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동행 –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와 동료들

이 글에서는 마가복음 14장 32-42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중점적으로 다루되, 장재형목사가 강조해 온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라는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성경 본문에서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과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그 고독한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신앙의 핵심 가치를 되새기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메시지와 함께 장재형목사가 전하고자 하는 주요 가르침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전개는 여러 소주제나 구분 없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며,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장면이 우리 각자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성찰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마가복음 14장에 기록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마친 후 감람산 기슭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고, 거기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한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일반적으로 ‘감람산’은 올리브나무 숲이 가득하며, 그 가운데 ‘겟세마네’는 ‘채유소’, 즉 올리브 열매를 짜서 기름을 얻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장소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올리브 기름이 가져다주는 두 가지 상징, 즉 평화와 영원성, 그리고 메시아에게 기름 부음을 주던 전통을 함께 묵상해 볼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히브리어로 ‘메시야’, 헬라어로 ‘크리스토스’라는 표현이 모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즉 기름 부음받은 왕으로서 겟세마네 동산에 계셨음에도, 여기서 제자들에게는 그분을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우는 장면이 아니라 오히려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며 십자가 수난을 준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왕으로 즉위하셔야 할 분이 극도로 비참한 기도를 드리시는 장면이기에, 성경 전체에서 매우 강렬하고도 역설적인 대조를 형성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마태·마가·누가복음에 공통적으로 기록된 대단히 중요한 본문이지만,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특징이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에 대해, 요한이 이미 13장부터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는 길을 완전히 수락하셨음을 조명했기에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자신이 ‘이제 영광을 받았다’고 선언하셨고, 제자들에게 종말론적 당부와 고별 설교를 남기셨습니다. 즉, 십자가 수난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당신은 스스로 그 길을 ‘영광’이라 선포하심으로 결단하셨다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주님은 갈보리 언덕 이전부터 이미 그리스도의 길을 선택하셨다. 요한은 예수님의 내면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수용하는 왕적 위엄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에 겟세마네 기도를 생략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가 기록한 겟세마네 기도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인간적 고민’과 ‘극렬한 통곡’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14장 33-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참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께 ‘아바 아버지’라 간구하며 끝까지 순종하신 고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께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 그분 안에는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처절한 길인지, 또 그 길을 가는 데 있어 인간적 떨림과 고통이 없을 수 없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스스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고백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복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장재형목사가 자주 강조해 왔듯, 예수님이 사실상 십자가를 지는 길을 ‘피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이나 마가복음 14장에 드러난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 죽음 앞에서 느끼는 극심한 두려움과 고통을 토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이어집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단하고는 있지만, 종종 우리의 의지와 감정은 연약하기 때문에 다른 길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들이 많다. 예수님 또한 그 순간을 겪으셨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을 붙들고 끝까지 걸어가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본을 보여주셨다”고 풀이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모든 이가 반드시 직면해야 할 도전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는 진리입니다.

한편,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를 올리시는 동안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식사 자리에서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큰 소리를 쳤는데, 예수님은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로 들어와서 기도하시는 동안에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들어 버립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시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주님께는 지금이 가장 절박한 시간이고, 일생일대의 영적 투쟁이 벌어지는 중인데, 제자들은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밤에 산책을 나온 사람들처럼 무심하게 잠에 든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종종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엄중한 순간에 우리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버릴 때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제자들은 허둥지둥 도망쳐 버리는데, 마가복음 14장 51-52절에는 베 홑이불을 두르고 따라오던 한 청년이 붙잡히자 홑이불을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전통적으로 이 ‘한 청년’을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자신의 집에서 최후의 만찬이 있었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감람산으로 나아가자, 밤중에 일단 잠들어 있던 마가가 뒤늦게 모든 상황을 감지하고 황급히 예수님을 따라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도 두려움 앞에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친다”라고 설명합니다. 마가는 이토록 부끄러운 장면을 자기 복음서에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기록함으로써, 인간적인 연약함이 얼마나 쉽게 드러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연약함조차도 결국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정직한 신앙고백’의 모범이라 칭하며, “마가는 자신이 부끄러운 존재임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런 자신도 변화시키신 주님의 은혜를 자랑하기 위해 이 장면을 그대로 쓴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약점을 숨기기보다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길을 열어 놓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셔야 마땅한 예수님께서 오히려 고통과 슬픔 속에 땀을 핏방울같이 흘리시는 비극적인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완전히 받아들여지기까지, 즉 예수가 진실로 ‘기름 부음받은 이’로 공인되고 고백되기까지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불가피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분의 길을 함께 걸어갈 영적·신앙적 성숙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홀로 고독의 길을 가야 했고, 그 절정이 바로 겟세마네의 땀방울과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였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에 대해,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도 떡과 포도주를 받고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나, 곧 이어서 펼쳐질 고난의 현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유월절에 희생된 양의 피가 기드론 시내로 흘러내려 붉게 물들어 있는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도, 주님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를 선명히 알지 못했다. 주님은 홀로 그 붉은 물살을 건너 겟세마네로 들어가셨고, 이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고독하고 처절한 순간,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이는 아람어 ‘아바’(아빠)와 헬라어 ‘파테르’(아버지)가 결합된 표현으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맺고 계신 친밀하고도 절대적인 신뢰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에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 부르셨으나, 이 고통의 골짜기에서 그분은 더욱 간절하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아빠 아버지여”라 부르며 부르짖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을 때 가장 큰 유혹은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하는 의심이 생길 때다. 예수님조차 그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아바 아버지’를 찾으심으로, 인간적인 두려움의 순간에 우리도 전적으로 아버지를 신뢰해야 한다는 본을 보이셨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우리는 죽음의 세력이 가장 강력하게 덮쳐 올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을 놓지 말아야 하며,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의 기도 안에 ‘수단’으로서의 기도가 아니라 ‘순종’을 낳는 기도로서의 본질이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셨으나, 결국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결론지으셨습니다. 이 장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우리는 종종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바꿔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나를 바꾸도록’ 내어맡기는 태도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도의 정수는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뜻과 감정을 초월해 아버지께 끝까지 복종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된 기도의 목표”라고 강조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길을 따를 힘을 주는 근원적 모범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약함을 지닌 제자들은 이 기도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잠들었고, 야고보와 요한도 주님의 절박함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시며,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권면하셨으나, 그들은 여전히 무감각한 상태였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들을 ‘교회 내의 인간적인 모습’으로 비유하면서, “세상에서는 큰소리치고 대범해 보이는 신자도, 실상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잠들어 버리거나 도망가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고,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욱 겟세마네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하며, 베드로처럼 망령된 자신감을 내세우기보다, 예수님처럼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후 예수님은 세 번째 기도 후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라고 하시며, 십자가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군병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몰려오자 제자들은 흩어집니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는 “아무리 강한 결심과 의지를 보여도, 결국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넘어지기 쉽다.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실제로는 가장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을 부인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가 넘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돌이키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곧 우리가 넘어지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지라도 주님께서 돌이킴의 은혜를 주신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됩니다.

결국,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죽음의 잔’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 수용하셨고,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신 현장이 바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방관자나 구경꾼의 위치로 남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며, 주님 안에 주어진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고 역설합니다. 즉, 겟세마네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순종의 길을 우리 또한 믿음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고독하고 비극적으로 보일지라도, 부활의 영광이 그 끝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한편, 요한복음이 겟세마네 기도를 생략한 것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영광으로 선포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의 인간적 고뇌 부분을 생략하는 편집 의도를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다시 한 번 짚어 줍니다. 요한복음은 17장의 고별 기도를 통해 세상과 제자들을 위해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왕적’ 위엄을 더욱 부각합니다. 반면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고통을 당하셨고,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기도를 드리셨는가에 포커스를 둡니다. 이 둘은 결코 모순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더 풍부하게 보여주는 보완적 시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도 종종 겟세마네 같은 어려움을 맞이한다. 세상에서 기드론 시내처럼 붉은 피의 흔적을 보며 때로 두렵고 떨리기도 하고, 아무도 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해 외롭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길을 이미 가셨고, 우리에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본을 남겨주셨다. 우리가 그 기도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때, 주님과 동행하는 길은 분명히 고독을 넘어 부활의 환희로 이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겟세마네와 갈보리 언덕은 고통이 극심하게 드러나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는 자리라는 진리가 우리에게 제시됩니다.

더 나아가, 겟세마네 사건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모두를 돌아보게 하는 ‘영적 거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며, 어쩌면 마가처럼 겨우 홑이불만 두른 채 뛰어갔다가 결국 도망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적인 결심과 맹세가 얼마나 한계가 뚜렷한지를 지적하면서, “베드로처럼 어떠한 어려움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큰소리쳐도, 하나님 앞에 깨어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작은 자극 하나에도 무너지고 만다. 그러므로 신앙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과 기도를 통해서만 단단해진다”고 합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열심보다 내면의 겸손과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14장 후반부에 보면, 예수님이 실제로 체포되시고 대제사장들 앞에서 신문받으시는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베드로는 정확히 예수님의 예언대로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맙니다. 닭이 울자마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죠.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인간적인 비참함과 눈물을 지적하면서, “우리는 실패하고 넘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베드로를 찾아가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다. 이는 겟세마네 기도에서 십자가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죄인인 우리를 얼마나 끝까지 붙드시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만든다”고 설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며, 때로는 고독하고 외롭고 눈물겨운 길임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길을 주님이 먼저 가셨기에, 그리고 그 길에서 제자들의 모든 실패까지도 주님이 포용하셨기에, 우리가 실패한다 할지라도 다시금 회복될 수 있는 길이라는 희망이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바로 이 ‘부활의 희망으로 이끌어가는 고난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겟세마네와 같은 어둠과 슬픔, 홀로 씨름해야 할 시험을 맞닥뜨릴 수 있으나, 기도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며 나아갈 때 우리 또한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을 통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첫째, 예수님도 인간적인 두려움과 고통을 겪으셨고, 우리 역시 그러한 시험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둘째, 그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를 부르짖으셨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라는 복종은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이를 위해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넷째, 제자들처럼 잠에 빠지거나 도망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도 솔직히 인정해야 하며, 그 연약함 속에 임하는 주님의 은혜로 인해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결국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점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십자가는 인간적인 최악의 절망이지만, 부활이라는 최후의 소망으로 이어지는 통로이며, 그 길에서 우리의 믿음은 성숙해집니다.

이처럼 겟세마네와 갈보리는 단순히 2000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영적 현실을 비추어 줍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에 주목하며, “우리는 너무 쉽게 제자들을 비난하지만, 사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라고 물어봐야 한다. 그 질문을 통해 자기 자신도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날 잠재력을 가진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 훨씬 더 큰 겸손과 회개의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신앙은 ‘내가 강해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끝까지 붙들어 주시고, 우리가 연약함을 인정하며 은혜를 구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나아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각종 위기와 유혹을 만날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처럼 그저 의지로 버티다가 결국 도망치거나 무너져 버리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처럼 아버지 앞에 모든 것을 토로하며 “아버지의 원대로 되길 원합니다”라는 고백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 후자의 길이, 장재형목사가 끊임없이 설파해 온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실질적 모습입니다.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먼저 그 길을 가셨고, 부활하심으로써 그 길이 결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따를 때, 비록 인간적인 약함과 눈물이 따른다 해도, 마지막에는 부활의 능력이 펼쳐지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맛보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틀어 우리는 ‘기도’의 역할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가장 힘겨운 순간에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의 자리에 가셨고, 그들이 함께 깨어 기도하기를 원하셨을까요? 장재형목사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 마음의 항복을 이끌어낸다. 기도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교만의 표현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코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제자들도 깨어 기도하기를 원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동안 어떤 의미 있는 역할도 하지 못하고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 후에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기도의 자리’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복음 전파 사명을 맡기십니다. 결국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초대교회 부흥을 일으키는 주역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정적이고 결단력 있어 보인다 해도, 기도를 잃어버리면 베드로와 같이 작은 유혹 앞에서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의 주님처럼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어떤 시험도 결국 극복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점에서 “교회가 이 땅에서 설 자리를 잃고, 개인의 신앙이 깊은 내면적 능력을 잃어버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진정한 의미의 겟세마네 기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겟세마네 기도는 간절함과 절실함,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순종을 담고 있는데, 이를 놓치면 우리도 잠자고, 멀리 도망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순절 기간이나 특별 새벽기도회 등 특정 절기에만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자리에서 늘 겟세마네를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피할 수 없는 결단을 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하는 영적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거룩한 반복’이라 부릅니다. 즉, 역사 속에서 단 한 번 있었던 겟세마네의 이야기가 오늘도 우리 안에서 반복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가처럼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끝내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복음서의 저자로 세워지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세 번씩 주님을 부인했다 해도, 다시금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부여받고 장차 교회 기둥으로 쓰임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렇듯, 마가복음에 기록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은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가장 강렬한 예시이자, 제자들의 연약함과 예수님의 인자하심이 극명히 대비되는 자리입니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은 결국 이 겟세마네 영성에서 비롯됩니다. 아무리 무서운 죽음이 다가온다 해도, 아바 아버지를 향한 절대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내 원대로 하지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외롭고 고독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그 길을 먼저 가셨고, 그 길이 영원한 승리로 이어졌음을 우리는 부활 사건을 통해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믿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과제입니다.

이러한 겟세마네 사건을 정리하며, 장재형목사는 우리 각자가 ‘내가 피하고 싶은 십자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라고 조언합니다. “혹은 내가 잠들어 버리고 있는 고난은 무엇이며,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매달려야 할 일은 무엇인가? 또 나는 지금 베드로처럼 ‘주를 위해 목숨도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실상은 쉬지 못할 잠에 빠져 있거나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들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진실하게 답해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와 한층 더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더 이상 인간적인 힘이나 의지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늘 “신앙은 나의 결단 위에 서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과 예수님이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신 순종 위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순종에 발붙여, 우리 역시 삶의 크고 작은 겟세마네를 만나게 될 때마다 “아바 아버지”를 부르짖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신뢰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라는 영적 현실을 우리 일상에서 구체화시키는 열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신앙 행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밤중에 흘리는 눈물과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그 기도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이미 선언하신 구원과 생명의 능력을 우리 삶에 실제로 펼쳐 보이십니다.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에 담긴 예수님의 기도와 제자들의 연약함, 그리고 결국 십자가의 길을 향해 굳게 일어나신 예수님의 순종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상기하게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주님은 홀로 그 길을 가셨다. 제자들은 자고 있었고, 누군가는 도망쳤으며, 다른 누군가는 배신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길은 본래부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 치의 후퇴 없이 그 길을 가셨고, 그 길의 종착지는 부활이라는 승리였다”고 말합니다. 이 메시지는 예나 지금이나 제자도로 초청받은 모든 이에게 변함없이 유효하며, 우리 각자를 향해 ‘함께 가자’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초청입니다.

정리하자면, 장재형목사가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강조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은 다음과 같은 함의를 지닙니다. 첫째, 우리의 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되, 그 약함을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이 우리 의지와 다를 때에도, 나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이 더 선하고 옳음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어떤 강한 결심과 맹세도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넷째, 비록 내가 실패한다 해도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에도 제자를 버리지 않으셨듯, 우리 역시 다시 일으키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부활의 영광을 내포하는 역설적 상징이기에, 지금 눈앞에 보이는 고난에만 매몰되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달려갈 때 그 영광을 맛보게 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결국 겟세마네 기도를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내 인생에서 지금 겪고 있는 혼돈과 시련이 어떤 의미인가? 그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하게 만듭니다. 주님은 그 끝에 분명한 답을 주십니다. 내가 부담스러워하고 피하고 싶은 십자가가 있다면, 그 십자가 너머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영광과 부활의 승리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절정이며, 장재형목사가 거듭거듭 전해 온 복음의 실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겟세마네에서 통곡하던 예수님을 향해 비로소 깨어 일어나 함께 걸어가는 결단입니다. 이제 더는 자고 있지 말고, 또 도망가지 말고, 주님과 함께 가는 진정한 동행자로 서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요약하면, 겟세마네의 기도는 예수님이 가지신 인간적 약함과 신적 순종의 역설을 여실히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기도’로 나아가야 함을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겟세마네 영성의 중요성을 수없이 설파해 왔으며, 그 핵심은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과 동행하려면 우리도 겟세마네의 통곡을 치러야 하고, 십자가를 감당해야 하며, 끝내 그 길이 영광으로 가는 길임을 믿어야 한다”라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깨어 기도하며 겟세마네를 다시금 내 삶의 현장에 구현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동행이야말로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된 길이 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록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이 드러나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시고도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의 실패와 눈물도 마침내는 주님의 부활 능력 안에서 회복되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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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tidad que florece en las grietas de una muralla derrumbada– Pastor David (Olivet University)

La antigua ciudad portuaria de Corinto era un enorme crisol donde las olas bravas del Mediterráneo y el deseo chocaban sin descanso. En aquella urbe, entre templos deslumbrantes, fluían la riqueza y el placer; y la iglesia levantada allí era, quizá, como un arca frágil a la deriva sobre el mar. En las líneas de la Primera Carta a los Corintios que el apóstol Pablo escribió con pluma en mano —especialmente en los capítulos 5 y 6— se escucha un aliento áspero que ninguna lógica serena alcanza a contener del todo. No se trata de una simple reprensión, sino del grito urgente de un padre que ve a su hijo amado tragar veneno.

Hoy, tomando como guía la aguda perspicacia teológica del pastor David Jang, queremos observar cómo ese grito que resonó en las calles de Corinto hace dos mil años atraviesa también nuestra época. No entramos porque falte gracia, sino porque allí —en el escenario de una contradicción donde gracia y pecado coexistían de forma extraña— se revela una tensión que sigue siendo la nuestra.

El bosque de los dones brillantes y, dentro, el retrato oculto de “Dorian Gray”

En la novela El retrato de Dorian Gray, de Oscar Wilde, aparece Dorian, un protagonista que conserva para siempre la juventud y la belleza. Por fuera parece perfecto y cautivador; pero su codicia y su corrupción quedan registradas tal cual en el retrato escondido en el desván, que se va pudriendo hasta volverse monstruoso. Así se asemeja, según diagnostica el pastor David Jang, la iglesia de Corinto. Exteriormente exhibía la forma de una “iglesia exitosa”: rebosante de lenguas y profecía, llena de conocimiento y fervor. Sin embargo, detrás del telón de aquellos dones deslumbrantes, anidaba una inmoralidad incestuosa que incluso los de fuera considerarían vergonzosa de mencionar.

Más impactante aún era su actitud. Lo que enfureció a Pablo no fue solo el pecado en sí, sino el orgullo de una iglesia que, aun abrazando ese pecado, no se quebrantaba ni se entristecía. En este punto, el pastor David Jang lanza un mensaje de predicación dolorosamente incisivo: ellos presumían de su libertad espiritual y, en nombre de la tolerancia, encubrían el pecado. Una iglesia que ha perdido la santidad y solo se gloría en los dones no es distinta de Dorian Gray, que sonríe con un rostro hermoso mientras esconde un retrato que se descompone. Aunque el aire impuro de la ciudad atravesó el umbral de la iglesia e invadió hasta el santuario, su sensibilidad espiritual estaba anestesiada y no percibían el hedor. Es, también, una advertencia helada para la iglesia contemporánea que, aun en medio de la abundancia, va perdiendo la fiereza de la santidad.

La mesa de lágrimas que rechaza el pan con levadura

La Biblia compara el pecado con la levadura. Así como una cantidad mínima fermenta toda la masa y le cambia la naturaleza, el pecado tolerado corrompe la esencia de la comunidad. El pastor David Jang, recordando la Pascua y la Fiesta de los Panes sin Levadura del Antiguo Testamento, nos hace volver a la identidad del cristiano: somos “pan sin levadura”. La orden de Pablo de desechar la levadura vieja no exige una pulcritud moral obsesiva. Se parece más a una cirugía de urgencia para salvar la vida.

La disciplina (purificación) de la iglesia no es como un veredicto de un tribunal civil. Tal como interpreta el pastor David Jang, detrás de la declaración estremecedora de “entregarlo a Satanás” corre un amor paradójico: aunque se destruya la carne, que el espíritu sea salvado en el día del Señor Jesús. Esto no es castigo, sino rescate. En el incidente de Baal Peor y en aquel desierto donde, mordidos por serpientes ardientes y muriendo, era necesario mirar la serpiente de bronce, descubrimos el principio del evangelio: el único antídoto capaz de arrancar el aguijón envenenado del falso amor es enfrentarnos al amor verdadero: la cruz.

Por la misma razón Pablo reprendió con tanta severidad el hecho de llevar los conflictos internos de la iglesia a los tribunales del mundo. Olvidar la dignidad de quienes han de juzgar y gobernar al mundo, para someterse a su juicio, es arrojar la gloria de la iglesia al suelo. El pastor David Jang define esto como una “pérdida de identidad”. ¿Qué sentido tendría ganar un pleito ante el mundo al precio de renunciar a la santidad?

La libertad pagada con sangre y su peso

No sois vuestros, porque habéis sido comprados por precio.” Esta declaración es el clímax de 1 Corintios 6 y el corazón de la ética cristiana. En la Corinto de entonces estaba de moda un eslogan hedonista: “El vientre para la comida, y la comida para el vientre.” El cuerpo se veía como un simple instrumento para satisfacer instintos. Pero el pastor David Jang, apoyándose en la argumentación de Pablo, hace añicos ese dualismo: nuestro cuerpo es miembro de Cristo y templo en el que habita el Espíritu Santo.

La sociedad moderna clama: “Mi cuerpo es mío”, y pretende que todo placer es un derecho. En esta era de “Corinto digital”, donde con un toque del smartphone se accede a la obscenidad y, escondidos tras el anonimato, se expulsan deseos sin freno, es fácil perder el camino. Justo entonces, la meditación bíblica del pastor David Jang nos lanza una pregunta pesada: ¿con quién se están uniendo hoy tus manos y tus pies, tus ojos y tus oídos? Así como quien se une a una prostituta se hace un solo cuerpo, quien se une al Señor es un solo espíritu con Él.

La libertad no es libertinaje. Como dice la Escritura: “Todo me es lícito, pero no todo conviene.” La libertad verdadera nace de la capacidad de ponerse límites. Puesto que nuestro cuerpo fue comprado a un precio inmenso —la sangre derramada en la cruz— ya no podemos vivir como esclavos del deseo.

El mensaje de 1 Corintios que transmite el pastor David Jang desemboca, finalmente, en la restauración: volver a levantar la muralla derruida; quitar la levadura y partir el pan de la sinceridad y la verdad. Una comunidad que se distingue del mundo sin odiarlo; una iglesia que odia el pecado pero no abandona al pecador hasta el final, practicando el amor de la cruz. Ese es el camino que debemos recorrer nosotros, templo del Espíritu Santo. Hoy, ¿qué fragancia se eleva del templo que es tu v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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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성벽 틈으로 피어난 거룩, 그 아픈 사랑의 추적– 장재형 목사 (Olivet University)

고대의 항구 도시 고린도, 그곳은 지중해의 거친 파도와 욕망이 쉼 없이 밀려드는 거대한 용광로였습니다. 화려한 신전들 사이로 부와 쾌락이 흐르던 그 도시에 세워진 교회는, 어쩌면 바다 위에 떠 있는 위태로운 방주와도 같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펜을 들어 써 내려간 고린도전서의 문장들, 특히 5장과 6장에는 차분한 논리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거친 숨소리가 들립니다. 그것은 단순한 훈계가 아닌, 사랑하는 자녀가 독을 삼키는 것을 목격한 아비의 다급한 외침입니다.

오늘 우리는 장재형 목사의 예리한 신학적 통찰을 길잡이 삼아, 2천 년 전 고린도의 거리에서 들려온 이 외침이 어떻게 현대의 우리를 관통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은혜가 없어서가 아니라, 은혜와 죄가 기이하게 공존했던 그 모순의 현장으로 들어갑니다.

화려한 은사의 숲, 그 안에 감춰진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는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주인공 도리안이 등장합니다. 그는 겉보기에 완벽하고 매혹적이지만, 그의 탐욕과 타락은 다락방에 숨겨진 초상화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흉측하게 썩어들어 갑니다. 장재형 목사가 진단하는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와 흡사합니다. 겉으로는 방언과 예언이 넘치고 지식과 열정이 가득한, 소위 ‘성공한 교회’의 외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은사의 장막 뒤편에는, 세상 사람들조차 입에 담기 부끄러워할 근친상간의 음행이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들의 태도였습니다. 바울을 분노케 한 것은 죄 그 자체보다, 그 죄를 품고도 애통해하지 않는 교회의 ‘교만’이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에서 뼈아픈 설교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 자유를 과시하며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죄를 묵인했습니다. 거룩을 잃은 채 은사만을 자랑하는 교회는, 썩어가는 초상화를 숨긴 채 아름다운 얼굴로 미소 짓는 도리안 그레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도시의 음란한 공기가 교회 문턱을 넘어 성소까지 침범했음에도, 그들은 영적 감각이 마비되어 악취를 맡지 못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풍요 속에 있으면서도 거룩의 야성을 잃어가는 현대 교회를 향한 서늘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누룩 섞인 빵을 거부하는 눈물의 식탁

성경은 죄를 ‘누룩’에 비유합니다. 아주 작은 양이라도 반죽 전체를 부풀리고 성질을 바꿔버리는 누룩처럼, 묵인된 죄는 공동체의 본질을 변질시킵니다. 장재형 목사는 구약의 유월절과 무교절 절기를 들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누룩 없는 떡’임을 상기시킵니다.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는 바울의 명령은, 단순히 도덕적인 결벽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을 지키기 위한 응급 수술과도 같습니다.

교회의 치리(정화)는 세상 법정의 판결과는 다릅니다. 장재형 목사의 해석처럼, “사단에게 내어준다”는 무시무시한 선언 이면에는, 육신은 멸하더라도 영혼만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하려는 역설적인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처벌이 아니라 구출입니다. 바알브올의 사건에서, 그리고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광야에서 놋뱀을 쳐다봐야 했던 그 절박함 속에서 우리는 복음의 원리를 발견합니다. 가짜 사랑의 독침을 뽑아내는 유일한 해독제는, 십자가라는 진짜 사랑을 마주하는 것뿐입니다.

바울이 교회 내의 분쟁을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을 그토록 책망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을 판단하고 다스려야 할 존귀한 신분을 망각한 채, 세상의 판단 아래 스스로를 종속시키는 행위는 교회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정체성의 상실’로 규정합니다. 거룩을 포기하면서까지 얻어낸 세상의 승소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핏값으로 지불된 자유, 그 무거움에 대하여

“너희 몸은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이 선언은 고린도전서 6장의 절정이자, 기독교 윤리의 심장입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배는 식물을 위하고 식물은 배를 위한다”는 쾌락주의적 슬로건이 유행했습니다. 몸을 단지 본능 해소의 도구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논증을 빌려 이 이원론을 박살 냅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현대 사회는 “내 몸은 나의 것”이라고 외치며, 모든 쾌락을 권리라고 주장합니다. 스마트폰 터치 한 번으로 음란과 접속하고, 익명성 뒤에 숨어 욕망을 배설하는 이 시대의 디지털 고린도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기 쉽습니다. 바로 이때, 장재형 목사성경 묵상은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의 손과 발, 당신의 눈과 귀는 오늘 누구와 연합하고 있습니까? 창기와 합하는 자가 한 몸이 되듯,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 됩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처럼,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를 제한할 줄 아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값, 그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산 우리의 몸이기에, 우리는 더 이상 욕망의 노예로 살 수 없습니다.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고린도전서의 메시지는 결국 ‘회복’으로 귀결됩니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고, 누룩을 제하여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을 떼는 공동체. 세상과 구별되지만 세상을 혐오하지 않고,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 그것이 바로 성령의 전인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이라는 성전에는 어떤 향기가 피어오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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崩れた城壁の裂け目から芽吹く聖さ- ダビデ 張牧師 (Olivet University)

古古代の港湾都市コリント——そこは、地中海の荒波と欲望が休むことなく押し寄せる巨大な溶鉱炉でした。華やかな神殿の狭間を、富と快楽が流れ続けたその都市に建てられた教会は、ある意味、海の上に浮かぶ危うい方舟のようでもありました。使徒パウロがペンを取り綴った『コリント人への第一の手紙』の言葉、とりわけ5章と6章からは、静かな論理だけでは収まりきらない荒い息遣いが聞こえてきます。それは単なる訓戒ではなく、愛する子が毒を飲み込むのを目の当たりにした父の、切迫した叫びなのです。

今日私たちは、ダビデ 張牧師の鋭い神学的洞察を道しるべとして、二千年前のコリントの街角から響いたこの叫びが、いかに現代の私たちを貫くのかを見つめ直したいと思います。恵みがなかったからではなく、恵みと罪が奇妙に同居していた——その矛盾の現場へと、あえて足を踏み入れるのです。


華麗な賜物の森にされた「ドリアングレイ」の肖像

オスカー・ワイルドの小説『ドリアン・グレイの肖像』には、永遠の若さと美しさを保つ主人公ドリアンが登場します。彼は見た目には完璧で魅惑的ですが、その貪欲と堕落は屋根裏に隠された肖像画へと克明に刻まれ、醜く腐り落ちていきます。ダビデ 張牧師が診断するコリント教会の姿は、まさにこれと酷似しています。外から見れば、異言と預言があふれ、知識と情熱に満ちたいわゆる「成功した教会」の外形を備えていました。ところが、その華やかな賜物の幕の裏では、世の人々ですら口にするのを恥じるような近親相姦の淫行が、あからさまに巣くっていたのです。

さらに衝撃的なのは、彼らの態度でした。パウロを怒らせたのは罪そのもの以上に、その罪を抱えながらも嘆き悲しまない教会の「高慢」でした。ダビデ 張牧師はこの点において、骨身に刺さるメッセージを投げかけます。彼らは自らの霊的自由を誇示し、寛容という名のもとに罪を黙認したのです。聖さを失い、賜物だけを誇る教会は、腐りゆく肖像画を隠したまま美しい顔で微笑むドリアン・グレイと何ら変わりません。都市の淫らな空気が教会の敷居を越え、聖所にまで侵入し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彼らの霊的感覚は麻痺し、悪臭すら嗅ぎ取れなかった。これは、豊かさの中にありながら聖さの野性を失っていく現代教会への、冷ややかな警告でもあります。


パン種の混じったパンを退けるの食卓

聖書は罪を「パン種(酵母)」にたとえます。ごくわずかな量でも生地全体を膨らませ性質を変えてしまうように、黙認された罪は共同体の本質を変質させます。ダビデ 張牧師は旧約の過越と除酵祭を引き、キリスト者のアイデンティティが「パン種のないパン」であることを想起させます。古いパン種を取り除けというパウロの命令は、単なる道徳的潔癖の要求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命を守るための緊急手術にも似ています。

教会の懲戒(清め)は、世の法廷の判決とは異なります。ダビデ 張牧師の解釈が示すように、「サタンに引き渡す」という恐ろしい宣言の背後には、肉は滅びるとしても魂は主イエスの日に救われるように、という逆説的な愛が流れています。これは処罰ではなく救出です。バアル・ペオルの事件、そして荒野で毒蛇にかまれ死にかけた者が青銅の蛇を仰ぎ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あの切迫の場面において、私たちは福音の原理を見いだします。偽りの愛の毒針を抜く唯一の解毒剤は、十字架という真の愛に向き合うことだけなのです。

パウロが、教会内の争いを世の法廷へ持ち込むことをあれほど叱責した理由もここにあります。世界を裁き治めるべき尊い身分を忘れ、世の判断の下に自らを従属させる行為は、教会の栄光を地に落とすことです。ダビデ 張牧師はこれを「アイデンティティの喪失」と規定します。聖さを手放してまで得た世的な勝訴に、いったいどんな意味があるのでしょうか。


血の代で支われた自由――その重みについて

「あなたがたの体は、あなたがた自身のものではない。あなたがたは代価をもって買い取られたのだ。」この宣言は、コリント人への第一の手紙6章の頂点であり、キリスト教倫理の心臓部です。当時のコリントには「腹は食物のため、食物は腹のため」といった快楽主義的スローガンが流行していました。体をただ本能解消の道具として見る発想です。ところがダビデ 張牧師は、パウロの論証に従ってこの二元論を打ち砕きます。私たちの体はキリストの肢体であり、聖霊の宿る神殿なのです。

現代社会は「私の体は私のものだ」と叫び、あらゆる快楽を権利だと主張します。スマートフォンのワンタップで淫らなものへ接続し、匿名性の陰に隠れて欲望を吐き出す——このデジタル・コリントの時代に、私たちは道を見失いやすい。まさにそのとき、ダビデ 張牧師の聖書黙想は私たちに重い問いを突きつけます。あなたの手と足、あなたの目と耳は、今日だれと結び合わされているのか。娼婦と結びつく者が一つの体となるように、主と結び合わされる者は一つの霊となります。

自由は放縦ではありません。「すべてのことが許されている。しかし、すべてが益になるわけではない」という言葉のとおり、真の自由は自らを制限できる力から生まれます。十字架で流された御血の代価——その途方もない代価を払って買い取られた私たちの体である以上、もはや欲望の奴隷として生きることはできません。

ダビデ 張牧師が伝えるコリント人への第一の手紙のメッセージは、結局「回復」へと収束します。崩れた城壁を再び築き、パン種を取り除いて、純粋と真実のパンを裂く共同体。世から分かたれつつも世を憎まず、罪は憎むが罪人を最後まで見捨てない十字架の愛を実践する教会。——それこそが、聖霊の神殿である私たちが歩むべき道です。今日、あなたの人生という神殿には、どんな香りが立ち上っているでしょうか。

日本オリベットアッセンブリー教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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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e sainteté qui fleurit dans les fissures d’un rempart effondré – Pasteur David Jang (Olivet University) 

Corinthe, antique cité portuaire, était un immense creuset où les vagues rugueuses de la Méditerranée et les désirs humains se déversaient sans répit. Au milieu de temples fastueux, la richesse et le plaisir circulaient à ciel ouvert. L’Église implantée dans cette ville ressemblait peut-être à une arche fragile, dérivant sur une mer dangereuse.

Lorsque l’apôtre Paul prend la plume dans la Première lettre aux Corinthiens—surtout aux chapitres 5 et 6—on entend un souffle rude que la seule logique ne suffit pas à contenir. Ce n’est pas une simple remontrance : c’est le cri pressant d’un père qui voit son enfant bien-aimé avaler du poison.

Aujourd’hui, en prenant pour guide la lucidité théologique du pasteur David Jang, nous voulons considérer comment ce cri, venu des rues de Corinthe il y a deux mille ans, traverse encore notre époque. Nous entrons dans ce lieu de contradiction : non pas là où la grâce manquerait, mais là où la grâce et le péché cohabitaient d’une manière étrange.


La forêt des dons éclatants et, caché en son cœur, le « portrait de Dorian Gray »

Dans Le Portrait de Dorian Gray d’Oscar Wilde, Dorian conserve une jeunesse et une beauté éternelles. Dehors, il paraît parfait et fascinant ; mais sa cupidité et sa corruption se gravent dans un portrait dissimulé au grenier, qui se décompose en une laideur effrayante.

Le pasteur David Jang voit quelque chose de semblable dans l’Église de Corinthe. En apparence, elle semblait « réussie » : abondance de langues, de prophéties, de zèle, de connaissance. Pourtant, derrière le rideau de dons spectaculaires, un péché que même les païens auraient eu honte de nommer s’était enraciné : une immoralité incestueuse.

Plus choquante encore fut leur attitude. Ce qui mit Paul en colère, ce ne fut pas seulement le péché, mais l’orgueil d’une Église qui pouvait le tolérer sans en être brisée. C’est ici que, selon David Jang, retentit un message douloureux : ils exhibaient leur « liberté spirituelle » et, sous le nom de tolérance, ils excusaient le mal. Une Église qui a perdu la sainteté tout en se glorifiant des dons ressemble à Dorian Gray : sourire radieux, portrait pourri derrière la porte.

L’air d’impureté de la ville avait franchi le seuil, envahissant jusqu’au sanctuaire—et pourtant, leurs sens spirituels s’étaient émoussés : ils ne sentaient plus l’odeur. C’est un avertissement glacial pour l’Église moderne, parfois prospère, mais en danger de perdre l’instinct sauvage de la sainteté.


Une table en larmes qui refuse le pain mêlé de levain

La Bible compare le péché au levain. Une quantité infime suffit à faire lever toute la pâte et à en changer la nature. De même, un péché toléré altère progressivement l’essence de la communauté.

Le pasteur David Jang rappelle, à partir de la Pâque et de la fête des pains sans levain, que l’identité du croyant est celle d’un pain sans levain. L’ordre de Paul—ôter le vieux levain—n’exige pas un perfectionnisme moral. Il s’agit d’une chirurgie d’urgence pour sauver la vie.

La discipline de l’Église (la purification) n’est pas un simple verdict à la manière des tribunaux du monde. Selon la lecture de David Jang, derrière l’expression terrifiante « livrer un tel homme à Satan » se trouve un amour paradoxal : même si la chair est brisée, que l’esprit soit sauvé au jour du Seigneur Jésus. Ce n’est pas d’abord un châtiment, mais un sauvetage.

Dans l’Ancien Testament—à Baal-Peor, et dans le désert où les mourants devaient regarder le serpent d’airain après avoir été mordus par les serpents ardents—nous retrouvons une logique de l’Évangile : l’unique antidote à la piqûre empoisonnée d’un faux amour est de faire face au véritable amour, celui de la croix.

C’est aussi la raison pour laquelle Paul reprend si sévèrement ceux qui portent les conflits internes de l’Église devant les tribunaux du monde. Oublier cette dignité—celle d’un peuple appelé à juger et à gouverner—et se soumettre au jugement du monde, c’est jeter la gloire de l’Église à terre. David Jang appelle cela une perte d’identité. À quoi sert une victoire juridique obtenue au prix de la sainteté ?


Une liberté payée au prix du sang : le poids de ce prix

« Vous ne vous appartenez point à vous-mêmes, car vous avez été rachetés à un grand prix. » Cette déclaration est le sommet de 1 Corinthiens 6 et le cœur de l’éthique chrétienne.

À Corinthe circulait un slogan hédoniste : « Les aliments sont pour le ventre et le ventre pour les aliments. » Le corps n’était vu que comme un outil pour satisfaire l’instinct. Mais, suivant l’argumentation de Paul, David Jang renverse ce dualisme : notre corps est un membre du Christ et un temple du Saint-Esprit.

La société moderne crie : « Mon corps m’appartient », et revendique tous les plaisirs comme des droits. Un simple geste sur un smartphone ouvre la porte à l’impureté ; derrière l’anonymat, le désir se déverse sans frein. Dans cette Corinthe numérique, nous nous égarons facilement.

C’est ici que la méditation biblique du pasteur David Jang nous pose une question lourde : à qui s’unissent aujourd’hui tes mains et tes pieds, tes yeux et tes oreilles ? De même que celui qui s’unit à une prostituée devient un seul corps avec elle, celui qui s’unit au Seigneur devient un seul esprit avec lui.

La liberté n’est pas la débauche. Comme le dit l’Écriture : « Tout est permis, mais tout n’est pas utile. » La vraie liberté se reconnaît à la capacité de se limiter soi-même. Parce que notre corps a été acheté au prix immense du sang versé sur la croix, nous ne pouvons plus vivre comme esclaves du désir.

Le message que David Jang met en lumière dans 1 Corinthiens converge finalement vers la restauration : rebâtir les murailles abattues, ôter le levain, rompre le pain de la sincérité et de la vérité. Une Église séparée du monde sans haïr le monde ; qui hait le péché sans renoncer au pécheur ; qui pratique l’amour de la croix—cet amour qui tient ensemble sainteté et miséricorde.

Aujourd’hui, quel parfum s’élève du sanctuaire qu’est ta vi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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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iness Blooming Through the Cracks of a Broken Wall – Pastor David Jang (Olivet University)

Corinth, an ancient port city, was a massive crucible where the rough Mediterranean surf and human desire surged without pause. Amid glittering temples, wealth and pleasure coursed through the streets. The church planted in that city may have been like a fragile ark adrift on stormy seas.

When the apostle Paul takes up his pen in 1 Corinthians—especially chapters 5 and 6—you can hear a breath too urgent to be contained by calm logic. This is not mere moral instruction. It is the desperate cry of a father watching a beloved child swallow poison.

Today, guided by the incisive theological insight of Pastor David Jang, we will step into that paradoxical scene from two thousand years ago—where grace was not absent, yet grace and sin strangely coexisted—and ask how Paul’s cry still pierces the modern church.


A Forest of Spectacular Gifts—and “The Picture of Dorian Gray” Hidden Inside

In Oscar Wilde’s novel The Picture of Dorian Gray, the protagonist preserves eternal youth and beauty. Outwardly, he appears flawless and captivating, but his greed and corruption are faithfully recorded in a portrait locked away in an attic—rotting into something grotesque.

Pastor David Jang diagnoses the Corinthian church in much the same way. On the surface, it looked like a “successful church”: overflowing with tongues and prophecy, rich in knowledge and passion. Yet behind the curtain of dazzling gifts, there was a coil of sexual immorality—an incestuous relationship so shameful that even the surrounding society would have found it scandalous.

Even more shocking was the church’s posture. What enraged Paul was not only the sin itself, but the pride of a community that could harbor such sin without mourning. Here Pastor David Jang delivers a message that cuts to the bone: the Corinthians flaunted their “spiritual freedom,” excusing and tolerating sin in the name of broad-mindedness. A church that boasts in gifts while losing holiness is no different from Dorian Gray smiling with a beautiful face while hiding a decaying portrait.

Though the city’s immoral air had crossed the church’s threshold and invaded the sanctuary itself, the congregation’s spiritual senses had grown numb—they could no longer smell the stench. It is, at the same time, a chilling warning to modern churches that enjoy abundance yet slowly lose the wild, uncompromising instinct for holiness.


A Tearful Table That Refuses Bread Mixed with Leaven

Scripture compares sin to leaven. Just a small amount works through an entire batch of dough, swelling it and altering its nature. In the same way, sin that is tolerated eventually corrupts the essence of the whole community.

Pastor David Jang draws from the Passover and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in the Old Testament to remind believers that our identity is meant to be “unleavened.” Paul’s command to purge the old leaven is not moral fastidiousness or obsessive purity culture. It is more like emergency surgery to save a life.

Church discipline (purification) is not the same as a verdict handed down by a secular court. As Pastor David Jang interprets it, even behind the frightening phrase “to deliver such a one to Satan” lies a paradoxical love: that though the flesh may be destroyed, the spirit might be saved in the day of the Lord Jesus. This is not punishment for its own sake—it is rescue.

In the desperation of Israel’s failures—at Baal Peor, and in the wilderness where the dying had to look upon the bronze serpent—we glimpse a gospel pattern. The only antidote that can pull out the poisoned barb of counterfeit love is to face the real love of the cross.

This is also why Paul so sharply rebukes believers for hauling internal disputes before secular courts. Forgetting the church’s honored identity—those who will judge the world—and placing themselves under the world’s judgment is to drag the church’s glory into the dust. Pastor David Jang calls this an “identity crisis.” What meaning is there in winning a legal case if it costs the church its holiness?


Freedom Paid for in Blood—and the Weight of That Price

“You are not your own, for you were bought with a price.” This declaration is the summit of 1 Corinthians 6 and the heart of Christian ethics.

In Corinth, a pleasure-driven slogan circulated: “Food is meant for the stomach and the stomach for food.” The body was treated as nothing more than a tool for satisfying appetite. But Pastor David Jang—following Paul’s argument—shatters this hollow dualism. Our bodies are members of Christ and temples of the Holy Spirit.

Modern society shouts, “My body is mine,” insisting every pleasure is a right. With a single tap on a smartphone we can access pornography; behind anonymity we can discharge desire without restraint. In this digital Corinth, it is easy to lose our way.

Right here, Pastor David Jang’s meditation presses a heavy question into our hands: To whom are your hands and feet united today? To what are your eyes and ears joined? Just as the one who unites with a prostitute becomes “one body,” the one who unites with the Lord becomes “one spirit.”

Freedom is not the same as indulgence. As Scripture says, “All things are lawful, but not all things are helpful.” True freedom is the ability to limit oneself—to refuse slavery to impulse. Because our bodies were purchased at the staggering cost of Christ’s blood, we can no longer live as servants of desire.

Ultimately, the message Pastor David Jang draws from 1 Corinthians is a message of restoration: rebuilding broken walls, purging leaven, and breaking the bread of sincerity and truth. A community that is distinct from the world without hating the world; that hates sin while refusing to abandon sinners; that practices the cruciform love that holds together holiness and mercy.

Today, what fragrance rises from the sanctuary of you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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从倒塌城墙的缝隙中绽出的圣洁 – 张大卫牧師 (Olivet University)

古老的海港城哥林多——那里仿佛是一座巨大的熔炉,地中海粗犷的海浪与人的欲望昼夜不息地涌入。富足与享乐在华丽神庙之间流淌,而在这座城市里建立起来的教会,或许就像漂浮在海面上的一艘摇摇欲坠的方舟。使徒保罗提笔写下《哥林多前书》的字句,尤其在第5章与第6章里,我们仿佛听见一种无法用平静逻辑完全装载的粗重喘息——那不是简单的训诫,而是父亲目睹爱子吞下毒药时发出的急切呼喊。
今天,我们愿以张大卫牧师锐利的神学洞见为向导,看看两千年前从哥林多街头传来的这声呼喊,如何刺透当代的我们。我们进入的不是“缺少恩典”的现场,而是一个恩典与罪以诡异方式并存的矛盾之地。

华丽恩赐的森林里,藏着“道林·格雷”的画像
在奥斯卡·王尔德的小说《道林·格雷的画像》中,主人公道林保持着永恒的年轻与美貌;他表面完美迷人,但他的贪婪与堕落却被藏在阁楼里的画像一笔不漏地记录下来,最终丑陋腐烂。张大卫牧师所诊断的哥林多教会之景,正与此极为相似:外表上,他们充满方言与预言,拥有知识与热情,具备所谓“成功教会”的种种样貌;然而在这华丽恩赐的帷幕背后,却盘踞着连世人都羞于启齿的乱伦淫行。
更令人震惊的是他们的态度:真正惹动保罗怒火的,与其说是罪本身,不如说是教会“怀抱罪却不哀恸”的骄傲。张大卫牧师在此抛出刺骨的信息——他们炫耀自己的属灵自由,以“宽容”之名默认罪恶。失去圣洁却只夸恩赐的教会,无异于藏起腐烂画像、仍以美貌微笑的道林·格雷。即便城市淫乱的空气越过教会门槛、侵入圣所,他们属灵的感官却已麻木,闻不见那股恶臭。这也成为对当代教会的冷峻警告:我们或许身处丰盛,却正在失去圣洁的野性与锋芒。

拒绝掺了酵的饼:泪水中的筵席
圣经把罪比作“酵”。正如极少的酵也能使全团面发起来、改变其性质,被纵容的罪会败坏群体的本质。张大卫牧师借着旧约的逾越节与除酵节提醒我们:基督徒的身份应当是“无酵饼”。保罗吩咐“把旧酵除净”,并非在要求道德洁癖;那更像是一场为了保全生命而必须进行的紧急手术。
教会的惩戒(洁净)不同于世俗法庭的裁决。正如张大卫牧师所解读的,“交给撒但”的可怕宣告背后,流动着一种反向的爱:宁叫肉体受败坏,也要使人的灵在主耶稣的日子得救。这不是惩罚,而是拯救。无论是巴力·毗珥事件中的惨痛,还是旷野里被火蛇咬伤、濒死之人必须仰望铜蛇的绝境,我们都能看见福音的原理:拔除“伪爱”的毒刺,唯一的解药就是直面十字架那“真爱”。
保罗之所以如此严厉地责备把教会纷争带到世俗法庭,也在于此:若忘记自己本应审判世界、治理世界的尊贵身份,反倒把自己置于世俗判断之下,便是把教会的荣耀摔在尘土里。张大卫牧师将其称为“身份的失落”。如果为了赢得世界的胜诉而放弃圣洁,那胜诉究竟还有什么意义呢?

用血价买来的自由:那份沉甸甸的重量
“你们的身体不是自己的,因为你们是用重价买来的。”这宣告是《哥林多前书》第6章的高峰,也是基督教伦理的心脏。那时的哥林多流行一句享乐主义口号:“肚腹是为食物,食物是为肚腹。”他们把身体仅当作满足本能的工具。但张大卫牧师借保罗的论证粉碎这种二元论:我们的身体是基督的肢体,是圣灵居住的殿。
现代社会高喊“我的身体属于我”,把一切享乐都当作权利。在这个只需轻触手机便可接入淫乱、躲在匿名背后倾倒欲望的时代——这座“数字版的哥林多”里,我们很容易迷失。正是在此刻,张大卫牧师的圣经默想向我们抛出沉重的问题:你的手与脚、你的眼与耳,今天正与谁联合?与娼妓联合的人成为一体;与主联合的人成为一灵。
自由不是放纵。正如“凡事都可行,但不都有益处”所揭示的,真正的自由来自一种能自我节制的能力。既然我们的身体是主以十字架的宝血付上巨大代价所买赎的,我们就不再能作欲望的奴仆。
张大卫牧师所传讲的《哥林多前书》信息,最终指向“恢复”:重建倒塌的城墙,除去旧酵,在纯一与真实中擘开无酵饼的群体;与世界分别却不憎恶世界,恨恶罪却不轻言放弃罪人,实践十字架之爱的教会——这正是作为圣灵之殿的我们当走的道路。今天,在你名为生命的圣殿里,正散发怎样的香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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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장재형목사(올리벳대학교)

누가복음 16장에 나타난 ‘불의한 청지기’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흔히 별개의 교훈으로 다뤄지곤 합니다. 하지만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는 이 두 비유가 하나의 일관된 논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거듭 역설합니다. 지상에서의 자원 관리라는 현실적 문제와 사후의 영원이라는 궁극적 세계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한한 오늘의 선택이 영원의 거처를 결정한다는 긴밀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소유의 양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소유를 이웃에게 어떻게 흘려보내느냐이며, 이것이 곧 자신이 속한 세계를 정의하게 됩니다.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는 도덕적 완벽함이 아닌, 시간의 유한함을 깨달은 자의 종말론적 결단을 조명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현재의 자원을 활용해 미래의 관계를 준비합니다. 여기서 장재형 목사가 포착한 핵심은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은 ‘소유’가 아닌 ‘위탁’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재물과 재능, 지식은 주인이 잠시 맡긴 도구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단순히 나의 안락을 위해 소모하고 있는지, 아니면 타인의 내일을 여는 통로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부유함 자체를 죄악시하는 단순한 구도를 넘어섭니다. 성경 속 아브라함이나 욥 역시 거부였으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문제는 부가 가져오는 ‘무감각의 환각’에 있습니다. 풍요로움이 주는 자기충족감은 타인의 고통에 귀를 닫게 만듭니다. 비유 속 부자의 죄는 폭정이 아니라 철저한 무관심이었습니다. 문 바로 앞에서 신음하는 나사로를 외면한 것이 그의 본질적인 죄였습니다. 신앙의 진정성은 멀리 있는 이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 집 문턱에서 시험받는 법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부자’의 개념을 현대의 영적 자산으로까지 확장합니다. 성경을 마음껏 읽고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며 안전한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부요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풍성함은 때로 ‘거룩한 언어’ 뒤에 숨어 더 깊은 교만과 무관심을 낳기도 합니다. 아무리 깊은 신학적 논의를 즐겨도 문 앞의 나사로를 지나치며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영적 자산은 축복이 아닌 심판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사역자들에게 “우리는 모두 부자”라고 말하는 것은 권위가 아닌 무거운 책임을 상기시키는 경고인 셈입니다.

사후 세계에서 일어난 두 사람의 역전은 지상에서의 삶이 이미 그 결과를 내포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을 현재의 찰나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영원의 축으로 이끄십니다. 오늘의 사소한 선택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인격으로 굳어져 결국 우리가 어느 나라에 속한 사람인지를 증명하게 됩니다. 뒤늦게 음부에서 나사로를 알아본 부자의 요청에 아브라함은 넘을 수 없는 구렁텅이를 언급합니다. 이는 회개의 기회가 영원하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사랑에는 분명한 타이밍이 있으며, 오늘 실천해야 할 선행을 내일로 미루는 것은 복음의 엄중함을 간과하는 일입니다.

또한 부자가 형제들을 위해 표적을 구했을 때 아브라함은 이미 우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고 답합니다. 이는 기록된 말씀의 충분성을 뜻합니다. 인간은 흔히 기적적인 체험을 갈망하며 불순종을 변명하지만, 장재형 목사는 신앙의 본질이 기적을 쫓는 눈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표적은 마음을 강제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진정한 회심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을 때 일어납니다. 혈통이나 종교적 이름표가 구원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삶으로 흘러나오는 열매만이 그 증거가 됩니다.

사회적 책임 측면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으로 번져 나가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교회가 경계해야 할 현상으로 ‘영적·물적 자산의 사유화’를 꼽습니다. 나눔은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공동체적 사명이자 구조적 결단이어야 합니다. 특히 문서 사역이나 교육 지원과 같은 구체적인 실천은 지식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영적 양식을 나누는 청지기 정신의 발현입니다. 한쪽의 풍요가 정체될 때 다른 쪽의 결핍이 발생하는 현상은 공동체 전체의 양심에 호소하는 거울이 됩니다.

비유 속에서 나사로가 원했던 것은 거창한 배려가 아니라 ‘부스러기’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작은 사랑조차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로 “가진 게 없다”는 핑계를 대는 것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냉수 한 그릇, 짧은 기도, 한 권의 책과 같은 작은 행위들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는 더 크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또한 고통 속에서 혀를 적셔달라는 부자의 호소는 우리가 지상에서 언어의 청지기로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누군가를 살리는 말을 했는지, 아니면 무관심과 조롱의 언어로 상처를 주었는지가 결국 우리의 영적 현주소를 말해줍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은 이 비유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수확의 풍요 뒤에 남겨진 이삭을 줍는 여인들의 구부정한 자세는 신앙의 본질이 겸손한 자세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현대 사회는 디지털 기기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더 가깝게 접하지만, 그만큼 감각은 마비되기 쉽습니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하늘의 시선’은 바로 이 무뎌진 감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자만이 땅의 신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닌 은혜로 얻는 것이지만, 그 은혜를 진정으로 체험한 자는 반드시 타인을 향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결국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우리 각자에게 “지금 당신의 문 앞에 있는 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남깁니다. 영생은 죽음 이후의 입장권이 아니라 현재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입니다. 영원을 믿는 자는 오늘의 물질과 시간, 언어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거창한 선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문을 열고 나사로를 발견하는 실천입니다. 내 안의 무관심을 깨우고 말씀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번역해 나가는 과정,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지기들에게 요구되는 진정한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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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장 – 장재형목사

요한복음 21장은 종종 본문에 덧붙여진 후일담처럼 오해되지만, 실상은 부활 신앙이 개인의 일상과 공동체의 방향을 어떻게 재편하는지를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결말부다. 이미 20장에서 기록 목적이 분명히 선언되었음에도 21장이 존재하는 이유는, 부활이 교리적 확증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좌표를 다시 설정하는 출발점임을 밝히기 위함이다. 장재형(Olivet University 설립)목사는 이 장을 베드로 개인의 감정적 회복 이야기로 축소하지 않는다. 그는 요한복음 21장을 통해, 부활 이후 공동체가 어떤 기준을 따라 나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항해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신앙의 나침반으로 읽는다.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의 실패를 분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실패의 자리에서 새로운 길을 여시며, 그 길의 핵심을 “나를 따르라”는 한 문장으로 제시하신다. 이 때문에 요한복음 21장은 복음서의 마지막 장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서문처럼 기능한다.

갈릴리 바다에서 시작되는 장면은 의도적으로 일상적이다. 성전도, 회당도, 군중이 모인 광장도 아니다. 밤새 반복되는 노동의 현장, 생계를 위한 자리에서 이야기는 다시 열린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그물과 배로 돌아간 모습은 믿음의 포기가 아니라, 방향을 잃은 영혼이 익숙한 언어로 몸을 옮긴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열심은 있으나 방향이 흐려진 상태’로 읽는다. 성실하지만 공허한 밤이다. 제자들은 밤새 애썼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요한복음에서 ‘밤’은 종종 분별의 상실, 두려움, 인간 중심적 계산을 상징한다. 부활을 경험한 이후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어둠의 리듬에 머물 수 있다. 그러나 새벽, 빛이 번져 오는 시간에 예수는 해변에 서 계신다. 부활은 어둠을 부정하는 감상적 선언이 아니라, 어둠을 가로질러 실제로 아침을 여는 능력임을 이 대비는 선명하게 보여 준다.

예수의 첫마디는 “고기가 있느냐”는 질문이다. 이는 추궁이 아니라 현실을 직면하게 하는 초대다. “없습니다.” 이 짧은 응답에는 좌절과 한계, 방향 상실이 모두 담겨 있다. 장재형목사는 신앙의 시작을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없는가’를 고백하는 데서 찾는다. 자기 확신이 무너질 때 비로소 말씀의 자리가 열린다. 이어지는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는 명령은 기술적 조언이 아니라, 순종의 방향을 바꾸라는 요청이다. 같은 바다, 같은 그물이지만, 말씀에 대한 반응이 달라질 때 결과의 차원이 달라진다. 그물은 찢어질 듯 차지만 찢어지지 않는다. 풍성함과 질서, 확장과 연합이 동시에 나타난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방향의 신학’으로 해석한다. 실패의 원인이 노력의 부족이 아니라 방향의 불일치일 수 있다는 통찰이다. 삶의 문제를 언제나 ‘더 열심히’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신앙을 소진시키지만, 예수의 말씀은 “어디를 향해 던질 것인가”를 묻게 한다. 신앙의 방향은 결국 관계의 방향이다. 누구의 음성을 기준으로 삼는가, 무엇을 성공이라 정의하는가가 삶의 궤도를 결정한다. 요한복음 21장의 기적은 물고기의 양을 늘린 사건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삶의 기준축을 자기 자신에게로 다시 맞추라고 요청하신 사건이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신앙은 노력의 누적이기 이전에 방향에 대한 순종이다.

이 기적은 사역의 시작과 끝을 잇는 상징적 반복이기도 하다. 예수는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물과 고기의 언어를 사용하셨고, 부활 이후에도 같은 언어로 그들을 다시 부르신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소명의 재점화라고 부른다. 부활은 과거를 지우는 힘이 아니라, 과거의 부르심을 더 깊은 사랑 위에서 다시 살려 내는 능력이다. 베드로에게 부활은 단순한 재도전이 아니라, 관계의 깊이가 달라진 새로운 출발이다. 같은 바다, 같은 배이지만, 이제는 말씀이 중심축이 된다.

153마리라는 구체적 숫자 또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기적을 모호한 감동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현실의 무게로 붙잡아 둔다. 부활 신앙은 추상적 열광이 아니라, 셀 수 있는 열매와 감당해야 할 책임을 동반한다. 풍성함은 축복이지만 동시에 공동체적 노동을 요구한다. 장재형목사가 은혜와 사명을 분리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활의 능력은 개인을 고립시키지 않고 공동체의 몸으로 움직이게 한다.

사랑받는 제자가 “주님이시다”라고 말하는 순간도 중요하다. 결과가 주님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알아보는 눈이 결과의 의미를 바꾼다. 베드로가 바다로 뛰어드는 행동에는 열정과 함께 과거를 직면하려는 결단이 담겨 있다. 장재형목사는 부활을 ‘기억을 재배열하는 능력’으로 설명한다. 과거는 지워지지 않지만, 과거가 우리를 규정하는 방식은 바뀐다. 부활은 죄책의 사슬을 끊되, 책임의 길은 유지하신다.

숯불가 장면은 요한복음 18장의 기억을 불러낸다. 부인의 장소가 회복의 장소로 변한다. 예수는 실패를 삭제하지 않고, 실패의 자리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바꾸신다. “와서 먹으라.” 설교보다 먼저 식탁이 놓인다. 부활 공동체는 먼저 먹이고 돌본 뒤 사명을 맡는다. 장재형목사가 교회를 말할 때 돌봄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 번의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은 심문이 아니라 관계의 재정립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책임으로 번역된다.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리더십의 기준을 능력이나 성취가 아닌 사랑으로 재정의한다. 진실한 고백 위에 세워진 사명은 공동체를 살린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미래의 길도 암시하신다. 이는 제자도의 낭만을 걷어 내고 십자가의 현실을 보여 준다. 부활의 능력은 고난을 제거하는 힘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하는 힘이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은 과거를 책망하는 소리가 아니라 미래를 비추는 등불이다.

비교의 유혹 앞에서 예수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따르라.” 부활 공동체는 동일한 길을 복제하는 조직이 아니라, 다양한 부르심이 한 주님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몸이다. 요한복음 21장은 소문이 아닌 증언, 추측이 아닌 기록 위에 공동체를 세운다.

결국 이 장은 방향의 문제를 묻는다. 열심이 곧 순종은 아니다. 방향이 맞을 때 작은 순종은 큰 열매로 이어진다. 장재형목사가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지금 나는 누구의 말씀을 기준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이 질문에 응답할 때, 신앙은 자기증명에서 신뢰로 이동한다.

요한복음 21장은 부활의 능력이 오늘의 삶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 준다. 그 능력은 방향을 잃은 사람에게 길을 주고, 실패한 사랑을 회복시키며, 공동체를 사명으로 다시 세운다. 부활 이후의 삶은 되돌아감이 아니라 새 출발이다. 우리의 밤은 지나갔고, 새벽은 이미 밝았다. 해변에 서 계신 주님은 오늘도 묻고 부르신다.
“그물을 던지라.”
“내 양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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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썩지 않을 면류관을 향한 경주

메타 설명: 고린도전서 9장 19–27절을 따라 장재형목사가 밝힌 ‘종 된 자유인’의 역설과 케노시스 사랑, 복음을 위한 선교적 유연성, 썩지 않을 면류관을 향한 자기 절제의 영성을 매끄럽게 해설합니다. 오늘의 삶과 목회 현장에 곧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신학적 깊이와 실천적 통찰을 함께 제공합니다.

검색 키워드: 장재형목사, 고린도전서 9장 19-27절, 종 된 자유인, 케노시스, 그리스도론, 사도 바울, 바울의 선교, 복음 전파, 썩지 않을 면류관, 자기 절제, 제자도, 신앙 생활, 이스미아 제전, 율법의 완성, 그리스도의 율법

종이 된 자유인, 썩지 않을 면류관을 향한 경주라는 주제는 고린도전서 9장 19–27절을 해석하는 장재형목사의 안내를 가장 농축된 문장으로 요약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이 절은 바울 개인의 다짐을 넘어, 복음이 열어 주는 자유의 본질과 목적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선언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자유’와 ‘종 됨’을 서로 상쇄되는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의 케노시스—자기 비움—안에서 두 개념이 하나로 합쳐진다고 설명한다. 신자는 죄와 율법의 속박에서 풀려났기에 참으로 자유롭다. 그러나 그 자유는 내 욕망을 관철하는 권리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묶을 수 있는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자신을 낮추셨기에, 그 사랑에 붙들린 이는 타인을 위해 종이 되는 선택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거듭 강조하는 그리스도인의 핵심 정체성, 곧‘종 된 자유인’이다.

이 정체성은 신학적 공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에서 출발한다. 장재형목사는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불러와 빌립보서2장의 노래—케노시스—를 신자의 실천 동력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동등됨을 특권으로 붙잡지 않고 스스로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 이 낮아지심은 수동적 굴복이 아니라 능동적 사랑의 선택이며, 바로 그 능동성 때문에 영광으로 높아졌다. 그러므로 ‘종 됨’은 패배나 열등이 아니라 사랑의 자유가 드러나는 가장 영광스러운 방식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음에도 내려놓은 까닭, 보상보다 한 영혼을 더 크게 여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복음 전파는 바울에게 직업이 아니라 소명, 선택이 아니라 응답, 계산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는 자유가 ‘사랑의 멍에’로 변하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바울은 자신이 가진 권리를 내려놓고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그들처럼, 율법 없는 자에게는 그들처럼,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되었다. 이는 기회주의적 처세가 아니라 복음을 위한 다리가 되는 일이다. 동시에 그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에서 벗어난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임을 분명히 했다. 선교적 유연성의 중심에는 변하지 않는 기준, 곧 사랑으로 요약되는 ‘그리스도의 율법’이 있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회당의 언어를 존중하면서도 시장의 언어로도 복음을 말할 줄 알았다고 해설한다. 동일한 복음이 서로 다른 문화권의 귀에 들리게 하려면, 선교자는 타인의 세계로 들어갈 용기가 필요하다. 바울의 ‘변화’는 본질의 타협이 아니라 전달의 최적화였고, 그 동력은 한 영혼이라도 더 얻으려는 사랑이었다.

사랑은 윤리적 판단을 넘어 공동체적 배려로 구체화된다. 우상의 제물 문제로 흔들리던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은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까지 말한다. 자유는 언제나 사랑의 덕을 세우기 위해 스스로 제한된다. 장재형목사는 ‘자유의 자기 제한’이 기독교 윤리의 심장부라고 설명한다. 강한 자의 자유가 약한 지체의 양심을 보호하기 위해 기꺼이 접히는 것, 이것이 제자도의 성숙이다. 물어야 할 질문은 “할 권리가 있는가”가 아니라 “형제를 세우는가”이다. 바울의 삶에는 이 질문이 일상의 판단 기준으로 작동했다. 도망 노비 오네시모를 위해 주인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고, 빚이 있다면 자신이 갚겠다고 약속한 사건은 복음 진리가 관계와 재정, 체면 같은 현실의 지점까지 내려와 몸이 되는 순간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처럼 ‘사랑으로 좁아지는 자유’가 결국 공동체를 살리고 복음을 밝히 드러낸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9장 24절부터 바울의 어조는 선교적 유연성에서 곧장 운동선수의 치열함으로 옮겨간다. 고린도 사람들에게 경기장은 상징적 공간이었다. 이스미아 제전의 달리기와 권투, 승자의 월계관은 도시의 자부심이었다. 바울은 익숙한 이미지를 끌어와 말한다. 모두가 달리지만 상은 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그러니 상을 얻도록 달려라. 세상의 선수도 썩어 없어질 관을 위해 절제한다면, 영원한 면류관을 향한 신자는 얼마나 더 철저해야 하겠는가. 여기서 ‘절제’는 금욕의 폐쇄가 아니라 목표를 향한 집중이다. “나는 목표 없이 달리지 않고, 허공을 치듯 싸우지 않는다.” 방향 없는 열심은 소모이고, 목적 없는 훈련은 자기만족일 뿐이다. 장재형목사는 신앙의 경주가 방향(복음의 영광), 방법(사랑의 법), 동력(케노시스의 은혜)을 동시에 요구한다고 정리한다. 이 셋 중 하나라도 떨어지면 경주는 빗나간다.

경주자의 이미지는 곧 ‘몸’을 다루는 훈련으로 이어진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는 고백은 육체만이 아니라 습관과 감정, 욕망과 시간 사용까지 포괄한다. 장재형목사는 자기 절제를 생활의 언어로 번역한다. 말씀 앞에 시간을 먼저 드리는 배치, 관계에서 ‘빨리 말하고 느리게 듣는’ 본능을 뒤집는 연습,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정결을 지키기 위해 매체 사용을 절제하는 선택, 재정에서 복음을 우선순위에 두는 결단, 쉼을 통해 사명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리듬—제자도의 절제는 삶 전체를 복음의 방향으로 재편성하는 일이다. 이 훈련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사랑의 경제학이다. 더 좋은 것을 위해 좋은 것을 내려놓는 지혜,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나의 편의를 포기하는 용기, 복음의 속도를 위해 나의 속도를 조절하는 절제,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경건의 훈련이다.

그러나 가장 서늘한 문장은 마지막에 온다.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자신은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 바울은 자기 확신으로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그는 은혜 안에서 담대했지만 성찰 앞에서는 떨고 있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떨림을 영적 지도자에게 주어진 거울이라 부른다. 복음의 길을 안내하면서 정작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자각이 제자도를 곧게 지킨다. 여기에는 자기 비하도, 자기 과신도 없다. 은혜 앞에 서는 정직함만이 있다. 은혜는 방종의 면허가 아니라 성결의 동력이고, 자유는 독주의 특권이 아니라 사랑의 책임이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는 ‘능력’보다 ‘복종’을, ‘성과’보다 ‘성실’을, ‘속도’보다 ‘진실’을 다시 배워야 한다. 복음은 과거의 사건이자 미래의 약속이지만, 그것이 오늘 나의 시간표와 언어, 소비와 관계를 뚫고 들어오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허공을 칠 뿐이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마음을 로마서에서 다시 비춘다.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확신 직후,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탄식이 이어진다. 확신과 탄식, 담대함과 눈물—이 긴장 속에서 바울은 길을 걸었다. 이것이 케노시스가 내면화된 사람의 정동이다. 확신 때문에 거만하지 않고, 탄식 때문에 위축되지 않는다. 확신은 방향을 고정하고 탄식은 사랑을 깊게 한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다가갈 수 있었다. 사랑이 본능을 규정하면 자유는 넓어지고, 자유가 사랑과 결합하면 절제는 기쁨이 된다. 사랑, 자유, 절제의 삼중주가 신자의 하루를 구성할 때 우리의 경주는 흔들려도 밀리지 않는다.

오늘의 현실은 바울 시대와 다르지만 핵심은 같다. 플랫폼과 알고리즘, 이미지와 속도가 지배하는 환경에서 자유는 ‘보여줄 권리’로, 절제는 ‘잃을 것’으로 오해되기 쉽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복음의 해석자(설명하는 사람)가 곧 증인(보여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상기시킨다. 증인은 말하기 이전에 보고, 보기 이전에 붙들린 사람이다. 케노시스의 사랑에 붙들리면, 우리는 소유로 자신을 증명하는 대신 비움으로 사랑을 증언한다. 인정 욕구를 절제하는 대신 은혜를 신뢰하고, 내 취향의 확장을 멈추는 대신 타인의 구원을 위해 공간을 낸다. 공동체 안에서는 강한 자의 자유가 약한 자의 양심을 살피는 배려로 표현되고, 세상 속에서는 선한 양심과 예의가 복음의 통로가 된다. 복음은 언제나 ‘그들’의 언어로 들려야 하기에,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낮추고 그들의 언어를 배운다. 이 낮춤이 바로 주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방식이었다.

결국 썩지 않을 면류관은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삶의 방향이다. 면류관을 얻기 위한 계산법이 아니라 면류관을 향해 시간을 배치하고 습관을 조직하는 원리다. 바울이 말한 절제, 경주, 복종은 모두 사랑으로 정의되는 자유의 운동학이다. 상을 얻도록 달리는 사람은 이미 상을 닮아간다. 그의 시간표에는 주님의 마음이 우선 배정되고, 그의 어휘에는 사람을 살리는 말이 먼저 떠오르며, 그의 선택에는 복음이 앞선다. 그가 사는 집과 일터와 교회와 도시가 그 패턴을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런 변화—케노시스의 사랑이 내면을 채우고, 사랑이 자유를 규정하며, 자유가 절제를 기쁘게 만들고, 절제가 삶을 복음의 방향으로 재배열하는 변화—가 고린도전서 9장 19–27절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제자도의 실체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자유를 내세우는 시대에 자유를 주장하기보다 사랑을 선택하고, 성과를 독촉하는 시대에 성실을 견디며, 속도를 찬양하는 시대에 방향을 고정하자.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그러나 언제나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로서 한 영혼이라도 더 얻기 위해 스스로 종이 되는 길을 택하자. 달리기는 계속된다. 허공을 치지 않으려면 오늘도 케노시스의 주님을 바라보며 몸을 쳐 복종하게 하라. 썩지 않을 면류관은 먼 상급이 아니라 오늘의 방향이다. 그 방향을 붙드는 한 우리의 걸음은 비록 흔들려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장재형목사가 펼쳐 보이는 이 길, ‘종 된 자유인’의 길은 곧 주님의 길이며 지금 여기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다.

http://www.davidjang.org

Pasteur David Jang – L’espérance de la fin des temps


I. La signification des « temps et moments » dans une perspective eschatologique

Le passage de 1 Thessaloniciens 5.1-2 – « Pour ce qui est des temps et des moments, vous n’avez pas besoin, frères, qu’on vous en écrive. Car vous savez bien vous-mêmes que le jour du Seigneur viendra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 (1 Th 5.1-2) – illustre bien l’une des dimensions majeures de la foi de l’Église primitive. De façon générale, l’Église du premier siècle croyait que Jésus-Christ, après son ascension, reviendrait prochainement, nourrissant ainsi un sentiment d’imminence eschatologique. Immédiatement après la résurrection et l’ascension du Christ, les disciples se demandaient avec grand intérêt : « Quand reviendra-t-Il ? » Parmi eux, l’Église de Thessalonique était particulièrement fervente dans sa réflexion et sa discussion autour de cette question eschatologique. Lors du séjour d’environ trois semaines de l’apôtre Paul à Thessalonique (Ac 17), où il enseignait dans la synagogue, les membres de cette communauté échangeaient régulièrement avec lui sur la sotériologie (la doctrine du salut) et sur l’eschatologie (la doctrine de la fin des temps). Ainsi, Paul écrit : « Pour ce qui est des temps et des moments, vous n’avez pas besoin, frères, qu’on vous en écrive » (1 Th 5.1), reconnaissant que leur compréhension de ces notions de « temps » (chronos) et de « moments » (kairos) était déjà très avancée.

Alors, quelle est la différence entre chronos et kairos ? En grec, chronos désigne le temps « quantitatif ». Il renvoie à la durée, au déroulement, à la succession du temps, comme on le constate dans les termes « chronologie » (chronology) ou « chronomètre » (chronometer) : c’est l’idée d’un temps mesuré et découpé. À l’inverse, kairos désigne un moment « qualitatif », un instant particulier qui marque un changement essentiel. Par exemple, le jour d’un mariage n’est pas simplement une date de plus dans le flux ordinaire du calendrier : c’est une journée spéciale qui transforme la vie d’une personne de manière qualitative. Voilà ce que suggère kairos. Les croyants de Thessalonique savaient qu’au cours du chronos de l’Histoire, il y aurait le kairos du retour du Seigneur, à savoir « le jour du Seigneur ». Ce jour était imminent à leurs yeux.

Dans l’Écriture, l’expression « le jour du Seigneur » correspond dans l’Ancien Testament au « jour de Yahweh » ou « jour de l’Éternel », et dans le Nouveau Testament au « jour de Jésus-Christ » ou « jour de la venue du Seigneur ». Jésus-Christ a déjà accompli l’œuvre du salut sur cette terre ; sa résurrection et son ascension ont ouvert le chemin de l’histoire du salut. Cependant, il est également écrit : « Ce Jésus, qui a été enlevé au ciel du milieu de vous, reviendra de la même manière » (Ac 1.11). Ainsi, l’Église vit dans l’espérance de ce « jour » futur, le jour de l’accomplissement final. La Bible ne présente donc pas une conception cyclique de l’histoire. Contrairement à certaines pensées orientales qui voient l’histoire comme une répétition sans fin – semblable au cycle des saisons (printemps, été, automne, hiver) –, l’Écriture sainte annonce une vision linéaire de l’histoire : elle débute à un point précis (la création), elle progressera vers une fin, et à l’ultime achèvement surviendront le jugement dernier et l’avènement de « nouveaux cieux et d’une nouvelle terre ».

Dire que l’Église de Thessalonique possédait une foi eschatologique signifie qu’elle vivait constamment dans la tension et la joyeuse espérance du « retour proche du Seigneur ». Malgré les persécutions, les épreuves et les fausses doctrines qui pullulaient, ils gardaient fermement cette conviction : « Très bientôt, Jésus-Christ viendra effacer nos souffrances et rendre justice. » Comme l’a déclaré Jésus en Matthieu 10.23 : « Quand on vous persécutera dans une ville, fuyez dans une autre… Vous n’aurez pas achevé de parcourir toutes les villes d’Israël que le Fils de l’homme sera déjà venu. » Aux yeux des Thessaloniciens, le retour du Seigneur pouvait survenir à tout moment. De plus, dans Actes 1, l’ange déclare : « Hommes de Galilée, pourquoi restez-vous là à regarder au ciel ? Ce Jésus qui vous a été enlevé… reviendra de la même manière. » Cette promesse était la force motrice de l’Église primitive.

Dans ce contexte, Paul, dans ses deux épîtres aux Thessaloniciens, apporte des réponses précises aux questions eschatologiques. Au chapitre 4 de la première épître, il explique le sort des croyants décédés (résurrection des morts et enlèvement) ; au chapitre 5, il leur rappelle : « Vous savez bien vous-mêmes que le jour du Seigneur viendra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 (1 Th 5.2), soulignant qu’ils ne doivent pas se laisser obséder par des calculs de dates. Bien que Paul ne leur indique pas le « temps et le moment » exacts, il ne leur demande pas pour autant d’attendre passivement dans l’ignorance. Au contraire, il réitère l’enseignement de Jésus à propos d’un avènement «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 (cf. Mt 24, Lc 17, Mc 13, dits « petits apocalypses »), affirmant que les Thessaloniciens connaissent déjà cela. Par ailleurs, la parabole du figuier enseigne la nécessité de discerner les signes des temps, même si « le Fils lui-même ne connaît pas ce jour » (Mt 24.36) : toute tentative de déterminer une date précise est donc vaine.

Ainsi, l’eschatologie est l’un des trois grands piliers de la doctrine chrétienne. Tout comme la christologie et la sotériologie sont indispensables pour forger la foi et la vie du croyant, l’eschatologie constitue le cœur de notre compréhension du temps et de l’histoire en reliant présent et avenir. Depuis l’Église primitive, la question de la fin de l’histoire est abordée sous divers angles. Les théories du prémillénarisme, du postmillénarisme et de l’amillénarisme en sont des exemples. Le dispensationalisme prémillénariste détaille, entre autres, l’enlèvement, la grande tribulation et le millénium. Le postmillénarisme, lui, voit la progression de l’Évangile et l’expansion graduelle du règne du Christ sur terre, jusqu’à son retour. Quant à l’amillénarisme, il considère le « règne de mille ans » comme un symbole : la période actuelle de l’Église serait déjà le « règne spirituel » de Christ. Malgré des controverses théologiques, tous s’accordent sur un point : « Il y aura assurément une fin. » L’Église attend ce jour, se prépare à ce jour, et vit en tant que peuple de Dieu dans le temps présent.

L’Église de Thessalonique se posait aussi ces questions et Paul y répond dans ses lettres. Lors d’une visite de Timothée parmi eux, les croyants y revenaient sans cesse : « Quand le Seigneur reviendra-t-Il ? » Paul leur écrit alors 1 et 2 Thessaloniciens comme réponse. Cet échange montre à quel point il est précieux, pour la communauté, de poser clairement les questions de foi. L’exemple de l’Église de Corinthe est similaire : elle avait écrit à Paul à Éphèse pour éclaircir des points cruciaux (immoralité, viande sacrifiée aux idoles, dons spirituels, résurrection, etc.). Paul répond à travers 1 Corinthiens, un texte d’une richesse inestimable pour nous aujourd’hui. Il est possible que nous n’aurions pas reçu de tels écrits si les Corinthiens n’avaient pas interrogé Paul avec autant d’insistance. L’histoire de l’Église témoigne que la « dynamique des questions-réponses » est un processus essentiel pour consolider la foi.

Notons cependant que les Thessaloniciens ne basculèrent pas dans un extrémisme désordonné au sujet de la fin des temps. Au contraire, Paul constate qu’ils ont déjà une connaissance approfondie : « Pour ce qui est des temps et des moments, vous n’avez pas besoin… » (1 Th 5.1). Certes, certains prônaient peut-être un arrêt du travail en raison de l’imminence du jour du Seigneur, mais dans l’ensemble, la communauté continuait à s’engager, à prier et à exercer la vigilance, tout en conservant un bon équilibre (2 Th 3). Paul salue leur esprit équilibré et les exhorte à persévérer dans la vigilance et la tempérance.

Examinons de plus près 1 Thessaloniciens 5.2-3 : « Vous savez bien vous-mêmes que le jour du Seigneur viendra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À ce moment-là, la ruine fondra sur eux à l’improviste, comme les douleurs de l’enfantement surprennent la femme enceinte, et personne n’y échappera. » L’image du « voleur dans la nuit » est employée dans l’Ancien et le Nouveau Testament pour décrire un désastre, un jugement divin ou la venue du Seigneur qui s’abat soudainement. Cela suggère, d’une part, la dimension inattendue et funeste pour ceux qui ne sont pas prêts ; d’autre part, cela reflète l’enseignement de Jésus : « Seul le Père connaît ce jour » (Mt 24.36). En d’autres mots, l’homme ne peut le calculer.

À ce sujet,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dans plusieurs sermons et écrits que le point central de l’eschatologie n’est pas de spéculer sur la date exacte, mais de « comprendre comment vivre aujourd’hui conformément à la volonté de Dieu ». Nous confions à Dieu le moment de ce jour et, tout en espérant pleinement le salut et le jugement parfaits qu’apportera la parousie (la venue du Seigneur), nous cherchons à vivre dès maintenant en « serviteurs fidèles et bons ». En effet, selon la parole de Matthieu 24.14 – « Cette bonne nouvelle du royaume sera proclamée dans le monde entier, pour servir de témoignage à toutes les nations. Alors viendra la fin » –, l’eschatologie nous rappelle prioritairement la « mission » de l’Église : répandre l’Évangile à tous les peuples. L’espérance de la fin n’invite pas l’Église à fuir le monde par peur, mais au contraire à se lever : « Veillez, soyez prêts, croissez dans la foi et l’amour, et annoncez l’Évangile jusqu’aux extrémités de la terre. »

C’est pour cela que la communauté de Thessalonique reçoit des éloges : elle n’était pas obsédée par le « calcul de la date du retour », mais vivait d’une ardeur sincère en Christ, entretenant une communion fraternelle saine. « Pour vous, frères, vous n’êtes pas dans les ténèbres, pour que ce jour vous surprenne comme un voleur » (1 Th 5.4) : Paul affirme que, parce qu’ils sont « fils de la lumière, fils du jour », la venue du Seigneur ne sera pas pour eux un événement « soudain », mais plutôt une rencontre attendue. Le pasteur David Jang insiste également sur cette vigilance et cette tempérance : ne pas céder à la peur panique, mais plutôt se préparer activement et de manière positive, ancrée dans l’Évangile.

Enfin, considérons l’application de l’eschatologie dans la vie personnelle. Tout être humain connaîtra un jour la mort physique : c’est la fin « personnelle ». En même temps, un jour, l’histoire de l’univers arrivera à son terme : c’est l’eschatologie « cosmique » et le retour du Seigneur. Paul exhorte l’Église à se préparer sans faillir, aussi bien à la mort individuelle qu’à la fin universelle. Comment ? Par la méditation continue de la Parole, la pratique de la foi et de l’amour. « Nous qui sommes du jour, soyons sobres, ayant revêtu la cuirasse de la foi et de l’amour, et ayant pour casque l’espérance du salut » (1 Th 5.8). Au milieu du combat spirituel, les soldats de Christ se protègent le cœur avec la foi et l’amour, et protègent leur tête avec « l’espérance du salut ». Il ne s’agit pas seulement de connaître la venue du Seigneur en théorie, mais de se fortifier intérieurement au moyen de la foi et de l’amour, et de garder une pensée claire grâce à l’espérance du salut. Ainsi, quelles que soient les épreuves, nous ne chancellerons pas.

Paul ajoute : « Vous êtes tous des fils de la lumière… » (1 Th 5.5). La lumière incarne la vérité. Autrement dit, ils demeurent dans la Parole de Dieu, regardent l’histoire au travers d’elle et vivent le présent dans la perspective de l’espérance eschatologique. Le « jour du Seigneur » peut bien venir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 ils ne sont pas dans l’obscurité, car ils veillent avec des « lampes allumées », tel le groupe des dix vierges (Mt 25) qui attendaient l’époux. Ainsi, l’Église de Thessalonique est un exemple remarquable de « communauté eschatologique » loué dans le Nouveau Testament.

Si Paul a pu écrire : « Pour ce qui est des temps et des moments, vous n’avez pas besoin qu’on vous en écrive » (1 Th 5.1), c’est que l’Église de Thessalonique possédait une certitude et une compréhension déjà solidement établies de la fin de l’histoire. Elle ne craignait pas la fin de manière vague, n’était pas non plus égarée par de faux calculs. Elle poursuivait au contraire une saine eschatologie, basée sur une vision de l’histoire que couronnent l’espérance du retour du Seigneur et la mise en pratique de l’amour. Le pasteur David Jang rappelle souvent que l’eschatologie n’a pas vocation à alimenter la crainte ou à inciter à spéculer sur des dates ; son but est plutôt de nous faire réaliser « comment vivre chaque jour », et de fortifier notre rôle de peuple de Dieu dans le monde.


II. La nécessité de veiller et de vivre avec sobriété, et la mission de l’Église

Continuons en examinant 1 Thessaloniciens 5.4 et suivants : « Pour vous, frères, vous n’êtes pas dans les ténèbres… Nous qui sommes du jour, soyons sobres, ayant revêtu la cuirasse de la foi et de l’amour, et ayant pour casque l’espérance du salut » (1 Th 5.4-8). À partir de là, voyons comment la foi eschatologique de l’Église primitive se concrétisait en un style de vie et en une mission ecclésiale. Paul est explicite : « Pour vous, frères, vous n’êtes pas dans les ténèbres, pour que ce jour vous surprenne comme un voleur » (5.4). Cela signifie qu’à ceux qui se préparent et qui veillent, le jour du Seigneur ne saurait être un événement subit et effrayant. Certains se focalisent peut-être uniquement sur « la venue comme un voleur, imprévisible », mais Paul envisage la question tout autrement : « Puisque vous êtes dans la lumière, ce jour ne peut venir comme un voleur, car vous êtes déjà prêts. »

Cette idée fait écho à la parabole des dix vierges (Mt 25.1-13). Cinq vierges avaient préparé de l’huile, les cinq autres non. Quand l’époux arriva, celles qui étaient prêtes entrèrent avec lui ; les autres se retrouvèrent devant une porte fermée. Pour ces dernières, l’arrivée de l’époux fut une « venue comme un voleur ». Elles vécurent l’amertume d’être exclues, tandis que pour les vierges prévoyantes, ce n’était pas une surprise mais plutôt l’accomplissement tant attendu. L’Église de Thessalonique ressemble à ces jeunes filles prévoyantes : elle n’était ni envahie par l’angoisse ni prisonnière d’une attente oppressante. Elle s’appuyait fermement sur la promesse : « Le Seigneur viendra sûrement », et vivait dans la foi, l’amour et l’espérance, comme on porte une cuirasse et un casque.

Qu’entend-on concrètement par « veiller et vivre avec sobriété » ?

  1. Veiller signifie refuser la négligence spirituelle. Celle-ci apparaît quand on oublie le Seigneur et qu’on se laisse distraire par les tentations du monde. Sans la conscience eschatologique, on glisse vite vers les valeurs matérialistes ou la passivité spirituelle. Mais celui qui attend fermement le retour du Christ se rappelle constamment : « Je suis un serviteur du Seigneur, je rendrai compte un jour devant Lui. » Comme dans la parabole des talents (Mt 25.14-30), le maître revient tôt ou tard, et fait le bilan avec ses serviteurs. C’est là le cœur de l’eschatologie : elle ne dit pas « Un jour lointain, nous serons au ciel ; peu importe ce qui se passe ici ». Elle déclare plutôt : « C’est aujourd’hui, dans chaque instant, que tu dois servir fidèlement, car le Seigneur viendra et nous demanderons compte de tout. » En conséquence, les membres de l’Église de Thessalonique ne se détournaient pas de leurs responsabilités quotidiennes. Bien au contraire, ils travaillaient avec diligence et vivaient dans la société, tout en nourrissant une vive attente du Seigneur.
  2. Vivre avec sobriété implique la maîtrise de soi et l’examen de conscience. Comme le dit Paul, ceux qui s’enivrent boivent la nuit (5.7), ceux qui dorment spirituellement se laissent aller à l’inconscience. Mais en tant qu’enfants de la lumière, nous affirmons : « Nous sommes du jour ; nous ne suivrons pas aveuglément les tendances du monde. » Paul souligne alors la « cuirasse de la foi et de l’amour ». Pour protéger la partie vitale de l’âme (le cœur), il faut la foi et l’amour : la foi, c’est s’appuyer sur « Dieu qui a résolu de nous sauver » ; l’amour, c’est rendre cette foi tangible par des actes concrets. Quant au « casque de l’espérance du salut », il est indispensable à la protection de la tête (pensées). Sans espérance, on chancelle face aux épreuves de la vie. Mais si l’on demeure convaincu que Christ reviendra pour parachever toute chose dans la justice et la paix, aucune situation ne nous plonge définitivement dans la confusion.

Celui qui veille et vit dans la sobriété n’envisage pas la fin comme une nuit de jugement effroyable. Pour lui, c’est surtout le jour glorieux de la rencontre avec le Seigneur ; l’achèvement du salut tant attendu. C’est pourquoi Paul proclame : « Car Dieu ne nous a pas destinés à la colère, mais à la possession du salut par notre Seigneur Jésus-Christ, qui est mort pour nous, afin que, soit que nous veillions, soit que nous dormions, nous vivions ensemble avec lui » (1 Th 5.9-10). Pour les croyants, la fin ne se limite donc pas au jugement, mais concerne l’accomplissement total du salut en Christ. Dès lors, celui qui embrasse une saine eschatologie ne sombre pas dans la peur, ni dans la désinvolture. Une annonce correcte de la fin des temps nous conduit à « vivre fidèlement dès aujourd’hui », dans l’attente joyeuse de la plénitude du salut.

De même, l’Église doit se rappeler constamment sa « mission eschatologique ». Une Église qui perd de vue la fin risque de se laisser happer par les intérêts de ce monde. Si elle n’a plus la vision du royaume de Dieu, elle devient vite une institution aux aspirations purement terrestres, parfois pire que le monde lui-même. D’où l’insistance du pasteur David Jang : l’Église doit redevenir cette communauté spirituelle qui attend ardemment le retour du Seigneur et, dans cet élan, se consacre à la mission jusqu’aux extrémités de la terre. Il ne s’agit pas de grossir son propre effectif ou son pouvoir, mais de porter l’Évangile à « toutes les nations » (Mt 24.14). Le culte, l’enseignement de la Parole, l’édification mutuelle prennent toute leur signification dans cette perspective : « Le Seigneur va revenir. »

En 1 Thessaloniciens 5.11, Paul conclut : « C’est pourquoi exhortez-vous réciproquement et édifiez-vous les uns les autres, comme en fait déjà. » Dans d’autres lettres, l’apôtre doit parfois corriger des divisions, mais ici, il les félicite pour la solidarité et l’encouragement mutuel qui les distinguent. Ceci est directement lié à leur foi eschatologique : l’eschatologie rappelle que « nous sommes tous enfants de Dieu, destinés à régner avec Lui lorsque le Seigneur reviendra », et nous pousse à vivre dans l’amour fraternel d’une manière encore plus fervente à l’approche de ce jour. Plus ce jour approche, plus l’Église doit s’unir, se sanctifier et se fortifier. Il s’agit de couvrir les faiblesses fraternelles, de s’encourager et de s’édifier mutuellement.

En somme, l’eschatologie motive nos actes quotidiens. Dans un monde incertain, elle nous assure : « Je suis enfant de Dieu, enfant de la lumière. Je dois donc mener une vie de foi, car le Seigneur reviendra. » L’Église, pour sa part, est une « communauté eschatologique ». Bien plus qu’un bâtiment ou qu’une institution financière, elle est le rassemblement des « enfants de la lumière », qui proclament « Maranatha ! (Seigneur, viens !) », annoncent l’Évangile au monde, et s’emploient à répandre l’amour.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souvent que l’expansion de l’Évangile et les actions caritatives envers les démunis sont autant de manifestations concrètes de la foi eschatologique. « Réaliser dès maintenant la culture du ciel » et « prendre soin des délaissés » tout en guettant le retour du Seigneur résument l’attitude du croyant « éveillé et sobre ».

Dans cette optique, l’éloge et l’exhortation adressés par Paul à l’Église de Thessalonique gardent toute leur actualité. Paul leur écrit : « Frères, je n’ai rien à vous apprendre sur ces questions, car vous les avez déjà étudiées et débattues en profondeur. » C’est une reconnaissance du discernement qu’ils possèdent concernant l’histoire et la fin. « Vous êtes des enfants de la lumière. Ce jour ne vous surprendra pas comme un voleur », ajoute Paul. Ce sont des paroles de grâce qui réaffirment leur identité : préparés, veillant dans l’amour, grandissant ensemble. Possédant une telle foi, l’Église traverse persécutions et épreuves sans se laisser ébranler, restant fidèle à l’Évangile.

De nos jours, l’eschatologie est parfois mal comprise au sein des assemblées. Certains manipulent les croyants par la peur de la fin, d’autres prétendent connaître la date précise du retour du Seigneur, ce qui frise l’hérésie. C’est pourquoi il importe de retenir la « saine eschatologie » de l’Église de Thessalonique. Deux principes y coexistent : « Personne ne peut connaître le jour ni l’heure, donc n’écoutez pas de prophéties privées ni de calculs farfelus » ; mais également « Sachez discerner les signes du temps et restez éveillés dans la Parole, la mission et l’amour. » Quand ces deux aspects sont équilibrés, l’Église croît sainement, embrassant à la fois le présent et l’éternité. La vie chrétienne ne rejette pas la réalité terrestre, mais elle conserve comme boussole l’achèvement du royaume de Dieu.

Le pasteur David Jang enseigne fréquemment que si nous nous focalisons uniquement sur « la venue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 nous risquons d’être paralysés par la peur ou obsédés par le désir de calculer la fin. Or le message de Paul est clair : « Pour vous, le jour du Seigneur ne peut pas survenir comme un voleur. Vous êtes dans la lumière ; veillez et soyez sobres, revêtez la foi, l’amour et l’espérance du salut. » Si cette assurance s’enracine dans l’Église, celle-ci ne sombre pas dans la morosité. Au contraire, elle s’épanouit dans la joie et la vie, car l’eschatologie, loin d’inoculer l’anxiété, insuffle dynamisme et espérance.

Et pour reprendre 1 Thessaloniciens 5.9-10 : « Car Dieu ne nous a pas destinés à la colère, mais à l’acquisition du salut par notre Seigneur Jésus-Christ, qui est mort pour nous, afin que… nous vivions ensemble avec lui. » Voilà le cœur de l’Évangile. L’eschatologie inclut certes jugement et colère de Dieu, mais pour les croyants en Christ, ce jugement fait partie intégrante de l’économie du salut. Nous entrerons dans la pleine communion avec le Seigneur à ce moment-là. Ainsi, Paul offre une réponse limpide à l’interrogation eschatologique des Thessaloniciens : « Le jour du Seigneur » n’est pas la terreur finale pour le croyant, mais le point culminant de sa rédemption. Que l’Église s’exhorte donc mutuellement et s’édifie pour ce jour.

Aujourd’hui, nous avons besoin plus que jamais de cette perspective. Le monde est en proie à l’insécurité et aux conflits, et beaucoup sont plongés dans l’incertitude. L’Église ne doit pas répondre : « Tout va bientôt s’effondrer, tremblez de peur et cachez-vous ! » Elle doit proclamer : « Le Christ va revenir et apporter la plénitude du salut. Alors, soyons vigilants et sobres, vivons dans l’amour et portons l’Évangile. » Telle est la bonne nouvelle. Telle est la posture des « vierges sages avec leur huile » et du « serviteur fidèle qui fructifie ses talents ». Dès lors, peu importe le jour : nous accueillerons le Seigneur dans la joie.

Le message de 1 Thessaloniciens 5 sur la fin des temps nous enseigne que le jour du Seigneur vient «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 mais que les « enfants de la lumière » ne seront pas surpris, puisqu’ils sont déjà en éveil et en sobriété. Le pasteur David Jang le rappelle : « Ne transformons pas l’eschatologie en peur ou en prédictions hasardeuses. Au contraire, qu’elle devienne un moyen de fortifier l’Église dans sa santé spirituelle, son élan missionnaire et son amour fraternel. » À l’exemple de l’Église de Thessalonique qui s’écriait chaque jour « Maranatha ! (Seigneur, viens !) », demeurons dans l’entraide et l’exhortation mutuelle. Ainsi, au son de la trompette du Seigneur, nous pourrons l’accueillir dans l’allégresse.

En définitive, à travers ces deux axes de 1 Thessaloniciens 5, nous retenons la leçon suivante :

  1. « Nul ne connaît exactement les temps et les moments, mais le Seigneur reviendra assurément. »
  2. « Si ce jour vient comme un voleur pour le monde, pour les enfants de la lumière, il ne saurait être une surprise, car ils se tiennent prêts dans la foi. »

De plus, Jésus a déclaré que « l’Évangile sera annoncé à toutes les nations, et alors viendra la fin » (Mt 24.14). L’Église est donc appelée à parler de la fin tout en assumant pleinement sa vocation missionnaire au cœur du monde.

En conclusion, l’eschatologie ne pousse pas au repli, mais incite à la « transformation du présent » grâce à une foi inébranlable. Comme l’Église de Thessalonique sous la persécution, nous voulons espérer « le jour du Seigneur » et, ce faisant, recevoir l’éloge de Paul : « Frères, je n’ai rien à vous apprendre sur ce sujet. » Cela suppose un approfondissement continu de la Parole et un témoignage actif d’amour. Ensemble, soyons « enfants de la lumière » dans un monde obscur, proclamant « Viens, Seigneur Jésus », pour vivre une eschatologie saine, au service du prochain. Alors, au jour du Seigneur, nous entrerons dans son repos et sa gloire. Telle est la promesse donnée par Paul à l’Église de Thessalonique, et qui demeure pleinement valide pour nous aujourd’h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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