마나 자라게 하는지도 돌아본다. 이 물음은 편하지 않다. 자신의 성장에만 몰두하던 시선을 옆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앎은 사랑을 배운다

에베소서 4장 13절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이 하나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응답이다. 갈라디아서 3장을 따라 이 설교는 믿음으로 구원의 문턱을 넘고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설명한다. 앎은 그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삶에 체화하는 과정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결단과 그 복음의 의미를 알아 가는 배움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앎에는 관계의 깊이가 담겨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설명을 많이 기억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며 닮아 가는 인격적 교제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랑을 설명하는 말이 정교해졌는데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거칠다면, 배운 진리가 아직 삶에 충분히 스며들지 못한 것은 아닌지 살필 필요가 있다. 신학적 통찰은 타인을 판단하는 말에서보다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는 태도에서 깊어진다.

이 구분은 미묘하지만 중요하다. 사랑에 대해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것과 실제로 누군가를 참아 주고 섬기는 것은 다른 능력이기 때문이다. 앎이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앎은 아직 절반의 여정만 지난 셈이다.

믿음을 내세워 배움을 멈추는 것도, 지식을 앞세워 믿음의 결단을 비워 두는 것도 성숙의 길은 아니다. 설교는 지식 없는 믿음이 맹목과 피상성에 머물 수 있고, 믿음 없는 지식이 공허한 논쟁으로 기울 수 있음을 경계한다. 이 둘이 갈라지면 신앙은 한쪽으로 기운다. 믿는 진리를 배우고, 배운 진리대로 살아가려는 순종이 함께 필요하다.

그래서 성경과 교리를 공부하는 일은 예배와 기도, 성례의 자리와 연결된다. 머리로 이해한 말씀이 성령의 역사 안에서 삶의 지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이 부분적인 앎 너머의 온전한 앎을 바라보듯, 오늘의 배움에는 겸손과 소망이 함께 놓여 있다. 성경 묵상은 다 안다는 자신감을 굳히는 시간이 아니라, 아직 더 알아야 할 사랑 앞에 자신을 여는 시간이 된다.

흔들리는 풍조 앞에서 믿음은 뿌리를 내린다

이러한 성장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설교가 마태복음 13장의 겨자씨와 누룩을 통해 바라보는 교회는 점진적으로 자라고 깊어지는 생명체다. 눈에 띄는 규모의 변화만으로 그 생명의 상태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성령의 내적 역사와 믿음의 순종, 공동체의 연합이 함께할 때 성장은 성숙을 향해 나아간다.

히브리서 5장 12~14절의 젖과 단단한 음식은 그 여정에 필요한 돌봄과 책임을 보여 준다. 기초 단계에 있는 이에게는 기초를 세워 주는 가르침이 필요하고, 자라난 이에게는 배운 말씀을 봉사와 섬김으로 옮기는 실천이 따른다. 오랜 신앙 경력도 그 자체로 성숙을 보증하지 않는다. 신앙의 시간이 쌓였다면, 이제 다른 사람을 돌보고 세울 수 있는지도 함께 돌아보게 된다.

이 차이를 헤아린다는 것은 누가 앞섰는지 서열을 매기는 일과 다르다. 아직 기초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그에 맞는 가르침을, 다른 이를 돌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책임을 맡기는 일이다. 모두에게 같은 모습을 요구하기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자라도록 돕는 것이 공동체의 돌봄이다. 기다림과 권면이 함께할 때, 성장의 속도가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성숙의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성숙에는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하는 힘도 포함된다. 에베소서 4장 14절의 어린아이는 이 문맥에서 순수함보다 교묘한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미성숙을 가리킨다. 설교는 인터넷과 SNS에 떠도는 잘못된 가르침, 성공과 부를 믿음의 열매로 지나치게 포장하는 말을 경계한다. 그럴듯하게 들리거나 놀라운 현상이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진리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성공과 부가 믿음의 깊이를 대신하는 잣대가 되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방향은 흐려진다. 중요한 것은 가르침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들리는가가 아니라, 그 말이 말씀의 진리에 서 있는가이다. 설교가 영적 분별을 교회론과 연결하는 까닭은 거짓을 가려내는 목적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지키고 세우는 데 있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위해서는 무엇을 믿는지 분명하게 배우는 시간이 필요하다. 성경 연구와 교리 교육, 교회의 신앙고백을 익히는 일은 믿음의 뿌리를 말씀에 내리게 한다. 여기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와 서로를 점검하며 권면하는 공동체가 함께해야 한다. 분별은 혼자 옳다는 확신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도 말씀 앞에서 살피는 태도를 포함한다.

사랑으로 이어진 마디마다 소망이 자란다

그러나 분별력이 있다는 이유로 사랑을 뒤로 미룰 수는 없다. 에베소서 4장 15~16절이 보여 주는 성장의 방식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고, 각 마디가 도움을 주고받으며 연결되는 것이다. 진리를 굳게 붙드는 일과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따로 놓인 과제가 아니다. 사랑이 빠진 교회 활동은 많아질수록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공허한 소리로 남을 수 있다.

설교는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들이 연결되고 힘줄과 살이 돋아나 큰 군대로 일어서는 장면을 교회의 연합과 함께 읽는다. 흩어진 뼈들의 수만 늘어난다고 살아 있는 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맞닿고 연결되어야 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일어서야 한다. 이 장면은 공동체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그 사람들이 사랑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 사이의 거리를 돌아보게 한다.

그 거리는 일상의 작은 말과 태도에서 좁혀진다. 서로를 배려하고 온유와 겸손으로 대하는 일은 교회의 외양을 꾸미는 예절에 그치지 않는다. 몸의 마디를 돌보듯 관계를 돌보는 실천이며, 알고 있는 사랑을 실제로 살아 내는 순종이다. 이러한 사랑은 공동체가 외부의 갈등 앞에서도 서로를 붙드는 내적인 힘이 된다. 그렇게 자란 형제애는 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향한 섬김으로 흘러가야 한다.

장재형 목사가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함께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교회는 현재의 모습에 머물도록 부름받은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완성을 향해 자라가는 공동체다. 설교가 교회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전위대’로 부를 때, 그 부름은 사랑의 실천과 떨어져 있지 않다. 미래의 완성을 바라보는 믿음은 오늘 서로를 세우는 책임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말씀을 오래 들었다는 기억만으로 오늘의 성숙을 대신할 수는 없다. 내 안에 쌓인 앎이 관계를 살리는 사랑으로 흘러가는지, 내가 받은 은혜가 누군가를 돕는 손길이 되고 있는지 돌아볼 때다. 교회의 성숙을 바라는 나의 마음은, 오늘 내 곁의 한 사람을 대하는 말과 태도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그 대답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오늘 하루의 작은 말 한마디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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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걷는 부활 신앙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명작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평생 동안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일처럼 까마득히 밀어 두었던 죽음이라는 무거운 명제가 어느 날 갑자기 한 인간의 가장 가까운 생생한 현실로 들이닥치는 절박한 순간을 깊이 있게 응시합니다. 죽음은 삶의 평온한 순간에는 한낱 멀리 있는 철학적 주제나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하지만, 내 집 문앞에 당장 다가오는 순간 인간이 한평생 땀 흘려 쌓아 올린 모든 세속적 확신과 안전한 질서를 한꺼번에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가장 근본적이고 엄중한 질문이 됩니다. 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의 강해 설교가 깊이 있게 붙드는 자리도 바로 이 절망의 지점입니다. 칠흑 같은 죽음의 공포와 허무함 속에 가둔 채 신음하는 인간을 향해, 복음은 그저 막연하고 상투적인 위로나 감상적인 다독임으로 다가오지 않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찬란하고 단호한 구원의 선포로 다가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들리는 부활의 복음

현대 문명이 자랑하는 첨단 과학과 의학의 발전이 우리의 삶을 이전보다 훨씬 안전하고 풍요롭게 만들었다는 세속적 믿음은, 갑작스러운 재난이나 뜻하지 않은 불치병의 위기 앞에서 너무나 손쉽게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평소 일상의 바쁨 속에서 사람들은 죽음을 자신과는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남의 일처럼 여기며 살아가지만, 예고 없이 찾아오는 생명의 위기는 죽음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정면 과제임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바로 그 비극의 순간, 인간의 영혼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 뜨겁게 솟구쳐 오르는 것은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간절한 생존의 갈망이며, 이 아픈 갈망은 피조물인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의 참된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금 절박하게 묻게 만듭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두려움과 절망의 한복판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찾고, 참된 예배와 교회,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 앞으로 겸허히 걸어 나오는 까닭을 바로 이 생명에 대한 본능적 갈망의 지점에서 바라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과 26절에 기록된 주님의 거룩한 말씀은 인간이 맞닥뜨리는 죽음의 참혹한 실재를 결코 외면하거나 모른 척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죽음이 인간의 존재와 역사의 최종적인 마지막 결말이라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주님의 위대한 약속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활의 소망을 가리키고, 살아서 주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선언은 끊어지지 않는 영생의 지평을 향해 활짝 열려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찬란한 중심에는 인간 스스로의 힘과 도덕적 노력으로 죽음의 그늘을 극복할 수 있다는 헛된 인문학적 낙관론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친히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생명의 길과 소망이 있다는 굳건한 믿음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비어 있는 무덤은 그저 사랑하는 이의 상실을 미화하거나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관념적인 상징이 아니며, 죄와 사망으로 무겁게 닫혀 있던 인간의 비극적 결말이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한 은혜 안에서 전혀 새롭게 열렸음을 선포하는 가장 명확한 복음의 이정표가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강해 설교를 통해 부활을 단순히 심리적인 위안이나 내면의 환상, 혹은 주관적인 신화로 축소하여 다루는 모든 시도를 경계합니다. 텅 비어 있는 역사적 무덤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제자들의 진실한 증언이라는 든든한 토대 위에서, 성경 묵상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사망 권세를 짓밟고 다함 없는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역사적·신학적 사실을 굳게 붙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품는 부활의 소망은 고단한 세속 현실을 피하기 위한 헛된 상상이 아니며, 죽음과 어둠이 인류의 삶에서 최종적인 왕권을 행사하는 절대적 권세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증언하는 굳건한 믿음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말씀은 단순히 육체의 목숨이 다한 이후에 펼쳐질 아득한 내세만을 말하며 일상의 삶을 다독이는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설교의 깊은 흐름 속에서 파악하는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죄로 말미암아 이미 영적인 의의 길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사망을 향해 달려가는 비참한 존재이며, 주님의 부활이 주는 은혜는 그처럼 영적으로 이미 죽어 있는 실존을 다시 강력하게 살려내는 생명의 능력으로 다가옵니다. 인간의 죄와 죽음은 서로 완전히 떨어진 별개의 문제가 아니며, 그 참혹한 비극에 대한 해답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완벽하게 하나로 얽혀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생명을 향한 갈망이 헛된 망상이 아니라 참된 구원의 소망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무엇이 우리 인간을 이토록 참혹한 죽음의 그늘 아래 무릎 꿇게 만들었는가를 하나님 말씀의 밝은 빛 아래서 정직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어둠을 통과해 피어나는 은혜

장재형 목사는 성도가 주님의 부활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풍성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십자가의 깊은 어둠과 수난의 현장을 통과해야만 한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환희만을 조급하게 붙드는 것으로는 부활 신앙이 지닌 신학적 깊이와 진정한 무게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그분이 도대체 왜 그렇게 참혹하게 죽으셔야만 했는지,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자신의 거룩한 몸과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셨는가를 아프게 물을 때 비로소 부활은 값싼 승리의 구호에 그치지 않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친히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사건으로 비로소 경험됩니다. 로마서 4장 25절의 말씀은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영광스러운 부활을 한 문장 안에서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거룩한 구속사의 사슬로 묶어 보여줍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엄중하고 거룩한 율법적 선포 앞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그 무거운 죄의 값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장 비참한 죄인의 자리에 친히 서셔서 인간의 온갖 죄악과 죽음의 짐을 짊어지셨다는 대속의 복음 메시지는,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결코 인간의 끔찍한 죄를 가볍게 덮어주는 얼렁뚱땅한 관용이 아님을 분명히 비추어 줍니다. 주님의 십자가 달리심에는 죄의 엄중한 무게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그 무서운 형벌의 잔을 독생자에게 대신 담당시키시는 그 깊은 십자가 사랑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함께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이 역사적 사실은, 인간의 구원이 결코 인간의 도덕적 공로나 자기 정당화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에게 거저 주어진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에서 비롯된다는 깊은 신학적 통찰을 열어 줍니다.

설교는 로마서 5장의 구속사적 맥락을 따라, 인류의 첫 조상인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죄와 사망이 들어왔고, 오직 또 다른 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의 새 시대가 활짝 열렸음을 차분히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곧 온 인류의 실존적인 ‘우리의 죽음’이 되고, 그분의 다시 살아나심이 곧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생명’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그분께서 온 인류를 대표하는 참된 머리로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구원이란 멀리 서서 관조하듯 바라보는 남의 나라 사건이 아니며, 오직 온전한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께 영적으로 접붙여진 성도가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을 자기 자신의 실제적인 삶과 실존의 현실로 겸허히 받아들이는 거룩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그분의 사역의 마지막 결말이었다면, 온 세상의 복음과 성도의 소망은 차가운 무덤 앞에서 영원히 멈추어 섰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대속의 완성이 참된 영원한 생명으로 온전히 이어졌음을 온 우주 앞에 확증하며, 죄와 사망의 어두운 권세가 결코 승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담하게 선포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웅장한 고백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나의 교만하고 죄악 된 옛 삶의 완전한 죽음이 되고, 그분의 다시 살아나심이 내 심령 안에서 끊임없이 작동하는 거룩한 새 생명의 출발점이 될 때, 성도의 믿음은 단순한 관념적 지식을 넘어 존재 전체의 삶의 방향을 180도 바꾸어 놓습니다. 십자가는 영광스러운 부활 없이는 결코 완성될 수 없으며, 부활 역시 아픔이 서린 십자가를 지운 채 제대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이 둘이 성도의 가슴속에 온전히 함께 놓일 때, 내면의 죄에 대한 참된 자각은 절망의 늪으로 떨어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숭고한 은혜 또한 값싼 위안으로 흐르지 않게 됩니다.

빈무덤을 향해 달린 사랑이 만난 생명

부활의 첫 아침을 가장 따뜻하고 아름답게 비추는 성경의 장면 속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흘린 거룩한 눈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모든 희망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여겨지는 절망의 무덤을 향해 새벽 일찍 걸음을 옮겼고, 비록 주님께서 돌아가셨을지라도 그 거룩한 시신이라도 자신이 정성껏 모셔 가겠다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차가운 그 자리를 차마 떠나지 못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마리아의 이 깊은 마음을 죽음보다 강한 숭고한 사랑의 모습으로 바라봅니다. 십자가의 깊은 수난과 아픔을 가슴 깊이 새긴 사람만이, 마침내 맞이하게 되는 부활을 그저 가벼운 환희나 세속적 기쁨이 아니라 사랑이 마침내 사망의 권세를 온전히 이겨낸 위대한 구원 사건으로 깊이 있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텅 비어 있는 빈무덤은 마리아가 바친 순전한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온 천하에 드러내 보여주었지만, 정작 마리아 자신은 처음부터 자기 곁에 가깝게 서 계신 부활의 주님을 속히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녀를 향해 던져진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는 주님의 친절한 질문은, 그녀가 절망하며 슬퍼하는 바로 그 눈물의 한가운데에 이미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영으로 서 계심을 똑똑히 보여 줍니다. 인간의 눈물이 너무나 크고 깊으면, 때로는 바로 곁에 현존하여 계신 주님의 찬란한 소망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수 있으며, 세속 현실의 고통이 너무나 깊으면 생명의 주님이 내 곁에 가까이 다가와 계시다는 사실조차 낯설고 생소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진실한 성경 묵상은 눈앞의 슬픔을 무조건 서둘러 지워버리려는 헛된 시도가 아니라, 그 깊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 내 이름을 따뜻하게 부르시는 살아 계신 주님의 음성을 다시금 인격적으로 듣는 복된 일입니다.

이 가슴 뭉클한 장면은 오늘을 살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과연 무엇으로 살아 숨 쉬고 있는가를 깊이 있게 묻게 만듭니다. 아무리 웅장하고 아름다운 예배당 건물이 서 있고, 과거에 일어났던 찬란한 영적 기억과 역사들이 수놓아져 있다 할지라도, 주님을 향한 예배자의 진실한 사랑과 영적 갈망이 사라져 버린다면 그 교회는 살아 계신 주님의 역사하심을 오늘 증언하기보다는 그저 지나간 과거의 화려한 흔적만을 보존하는 종교적 박물관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시신을 정성껏 귀히 모시고자 했던 마리아의 마음도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무덤 너머에 살아 계신 주님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사랑과 열정이 없다면 부활의 생명은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역사하는 사건이 되기 어렵습니다. 쇠퇴해 가는 교회를 다시금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참된 능력은 외형적인 장엄함이나 세속적인 프로그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까지 주님을 온전히 만나고자 하는 성도들의 진실한 갈망에서부터 강력하게 시작됩니다.

부활 신앙은 오늘의 삶을 어디로 이끄는가

장재형 목사가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강조하는 부활 신앙은, 그저 일 년에 단 한 번 찾아오는 부활절 하루의 일시적인 감동이나 머릿속 교리적 동의의 수준에 결코 머물지 않습니다. 죽음이 우리 삶의 절대적인 끝이 아니라는 굳건한 믿음은, 삶의 온가지 두려움을 인위적으로 지워내는 주술적인 주문이 아니라, 이 세상의 온갖 두려움과 공포가 더 이상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새로운 영적 중심축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날마다 인격적으로 함께 살아간다는 성도의 고백은, 내가 내 삶의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주관하던 자기중심적인 자리에서 겸허히 내려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걸어가신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 그리고 무조건적인 봉사와 섬김을 내 삶의 참된 방향이자 목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빛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성도에게는, 이 땅에서 겪는 잠깐의 물질적 손해나 세속적인 고난이 더 이상 존재의 최종적인 파멸이나 실패로만 해석되지 않는 법입니다.

이 위대한 부활의 믿음은 성도 개인의 내면적 평안을 넘어, 그들이 모인 거룩한 공동체의 외형과 체질까지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그저 부활의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가르치는 장소에 그쳐서는 안 되며, 삶에 절망한 수많은 영혼들이 찾아와 다시금 하늘의 소망을 배우고, 세상의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힌 이들이 용기 있게 사랑을 선택하며 걸어가는 거룩한 생명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십자가의 깊은 수난을 묵상한 이후에도, 성도는 부활의 참된 생명과 승리의 기쁨을 오랫동안 지속해서 되새겨야 한다는 장재형 목사의 권면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저 절기의 정해진 일정표보다 훨씬 더 깊고 풍성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과 오랫동안 함께 머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새롭게 깨닫고 간절한 기도 속에서 다음 걸음을 신중히 준비했듯이,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 역시 부활의 절기를 그저 스쳐 지나쳐 버리지 말고, 부활의 생명력이 나의 매일의 삶의 거룩한 습관과 인격이 될 때까지 주님 앞에 오래도록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의 그 어떤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숭고한 사랑의 정확한 표징이며, 그분의 영광스러운 부활은 그 십자가 사랑이 실제로 사망의 무서운 권세를 온전히 짓밟고 승리하여 영원한 생명의 길을 활짝 연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품는 참된 부활 신앙은 인간의 한계와 죽음을 아예 모르는 척 모면하려는 무책임한 낙관주의가 아니며, 이 땅에 실재하는 죄의 무거운 무게와 죽음의 두려움, 그리고 흘러내리는 눈물과 비통함을 정면으로 곧게 바라보면서도 그것들이 결코 인간 존재의 마지막 최종 선언이 될 수 없음을 굳게 믿는 찬란한 소망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우리 삶에 고통스러운 무덤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어두운 무덤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구주로 믿는 거룩한 성도들을 영원히 가두어 둘 수 없다고 온 천하에 대담하게 선언할 뿐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도, 이제는 참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느껴지는 지독한 절망의 자리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중압감과 도래할 죽음에 대한 깊은 두려움, 멈추지 않는 눈물과 비통함, 그리고 점차 영적인 생명력을 잃어가는 피폐한 공동체의 모습이 마치 소망이 완전히 사라진 차가운 무덤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 계신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이 완전히 멈춘 뒤에야 비로소 멀리서 찾아오시는 분이 결코 아니며, 오늘 슬픔으로 깊이 울고 있는 바로 그 절망의 곁에 친히 서셔서 생명의 새로운 길을 활짝 여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오늘 나는 내 삶의 어떤 문제와 상황을 향해 너무나 조급하게 ‘끝’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미 내 삶 바로 곁에 가까이 와 계신 부활의 주님을, 혹시 내 안의 슬픔과 고통이 너무나 가득하여 아직 온전히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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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tación del pastor David Jang sobre 1 Timoteo 6: cómo el heredero de todas las cosas vence la codicia (Olivet University)

El filósofo Kierkegaard profundizó en la ansiedad fundamental y en la crisis existencial que enfrenta el ser humano. Sin embargo, a diferencia del saber del mundo, que veía al ser humano como una existencia solitaria arrojada sin propósito a un mundo frío, la Biblia proclama majestuosamente que nuestro principio y nuestro fin están dentro de la inmensa providencia de Dios. La vida en esta tierra sobre la que estamos de pie no es una sucesión de casualidades, sino un viaje santo al que se le han prometido bendiciones espirituales del cielo y abundante gracia de la tierra. El sermón del pastor David Jang sobre 1 Timoteo 6 exhorta precisamente a los cristianos modernos, que vagan en medio de esta confusión de identidad, a recuperar una cosmovisión bíblica sumamente realista y, al mismo tiempo, profunda. Para no perdernos ante las fuertes tentaciones materiales del mundo, primero debemos volver a escuchar con renovada atención la voz del evangelio dirigida a nosotros.

La Biblia da una orden firme frente a las olas de codicia que se acercan sin cesar. Cuando el apóstol Pablo exhortó a su hijo espiritual Timoteo diciendo: “Pero tú, hombre de Dios, huye de estas cosas”, esas palabras no significaban en absoluto una huida cobarde. El pastor David Jang compara esta santa huida con la última estrategia de las Treinta y seis estratagemas de la tradición militar china, y explica que no se trata de una salida inferior motivada por el miedo, sino de la estrategia más sabia para guardarse del lugar sucio del pecado. En la raíz del amor al dinero que enfrentamos cada día, así como del orgullo, las contiendas y la envidia que de él se derivan, se encuentra la profunda codicia humana. Esta batalla es un intenso frente espiritual que, a lo largo de la historia, ha sido resumido en dos símbolos: los publicanos y las prostitutas. También es el lugar donde, por medio de la meditación bíblica, comienza el verdadero arrepentimiento que nos lleva a enfrentar honestamente nuestra debilidad y a volvernos a Dios.

Más allá de la tentación del mundo, hacia el refugio de la gracia

El hecho de que muchas disputas entre padres, en la realidad que enfrentamos, terminen teniendo como causa problemas económicos, muestra con claridad hasta qué punto la tentación de las riquezas oprime nuestra vida cotidiana. El llamado a pelear la buena batalla de la fe nos conduce precisamente a una lucha concreta contra esta visión equivocada de los bienes materiales. El pastor David Jang considera que el éxito o el fracaso de esta batalla depende de saber con claridad quién es el dueño del mundo en el que vivimos y quién gobierna la historia. La única llave que supera los límites de la filosofía secular, encerrada en la interioridad humana y encaminada hacia el pesimismo, se encuentra en la proclamación de que todas las cosas proceden del Señor, existen por medio de Él y vuelven a Él. Cuando reconocemos que el verdadero dueño de todas las cosas es Dios, nuestra mirada empieza por fin a desplazarse de la posesión terrenal al gobierno celestial.

No somos seres solitarios arrojados sin rumbo a este mundo, sino personas llamadas en Cristo a ser santos herederos de Dios. Tal como Pablo declaró que el mundo, la vida y lo por venir son nuestros, nosotros tenemos el privilegio de disfrutar de la riqueza espiritual de haber recibido todas las cosas como herencia al estar unidos a Cristo. Para explicar esta esperanza majestuosa, el sermón nos presenta una profunda metáfora: la del pasajero de pie en un tren. Cuando alguien que no tiene asiento se sienta por un momento en un lugar sin dueño aparente, se inquieta en cada estación; y cuando aparece el verdadero dueño, finalmente debe ceder el asiento. Del mismo modo, todas las posesiones de esta tierra no son más que algo que tomamos prestado de manera temporal. Cuando el Señor, el verdadero dueño, vuelva, tendremos que devolverlo todo. Por eso debemos cumplir nuestra santa responsabilidad no como propietarios, sino como mayordomos.

El camino del carácter santo que recorre el heredero de todas las cosas

El título “hombre de Dios” es un nombre noble que fue dado a grandes predecesores de la fe, como Moisés y David. Quienes poseen esta gloriosa identidad no deben limitarse simplemente a huir del pecado, sino que deben anhelar activamente el carácter de Cristo y seguirlo. Deben buscar la justicia que sigue la ley justa de Dios, guardar en el corazón la piedad como actitud de vida que desea parecerse al Señor, y llenar de obediencia el amor que hace posible una fe y una paciencia inquebrantables. En especial, el carácter de la mansedumbre, al que se llega mediante el proceso de la paciencia que produce todo fruto, es la cumbre del corazón que el Señor mismo mostró. Por eso, quienes abracen esta mansedumbre finalmente recibirán la tierra por heredad.

La sabiduría de edificar el fundamento de la vida eterna

Por último, la Biblia exhorta a quienes disfrutan de riquezas en esta tierra a no poner el corazón en las riquezas inciertas, sino a poner su esperanza únicamente en Dios, quien nos da todas las cosas en abundancia. Cuando recordamos la gracia del Señor, derramada sobre nosotros hasta rebosar como un cuenco colmado de arroz, por fin podemos avanzar hacia la práctica de una vida santa, rica en buenas obras y dispuesta a compartir. Cuando usamos los bienes materiales para el valor eterno del reino de Dios, estos dejan de ser una posesión destinada a desaparecer y se convierten en un fundamento firme para alcanzar la verdadera vida. Esta es la imagen de una vida bendecida que, como los pioneros del evangelio que no edificaron sobre el fundamento de otros, sino que abrieron en silencio nuevos caminos, mira hacia la recompensa eterna del cielo y prepara el fundamento espiritual del porvenir.

No somos simples ciudadanos comunes que viven codiciando las cosas corruptibles de esta tierra, sino grandes herederos de todas las cosas, llamados a recibir el reino de los cielos como herencia junto con Cristo. Cuando comprendemos plenamente nuestra identidad dentro de la inmensa cosmovisión de Dios, por fin podemos vencer las tentaciones que tenemos delante de los ojos y correr con fuerza hacia la vida eterna. El lugar de tu vida y los bienes que hoy tienes en tus manos, ¿son apenas un asiento temporal de tren en el que permanecerás por un momento, o son la vocación de un santo mayordomo que edifica un hermoso fundamento para el reino eterno del Señ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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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éditation du pasteur David Jang sur 1 Timothée 6 : comment l’héritier de toutes choses triomphe de la convoitise (Olivet University)

Le philosophe Kierkegaard a profondément exploré l’angoisse fondamentale et la crise existentielle auxquelles l’être humain est confronté. Toutefois, contrairement aux savoirs du monde qui considèrent l’homme comme une existence solitaire jetée sans but dans un univers froid, la Bible proclame majestueusement que notre commencement et notre fin se trouvent dans la grande providence de Dieu. La vie que nous menons sur cette terre où nous posons nos pieds n’est pas une succession de hasards, mais un saint pèlerinage auquel ont été promises les bénédictions spirituelles du ciel et les grâces abondantes de la terre. La prédication du pasteur David Jang sur 1 Timothée 6 appelle précisément les chrétiens modernes, errant au milieu de cette confusion identitaire, à retrouver une vision biblique du monde à la fois profondément réaliste et spirituellement riche. Pour ne pas nous égarer face aux puissantes séductions matérielles du monde, nous devons d’abord réentendre d’une manière nouvelle la voix de l’Évangile qui s’adresse à nous.

La Bible donne un ordre ferme face aux vagues incessantes de la convoitise. Lorsque l’apôtre Paul exhorte Timothée, son fils spirituel, en disant : « Mais toi, homme de Dieu, fuis ces choses », cette parole ne signifie en aucun cas une fuite lâche. Le pasteur David Jang compare cette sainte fuite au dernier stratagème des Trente-six stratagèmes de l’art militaire chinois, expliquant qu’il ne s’agit pas d’une solution inférieure dictée par la peur, mais de la stratégie la plus sage pour se préserver du lieu impur du péché. À la racine de l’amour de l’argent auquel nous sommes confrontés chaque jour, ainsi que de l’orgueil, des querelles et de la jalousie qui en découlent, se trouve la profonde convoitise humaine. Ce combat constitue une ligne de front spirituelle intense, résumée au fil de l’histoire par les deux symboles du publicain et de la prostituée. C’est aussi le lieu où commence une véritable repentance, lorsque, par la méditation biblique, nous faisons face honnêtement à notre faiblesse et revenons à Dieu.

Au-delà des tentations du monde, vers le refuge de la grâce

Dans la réalité qui est la nôtre, le fait que de nombreux conflits entre parents trouvent finalement leur origine dans des problèmes économiques montre clairement à quel point la tentation des richesses enserre notre quotidien. L’exhortation à combattre le bon combat de la foi nous conduit précisément vers une lutte concrète contre cette conception erronée des biens matériels. Le pasteur David Jang estime que l’issue de ce combat dépend de notre capacité à reconnaître clairement qui est le maître du monde dans lequel nous vivons et le souverain de l’histoire. La seule clé permettant de dépasser les limites d’une philosophie séculière enfermée dans l’intériorité humaine et glissant vers le pessimisme se trouve dans cette proclamation : tout vient de Lui, existe par Lui et retourne à Lui. Lorsque nous reconnaissons que le véritable propriétaire de toutes choses est Dieu, notre regard commence enfin à se détourner des possessions terrestres pour se tourner vers le règne céleste.

Nous ne sommes pas des êtres solitaires jetés sans direction dans ce monde, mais des personnes appelées en Christ à devenir les saints héritiers de Dieu. Comme Paul l’a déclaré, le monde, la vie et les choses à venir sont tous à nous ; unis au Christ, nous avons le privilège de jouir d’une richesse spirituelle en héritant de toutes choses. Pour expliquer cette espérance majestueuse, cette prédication nous propose une image profonde : celle du passager debout dans un train. Lorsqu’une personne sans billet de siège s’assied temporairement à une place qui semble inoccupée, elle reste inquiète à chaque station ; et lorsque le véritable titulaire du siège apparaît, elle doit finalement le lui céder. De même, toutes les possessions de cette terre ne sont que des biens que nous empruntons provisoirement pour un temps. Lorsque le Seigneur, le véritable propriétaire, reviendra, nous devrons tout lui rendre ; c’est pourquoi nous devons accomplir notre sainte responsabilité non comme propriétaires, mais comme intendants.

Le chemin du caractère saint emprunté par l’héritier de toutes choses

Le titre d’« homme de Dieu » est un nom noble qui fut donné à de grands prédécesseurs dans la foi, tels que Moïse et David. Ceux qui portent cette glorieuse identité ne doivent pas se contenter de fuir le péché ; ils doivent aussi aspirer activement au caractère du Christ et le suivre. Ils doivent rechercher la justice conforme à la loi juste de Dieu, garder dans leur cœur la piété comme attitude de vie cherchant à ressembler au Seigneur, et remplir d’obéissance l’amour qui rend possibles une foi inébranlable et la persévérance. En particulier, la douceur, à laquelle on parvient au terme du processus de persévérance qui produit tous les fruits, est le sommet du cœur que le Seigneur lui-même a manifesté. C’est pourquoi ceux qui portent cette douceur recevront finalement la terre en héritage.

La sagesse qui pose le fondement de la vie éternelle

Enfin, la Bible exhorte ceux qui jouissent de la richesse sur cette terre à ne pas placer leur cœur dans des biens incertains, mais à mettre leur espérance uniquement en Dieu, qui nous donne toutes choses avec abondance. Lorsque nous nous souvenons de la grâce du Seigneur, qui se déverse sur nous jusqu’à déborder comme un bol de riz rempli à ras bord, nous pouvons enfin avancer vers une vie sainte, riche en bonnes œuvres et portée par la joie du partage. Lorsque les biens matériels sont utilisés pour les valeurs éternelles du royaume de Dieu, ils ne deviennent pas des possessions vouées à disparaître, mais un fondement solide permettant de saisir la véritable vie. C’est l’image d’une vie bénie qui, à l’exemple des pionniers de l’Évangile ayant ouvert de nouveaux chemins avec persévérance sans bâtir sur le fondement d’autrui, pose les bases spirituelles de l’avenir en gardant les yeux fixés sur la récompense éternelle du ciel.

Nous ne sommes pas de simples citoyens vivant dans la convoitise des biens périssables de cette terre, mais de grands héritiers de toutes choses appelés à recevoir, avec le Christ, le royaume des cieux en héritage. Lorsque, dans la vaste vision du monde de Dieu, nous comprenons pleinement notre véritable identité, nous pouvons enfin triompher des tentations placées sous nos yeux et courir avec force vers la vie éternelle. Les biens que vous tenez aujourd’hui entre vos mains, ainsi que la place que vous occupez dans la vie, sont-ils un siège temporaire dans un train où vous ne ferez que passer, ou bien la vocation d’un saint intendant qui bâtit un beau fondement pour le royaume éternel du Seigneu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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