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동행 –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와 동료들

이 글에서는 마가복음 14장 32-42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중점적으로 다루되, 장재형목사가 강조해 온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라는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성경 본문에서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과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그 고독한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신앙의 핵심 가치를 되새기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메시지와 함께 장재형목사가 전하고자 하는 주요 가르침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전개는 여러 소주제나 구분 없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며,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장면이 우리 각자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성찰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마가복음 14장에 기록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마친 후 감람산 기슭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고, 거기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한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일반적으로 ‘감람산’은 올리브나무 숲이 가득하며, 그 가운데 ‘겟세마네’는 ‘채유소’, 즉 올리브 열매를 짜서 기름을 얻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장소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올리브 기름이 가져다주는 두 가지 상징, 즉 평화와 영원성, 그리고 메시아에게 기름 부음을 주던 전통을 함께 묵상해 볼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히브리어로 ‘메시야’, 헬라어로 ‘크리스토스’라는 표현이 모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즉 기름 부음받은 왕으로서 겟세마네 동산에 계셨음에도, 여기서 제자들에게는 그분을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우는 장면이 아니라 오히려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며 십자가 수난을 준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왕으로 즉위하셔야 할 분이 극도로 비참한 기도를 드리시는 장면이기에, 성경 전체에서 매우 강렬하고도 역설적인 대조를 형성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마태·마가·누가복음에 공통적으로 기록된 대단히 중요한 본문이지만,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특징이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에 대해, 요한이 이미 13장부터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는 길을 완전히 수락하셨음을 조명했기에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자신이 ‘이제 영광을 받았다’고 선언하셨고, 제자들에게 종말론적 당부와 고별 설교를 남기셨습니다. 즉, 십자가 수난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당신은 스스로 그 길을 ‘영광’이라 선포하심으로 결단하셨다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주님은 갈보리 언덕 이전부터 이미 그리스도의 길을 선택하셨다. 요한은 예수님의 내면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수용하는 왕적 위엄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에 겟세마네 기도를 생략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가 기록한 겟세마네 기도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인간적 고민’과 ‘극렬한 통곡’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14장 33-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참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께 ‘아바 아버지’라 간구하며 끝까지 순종하신 고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께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 그분 안에는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처절한 길인지, 또 그 길을 가는 데 있어 인간적 떨림과 고통이 없을 수 없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스스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고백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복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장재형목사가 자주 강조해 왔듯, 예수님이 사실상 십자가를 지는 길을 ‘피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이나 마가복음 14장에 드러난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 죽음 앞에서 느끼는 극심한 두려움과 고통을 토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이어집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단하고는 있지만, 종종 우리의 의지와 감정은 연약하기 때문에 다른 길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들이 많다. 예수님 또한 그 순간을 겪으셨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을 붙들고 끝까지 걸어가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본을 보여주셨다”고 풀이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모든 이가 반드시 직면해야 할 도전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는 진리입니다.

한편,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를 올리시는 동안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식사 자리에서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큰 소리를 쳤는데, 예수님은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로 들어와서 기도하시는 동안에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들어 버립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시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주님께는 지금이 가장 절박한 시간이고, 일생일대의 영적 투쟁이 벌어지는 중인데, 제자들은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밤에 산책을 나온 사람들처럼 무심하게 잠에 든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종종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엄중한 순간에 우리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버릴 때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제자들은 허둥지둥 도망쳐 버리는데, 마가복음 14장 51-52절에는 베 홑이불을 두르고 따라오던 한 청년이 붙잡히자 홑이불을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전통적으로 이 ‘한 청년’을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자신의 집에서 최후의 만찬이 있었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감람산으로 나아가자, 밤중에 일단 잠들어 있던 마가가 뒤늦게 모든 상황을 감지하고 황급히 예수님을 따라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도 두려움 앞에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친다”라고 설명합니다. 마가는 이토록 부끄러운 장면을 자기 복음서에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기록함으로써, 인간적인 연약함이 얼마나 쉽게 드러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연약함조차도 결국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정직한 신앙고백’의 모범이라 칭하며, “마가는 자신이 부끄러운 존재임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런 자신도 변화시키신 주님의 은혜를 자랑하기 위해 이 장면을 그대로 쓴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약점을 숨기기보다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길을 열어 놓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셔야 마땅한 예수님께서 오히려 고통과 슬픔 속에 땀을 핏방울같이 흘리시는 비극적인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완전히 받아들여지기까지, 즉 예수가 진실로 ‘기름 부음받은 이’로 공인되고 고백되기까지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불가피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분의 길을 함께 걸어갈 영적·신앙적 성숙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홀로 고독의 길을 가야 했고, 그 절정이 바로 겟세마네의 땀방울과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였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에 대해,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도 떡과 포도주를 받고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나, 곧 이어서 펼쳐질 고난의 현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유월절에 희생된 양의 피가 기드론 시내로 흘러내려 붉게 물들어 있는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도, 주님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를 선명히 알지 못했다. 주님은 홀로 그 붉은 물살을 건너 겟세마네로 들어가셨고, 이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고독하고 처절한 순간,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이는 아람어 ‘아바’(아빠)와 헬라어 ‘파테르’(아버지)가 결합된 표현으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맺고 계신 친밀하고도 절대적인 신뢰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에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 부르셨으나, 이 고통의 골짜기에서 그분은 더욱 간절하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아빠 아버지여”라 부르며 부르짖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을 때 가장 큰 유혹은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하는 의심이 생길 때다. 예수님조차 그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아바 아버지’를 찾으심으로, 인간적인 두려움의 순간에 우리도 전적으로 아버지를 신뢰해야 한다는 본을 보이셨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우리는 죽음의 세력이 가장 강력하게 덮쳐 올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을 놓지 말아야 하며,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의 기도 안에 ‘수단’으로서의 기도가 아니라 ‘순종’을 낳는 기도로서의 본질이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셨으나, 결국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결론지으셨습니다. 이 장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우리는 종종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바꿔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나를 바꾸도록’ 내어맡기는 태도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도의 정수는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뜻과 감정을 초월해 아버지께 끝까지 복종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된 기도의 목표”라고 강조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길을 따를 힘을 주는 근원적 모범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약함을 지닌 제자들은 이 기도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잠들었고, 야고보와 요한도 주님의 절박함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시며,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권면하셨으나, 그들은 여전히 무감각한 상태였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들을 ‘교회 내의 인간적인 모습’으로 비유하면서, “세상에서는 큰소리치고 대범해 보이는 신자도, 실상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잠들어 버리거나 도망가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고,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욱 겟세마네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하며, 베드로처럼 망령된 자신감을 내세우기보다, 예수님처럼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후 예수님은 세 번째 기도 후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라고 하시며, 십자가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군병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몰려오자 제자들은 흩어집니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는 “아무리 강한 결심과 의지를 보여도, 결국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넘어지기 쉽다.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실제로는 가장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을 부인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가 넘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돌이키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곧 우리가 넘어지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지라도 주님께서 돌이킴의 은혜를 주신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됩니다.

결국,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죽음의 잔’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 수용하셨고,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신 현장이 바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방관자나 구경꾼의 위치로 남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며, 주님 안에 주어진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고 역설합니다. 즉, 겟세마네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순종의 길을 우리 또한 믿음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고독하고 비극적으로 보일지라도, 부활의 영광이 그 끝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한편, 요한복음이 겟세마네 기도를 생략한 것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영광으로 선포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의 인간적 고뇌 부분을 생략하는 편집 의도를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다시 한 번 짚어 줍니다. 요한복음은 17장의 고별 기도를 통해 세상과 제자들을 위해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왕적’ 위엄을 더욱 부각합니다. 반면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고통을 당하셨고,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기도를 드리셨는가에 포커스를 둡니다. 이 둘은 결코 모순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더 풍부하게 보여주는 보완적 시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도 종종 겟세마네 같은 어려움을 맞이한다. 세상에서 기드론 시내처럼 붉은 피의 흔적을 보며 때로 두렵고 떨리기도 하고, 아무도 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해 외롭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길을 이미 가셨고, 우리에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본을 남겨주셨다. 우리가 그 기도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때, 주님과 동행하는 길은 분명히 고독을 넘어 부활의 환희로 이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겟세마네와 갈보리 언덕은 고통이 극심하게 드러나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는 자리라는 진리가 우리에게 제시됩니다.

더 나아가, 겟세마네 사건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모두를 돌아보게 하는 ‘영적 거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며, 어쩌면 마가처럼 겨우 홑이불만 두른 채 뛰어갔다가 결국 도망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적인 결심과 맹세가 얼마나 한계가 뚜렷한지를 지적하면서, “베드로처럼 어떠한 어려움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큰소리쳐도, 하나님 앞에 깨어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작은 자극 하나에도 무너지고 만다. 그러므로 신앙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과 기도를 통해서만 단단해진다”고 합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열심보다 내면의 겸손과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14장 후반부에 보면, 예수님이 실제로 체포되시고 대제사장들 앞에서 신문받으시는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베드로는 정확히 예수님의 예언대로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맙니다. 닭이 울자마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죠.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인간적인 비참함과 눈물을 지적하면서, “우리는 실패하고 넘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베드로를 찾아가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다. 이는 겟세마네 기도에서 십자가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죄인인 우리를 얼마나 끝까지 붙드시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만든다”고 설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며, 때로는 고독하고 외롭고 눈물겨운 길임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길을 주님이 먼저 가셨기에, 그리고 그 길에서 제자들의 모든 실패까지도 주님이 포용하셨기에, 우리가 실패한다 할지라도 다시금 회복될 수 있는 길이라는 희망이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바로 이 ‘부활의 희망으로 이끌어가는 고난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겟세마네와 같은 어둠과 슬픔, 홀로 씨름해야 할 시험을 맞닥뜨릴 수 있으나, 기도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며 나아갈 때 우리 또한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을 통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첫째, 예수님도 인간적인 두려움과 고통을 겪으셨고, 우리 역시 그러한 시험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둘째, 그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를 부르짖으셨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라는 복종은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이를 위해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넷째, 제자들처럼 잠에 빠지거나 도망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도 솔직히 인정해야 하며, 그 연약함 속에 임하는 주님의 은혜로 인해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결국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점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십자가는 인간적인 최악의 절망이지만, 부활이라는 최후의 소망으로 이어지는 통로이며, 그 길에서 우리의 믿음은 성숙해집니다.

이처럼 겟세마네와 갈보리는 단순히 2000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영적 현실을 비추어 줍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에 주목하며, “우리는 너무 쉽게 제자들을 비난하지만, 사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라고 물어봐야 한다. 그 질문을 통해 자기 자신도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날 잠재력을 가진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 훨씬 더 큰 겸손과 회개의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신앙은 ‘내가 강해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끝까지 붙들어 주시고, 우리가 연약함을 인정하며 은혜를 구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나아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각종 위기와 유혹을 만날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처럼 그저 의지로 버티다가 결국 도망치거나 무너져 버리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처럼 아버지 앞에 모든 것을 토로하며 “아버지의 원대로 되길 원합니다”라는 고백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 후자의 길이, 장재형목사가 끊임없이 설파해 온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실질적 모습입니다.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먼저 그 길을 가셨고, 부활하심으로써 그 길이 결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따를 때, 비록 인간적인 약함과 눈물이 따른다 해도, 마지막에는 부활의 능력이 펼쳐지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맛보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틀어 우리는 ‘기도’의 역할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가장 힘겨운 순간에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의 자리에 가셨고, 그들이 함께 깨어 기도하기를 원하셨을까요? 장재형목사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 마음의 항복을 이끌어낸다. 기도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교만의 표현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코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제자들도 깨어 기도하기를 원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동안 어떤 의미 있는 역할도 하지 못하고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 후에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기도의 자리’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복음 전파 사명을 맡기십니다. 결국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초대교회 부흥을 일으키는 주역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정적이고 결단력 있어 보인다 해도, 기도를 잃어버리면 베드로와 같이 작은 유혹 앞에서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의 주님처럼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어떤 시험도 결국 극복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점에서 “교회가 이 땅에서 설 자리를 잃고, 개인의 신앙이 깊은 내면적 능력을 잃어버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진정한 의미의 겟세마네 기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겟세마네 기도는 간절함과 절실함,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순종을 담고 있는데, 이를 놓치면 우리도 잠자고, 멀리 도망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순절 기간이나 특별 새벽기도회 등 특정 절기에만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자리에서 늘 겟세마네를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피할 수 없는 결단을 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하는 영적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거룩한 반복’이라 부릅니다. 즉, 역사 속에서 단 한 번 있었던 겟세마네의 이야기가 오늘도 우리 안에서 반복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가처럼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끝내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복음서의 저자로 세워지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세 번씩 주님을 부인했다 해도, 다시금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부여받고 장차 교회 기둥으로 쓰임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렇듯, 마가복음에 기록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은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가장 강렬한 예시이자, 제자들의 연약함과 예수님의 인자하심이 극명히 대비되는 자리입니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은 결국 이 겟세마네 영성에서 비롯됩니다. 아무리 무서운 죽음이 다가온다 해도, 아바 아버지를 향한 절대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내 원대로 하지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외롭고 고독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그 길을 먼저 가셨고, 그 길이 영원한 승리로 이어졌음을 우리는 부활 사건을 통해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믿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과제입니다.

이러한 겟세마네 사건을 정리하며, 장재형목사는 우리 각자가 ‘내가 피하고 싶은 십자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라고 조언합니다. “혹은 내가 잠들어 버리고 있는 고난은 무엇이며,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매달려야 할 일은 무엇인가? 또 나는 지금 베드로처럼 ‘주를 위해 목숨도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실상은 쉬지 못할 잠에 빠져 있거나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들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진실하게 답해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와 한층 더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더 이상 인간적인 힘이나 의지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늘 “신앙은 나의 결단 위에 서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과 예수님이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신 순종 위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순종에 발붙여, 우리 역시 삶의 크고 작은 겟세마네를 만나게 될 때마다 “아바 아버지”를 부르짖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신뢰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라는 영적 현실을 우리 일상에서 구체화시키는 열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신앙 행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밤중에 흘리는 눈물과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그 기도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이미 선언하신 구원과 생명의 능력을 우리 삶에 실제로 펼쳐 보이십니다.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에 담긴 예수님의 기도와 제자들의 연약함, 그리고 결국 십자가의 길을 향해 굳게 일어나신 예수님의 순종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상기하게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주님은 홀로 그 길을 가셨다. 제자들은 자고 있었고, 누군가는 도망쳤으며, 다른 누군가는 배신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길은 본래부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 치의 후퇴 없이 그 길을 가셨고, 그 길의 종착지는 부활이라는 승리였다”고 말합니다. 이 메시지는 예나 지금이나 제자도로 초청받은 모든 이에게 변함없이 유효하며, 우리 각자를 향해 ‘함께 가자’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초청입니다.

정리하자면, 장재형목사가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강조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은 다음과 같은 함의를 지닙니다. 첫째, 우리의 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되, 그 약함을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이 우리 의지와 다를 때에도, 나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이 더 선하고 옳음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어떤 강한 결심과 맹세도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넷째, 비록 내가 실패한다 해도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에도 제자를 버리지 않으셨듯, 우리 역시 다시 일으키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부활의 영광을 내포하는 역설적 상징이기에, 지금 눈앞에 보이는 고난에만 매몰되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달려갈 때 그 영광을 맛보게 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결국 겟세마네 기도를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내 인생에서 지금 겪고 있는 혼돈과 시련이 어떤 의미인가? 그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하게 만듭니다. 주님은 그 끝에 분명한 답을 주십니다. 내가 부담스러워하고 피하고 싶은 십자가가 있다면, 그 십자가 너머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영광과 부활의 승리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절정이며, 장재형목사가 거듭거듭 전해 온 복음의 실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겟세마네에서 통곡하던 예수님을 향해 비로소 깨어 일어나 함께 걸어가는 결단입니다. 이제 더는 자고 있지 말고, 또 도망가지 말고, 주님과 함께 가는 진정한 동행자로 서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요약하면, 겟세마네의 기도는 예수님이 가지신 인간적 약함과 신적 순종의 역설을 여실히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기도’로 나아가야 함을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겟세마네 영성의 중요성을 수없이 설파해 왔으며, 그 핵심은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과 동행하려면 우리도 겟세마네의 통곡을 치러야 하고, 십자가를 감당해야 하며, 끝내 그 길이 영광으로 가는 길임을 믿어야 한다”라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깨어 기도하며 겟세마네를 다시금 내 삶의 현장에 구현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동행이야말로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된 길이 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록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이 드러나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시고도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의 실패와 눈물도 마침내는 주님의 부활 능력 안에서 회복되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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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a] El calor que derrite el frío de la cárcel: “Tú, sé fuerte solo en la gracia” – Pastor David Jang (Olivet University)

La prisión Mamertina de Roma. Sobre el suelo de piedra húmedo y helado, se posa la respiración áspera de un apóstol anciano. En ese espacio de desesperación, donde el frío de las cadenas se mete hasta los huesos, el apóstol Pablo escribe una carta a su joven discípulo Timoteo. Desde una perspectiva humana, era un fracasado, apenas un condenado a muerte a punto de ser ejecutado. Sin embargo, desde la punta de su pluma brota una frase inesperada: “Tú, pues, hijo mío, fortalécete en la gracia que es en Cristo Jesús”. El mundo dice que, para probar la fortaleza, hay que fortalecer los músculos y levantar murallas; pero el viejo apóstol, con la muerte frente a sus ojos, ordena una fortaleza de otra dimensión. No era una voluntad terca y obstinada, sino una “dependencia santa” que se apoya por completo en la gracia que le es dada.

Tú, no intentes arder por ti mismo; acoge la luz
Recordemos la obra maestra del genio barroco Rembrandt, pintada en 1627: <San Pablo en prisión (Saint Paul in Prison)>. En el cuadro, Pablo está encerrado en una celda oscura; sin embargo, su rostro resplandece, no por la luz que entra por la ventana, sino como si irradiara desde la Escritura que contempla, es decir, desde la Palabra misma. Rembrandt proclamó con el pincel que la fortaleza de Pablo no provenía del entorno externo, sino de la luz interior.

La resonancia de esta pintura se enlaza de manera exquisita con el sermón del pastor David Jang sobre 2 Timoteo 2. En su predicación, el pastor subraya que la fortaleza que Pablo exige a Timoteo no tiene nada que ver con temperamentos humanos ni con valentía innata. La fortaleza del creyente no consiste en exprimir los propios recursos, sino en recibir la fuerza que la gracia en Jesucristo provee, palpitando y alimentando como un corazón. Cada vez que se encontró con innumerables dificultades en el campo pastoral, el pastor David Jang escogió una “oración” más profunda en lugar de un “esfuerzo” más duro. Porque la gracia no es un refugio para huir, sino un valor que nos hace mirar de frente la realidad implacable, y un alquimista excelente que convierte incluso el fracaso en madurez. No somos cuerpos luminosos que emiten luz por sí mismos; solo cuando vivimos como reflectores que acogen y devuelven la luz de la gracia, podemos fortalecernos sin agotarnos.

Semillas de lágrimas sembradas en silencio, tras el escenario
Un interior lleno de gracia inevitablemente se desborda y se dirige hacia el prójimo. Pablo ordena la continuidad del evangelio diciendo: “encárgaselo a personas fieles”. Esto no es una educación que transmite mero conocimiento, sino algo cercano al arte de la partería que comparte vida. Una iglesia sana no es un escenario de solista dirigido por una superestrella. El pastor David Jang penetró este principio desde los inicios de su ministerio. No se ofreció como protagonista en el escenario brillante bajo los reflectores, sino como un ayudante detrás del telón, que levanta y vivifica a las personas.

La verdadera expansión del evangelio es, como describe el Evangelio de Juan, que del interior del creyente fluya agua viva y empape a su alrededor. El soldado no se enreda en asuntos privados y se concentra en su llamado; el atleta rechaza la tentación de las trampas y corre conforme a las reglas establecidas. Y el labrador es el primero en trabajar y el último en recoger el fruto. Todas estas metáforas atraviesan la puerta estrecha de la “negación de uno mismo”. El camino del discipulado que mostró el pastor David Jang iba contra la corriente de una sociedad moderna que idolatra la eficiencia y la velocidad: soltar la necesidad de ser reconocido y escoger la honestidad del proceso por encima del resultado inmediato. Es como el agricultor que siembra sudor y lágrimas. Aunque parezca lento, esa obediencia silenciosa se acumula hasta formar un gran bosque que no se tambalea ni con la tormenta.

Solo el árbol que soportó el invierno recibe la primavera más profunda
Incluso dentro de la situación límite de la cárcel, Pablo proclama: “la Palabra de Dios no está encadenada”. No es una simple victoria mental, sino un cántico triunfal que brota de la fe que recuerda a Jesucristo resucitado. Es el momento en que la intuición teológica se transforma en consuelo concreto para la vida. En el cuadro de Rembrandt, la razón por la que Pablo podía estar sereno aun con grilletes era que su mirada no estaba fija en los muros de la prisión, sino en el Señor de la resurrección.

El núcleo que atraviesa la vida y la predicación del pastor David Jang también está en esta “fe en la resurrección”. No se desanimó ni en medio de malentendidos y persecuciones, ni cuando todo parecía cerrarse por todos lados. Estaba convencido de que, así como cuanto más crudo es el invierno más intenso es el perfume de las flores de primavera, el sufrimiento es una herramienta de Dios para forjar a los santos. “Si morimos con él, también viviremos con él; si perseveramos, también reinaremos con él”. Esta promesa no es una tortura de esperanza vaga. Mediante una meditación bíblica intensa—abriendo cada mañana la Palabra y dejando que ilumine la vida—descubrimos la providencia de Dios, que hace brotar retoños de vida incluso en dolores semejantes a la muerte.

Hoy también nos enfrentamos a realidades que se parecen a cárceles personales. Cuando la crisis económica, la ruptura de relaciones o la incertidumbre del futuro nos aprietan, el mensaje de 2 Timoteo 2 se vuelve un hito nítido. La fortaleza no nace de mi determinación. Solo la gracia derramada desde lo alto puede levantarnos de nuevo. Tal como exhortó el pastor David Jang: romper las ataduras, volver a una vida sencilla y vivir con fidelidad el día que se nos ha dado. Esa es la dignidad del cristiano que el mundo no puede soportar. Aunque nos tambaleemos por falta de fidelidad, el Señor permanece fiel y no nos negará. Apoyados en esa fidelidad inmutable, volvemos a caminar en silencio el camino de peregrinación llamado “h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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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コラム】牢獄の冷気を溶かすぬくもり――「あなたよ、恵みのうちにあってこそ強くあれ」 – ダビデ 張 牧師 (Olivet University)

ローマのマメルティヌス牢獄。湿り気を帯びた冷たい石の床の上に、老いた使徒の荒い息づかいが落ちてきます。鉄の鎖の冷たさが骨の節々へと食い込む、その絶望の空間で、使徒パウロは若い弟子テモテに手紙を書きます。人間的な視点から見れば、彼は失敗者であり、まもなく処刑されるただの死刑囚にすぎませんでした。ところが、ペンを握るその指先からは、思いがけない言葉が流れ出ます。
「わが子よ。だから、あなたは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恵みによって強くなりなさい。」

世は「強さ」を証明するために筋肉を鍛え、城壁を築けと言います。しかし死を目前にした老使徒は、まったく異なる次元の強さを命じます。それは意地や根性ではなく、与えられる恵みに全面的に寄りかかる「聖なる依存」でした。

あなたよ、自ら燃え上がろうとせず、光を宿しなさい

バロック時代の巨匠レンブラントが1627年に描いた名作《獄中の使徒パウロ(Saint Paul in Prison)》を思い浮かべてみます。絵の中のパウロは暗い牢獄に閉じ込められていますが、その顔は窓から差し込む光ではなく、彼が黙想している聖書――すなわち御言葉そのもの――から放たれるかのような光に照らされ、明るく輝いています。レンブラントは、パウロの強さが外的環境ではなく、内なる光に由来することを、筆で雄弁に語ったのです。

この名画の響きは、ダビデ・張牧師のⅡテモテ2章説教と見事に重なり合います。張牧師は説教を通して、パウロがテモテに求めた強さは、人間的な気質や生まれつきの胆力とは無関係であると強調します。信徒の強さとは、自分の内側の資源を絞り出すことではなく、イエス・キリストにある恵みが心臓の鼓動のように脈打ちながら供給してくる力を受け取ることなのです。

ダビデ・張牧師は牧会の現場で数え切れない難関にぶつかるたび、「努力」でさらにあがくよりも、「祈り」でより深く信頼する道を選んできました。恵みとは現実からの逃避ではなく、冷酷な現実を直視させる大胆さであり、失敗さえも成熟へと練り上げる卓越した錬金術師だからです。私たちは自ら光を放つ発光体ではなく、恵みの光を宿して反射する反射体として生きるとき、はじめて疲れ果てることなく強くなれるのです。

舞台裏で黙々と蒔かれるの種

恵みに満たされた内面は、必ず溢れ出て隣人へと向かいます。パウロは「忠実な人たちに委ねなさい」と語り、福音の継承を命じます。それは単なる知識伝達の教育というより、命を分かち合う助産の技に近いものです。健全な教会は、一人のスーパースターが導く独奏の舞台ではありません。ダビデ・張牧師は奉仕の初期からこの原理を見抜いていました。彼が志したのは、スポットライトを浴びる華やかな表舞台ではなく、人を立て、生かすために舞台裏に立つ支援者の役割でした。

真の福音の拡張とは、ヨハネの福音書が描くように、信じる者の内から生ける水が川のように流れ出て、周囲を潤していくことです。兵士は私生活のしがらみに絡め取られず召命に集中し、競技者は近道の誘惑を退け、定められた規則に従って走ります。そして農夫は、いちばん先に労し、いちばん後に実りに与ります。これらの比喩はいずれも、「自己否定」という狭い門を通ることを求めています。

ダビデ・張牧師が示した弟子道の歩みは、効率と速度を崇拝する現代社会の流れに逆らうものでした。承認欲求を手放し、目先の成果よりも過程の誠実さを選ぶこと。それは、汗と涙で種を蒔く働く農夫の姿にも似ています。たとえ遅く見えたとしても、その黙々とした従順が積み重なり、嵐にも揺るがない大きな森を形づくっていくのです。

冬を耐えた木だけが、最も深い春を迎える

パウロは牢獄という限界状況のただ中で、「神のことばは縛られていない」と宣言します。これは単なる精神的勝利ではなく、復活されたイエス・キリストを覚える信仰から噴き上がった勝利の凱歌です。神学的洞察が、人生の具体的な慰めへと変換される瞬間でもあります。レンブラントの絵の中で、足かせをはめられていながらパウロが平安でいられたのは、彼の視線が牢獄の壁ではなく、復活の主に固定されていたからでした。

ダビデ・張牧師の人生と説教を貫く核心もまた、この「復活信仰」にあります。誤解と迫害、四方から押しつぶされるような状況の中でも、彼が落胆しなかったのは、冬が厳しいほど春の花はより濃い香りを宿すように、苦難は聖徒を鍛える神の道具であると確信していたからです。
「私たちが共に死んだのなら、共に生きる。耐え忍ぶなら、共に王として治める。」

この約束は、ぼんやりした慰めではありません。毎朝、御言葉を開き、自分の生を照らし返す切実な聖書黙想を通して、私たちは死にも似た苦しみのただ中で命の芽を芽吹かせてくださる神の摂理を見いだすのです。

今日も私たちは、それぞれの「牢獄」のような現実に向き合っています。経済的危機、関係の断絶、未来の不透明さが私たちを縛るとき、Ⅱテモテ2章のメッセージは鮮明な道しるべとなります。強さは自分の決意から生まれるのではありません。上から注がれる恵みだけが、私たちをもう一度立ち上がらせます。

ダビデ・張牧師が語り続けた勧めのように、束縛を断ち、単純な生き方へと立ち返り、与えられた一日を誠実に生き抜くこと。それこそが、世が担いきれないキリスト者の品格です。たとえ私たちが不信に揺らぐことがあっても、主はいつも真実であり、私たちを否むことはありません。その変わらぬ真実に寄りかかりながら、私たちは「今日」という巡礼の道を、再び黙々と歩んでいき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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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Warmth That Thaws the Prison’s Chill: “My Dear One, Be Strong Only in Grace” – Pastor David Jang (Olivet University)

In Rome’s Mamertine Prison, the ragged breaths of an aged apostle settle onto a damp, frigid stone floor. In that space of despair—where the cold of iron chains burrows into his bones—the apostle Paul writes a letter to his young disciple Timothy. From a purely human point of view, he was a failure, nothing more than a condemned man soon to be executed. And yet, from the tip of the pen in his shackled hand, an unexpected sentence flows: “My child, be strong in the grace that is in Christ Jesus.” The world tells us to build muscles and fortify walls to prove our strength, but the old apostle, staring death in the face, calls for strength of a wholly different order. Not stubborn grit, but a “holy dependence” that leans entirely on grace freely given.

My friend, don’t try to blaze on your own—let yourself be filled with light

I think of Rembrandt’s Baroque-era masterpiece painted in 1627, Saint Paul in Prison. In the painting, Paul is confined in a dark cell, yet his face shines—seemingly not from light pouring in through a window, but from the Scriptures he is meditating on, as though the Word itself were radiating brightness. With his brush, Rembrandt proclaims that Paul’s strength does not arise from external circumstances, but from an inner light.

The resonance of this work meets beautifully with Pastor David Jang’s sermon on 2 Timothy chapter 2. In his preaching, Pastor Jang emphasizes that the strength Paul calls Timothy to is unrelated to temperament or innate courage. The believer’s strength is not a matter of wringing out whatever resources we have within, but of receiving the power supplied—pulsing like a heartbeat—by the grace found in Jesus Christ. Time and again, when Pastor David Jang faced countless obstacles in ministry, he chose “prayer,” a deeper trust, rather than merely “effort,” trying harder. For grace is not an escape hatch; it is the boldness that enables us to face harsh reality, and the masterful alchemist that turns even failure into maturity. We are not luminous bodies generating our own light; only when we live as reflectors—holding the light of grace and casting it outward—can we become strong without burning out.

Seeds of tears sown quietly behind the scenes

A heart filled with grace inevitably overflows toward others. Paul commands Timothy to entrust the gospel “to faithful people.” This is not mere education that transfers information; it is closer to midwifery—sharing life itself. A healthy church is not a stage where a single superstar performs a one-man show. Pastor David Jang grasped this principle from the earliest days of his ministry. He did not seek the glittering stage under the spotlight; instead, he willingly became a helper behind the scenes—raising people up and breathing life into them.

True gospel expansion is, as John’s Gospel portrays, like living water flowing from the believer’s innermost being to soak the world around them. A soldier does not get entangled in private affairs but concentrates on the mission; an athlete resists the temptation of shortcuts and runs according to the rules; and a farmer labors first and reaps last. Each of these images passes through the narrow gate called “self-denial.” The path of discipleship Pastor David Jang has embodied runs against the current of a modern society that worships efficiency and speed: laying down the hunger for recognition, choosing the honesty of the process over immediate results. It is like a hardworking farmer sowing seeds with sweat and tears. Though it may look slow, that quiet obedience accumulates—until it becomes a vast forest that does not sway even in storms.

Only the tree that endures winter welcomes the deepest spring

Even within the extreme limits of prison, Paul declares, “The word of God is not bound.” This is not a mere mental victory chant; it is a song of triumph bursting from faith that remembers the risen Jesus Christ. Here, theological insight transforms into tangible comfort. The reason Rembrandt’s Paul can remain serene even in shackles is that his gaze is fixed not on prison walls, but on the Lord of resurrection.

This “resurrection faith” is also the core that runs through Pastor David Jang’s life and preaching. Even amid misunderstanding, persecution, and situations that felt like being hard pressed on every side, he did not lose heart—because he was convinced that the harsher the winter, the more richly spring’s blossoms release their fragrance, and that suffering is God’s tool to refine His people. “If we died with Him, we will also live with Him; if we endure, we will also reign with Him.” This promise is not vague wishful thinking. Through the rigorous discipline of daily Scripture meditation—opening the Word each morning and letting it shine on our lives—we come to discover God’s providence that brings forth the sprouts of life even from pain that feels like death.

Even today, we face our own prison-like realities. When economic crisis, broken relationships, and an uncertain future tighten their grip, the message of 2 Timothy chapter 2 becomes a clear signpost. Strength does not come from my determination. Only grace poured down from above can lift us up again. As Pastor David Jang’s exhortation urges, breaking free from entanglements, returning to a simple life, and living faithfully through the day we are given—this is the dignity of a Christian that the world cannot withstand. Though we may waver in faithfulness, the Lord remains faithful and will not deny us. Leaning on that unchanging steadfastness, we quietly take up once more the pilgrim road called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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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onique] Une chaleur qui fait fondre le froid de la prison : « Toi, sois fort uniquement dans la grâce » – Pasteur David Jang (Olivet University)

Dans la prison Mamertine de Rome, sur des dalles de pierre humides et glaciales, la respiration âpre d’un apôtre vieillissant semble se déposer, lourde, dans l’air. Dans cet espace de désespoir où la morsure des chaînes s’insinue jusqu’aux os, l’apôtre Paul écrit une lettre à son jeune disciple Timothée. À vue humaine, il n’était qu’un perdant, un condamné à mort promis à une exécution imminente. Et pourtant, de la pointe de sa plume jaillit une phrase inattendue : « Toi donc, mon enfant, fortifie-toi dans la grâce qui est en Jésus-Christ. » Le monde dit qu’il faut prouver sa force en gonflant ses muscles et en élevant des forteresses ; mais le vieil apôtre, au seuil de la mort, commande une force d’un tout autre ordre. Non pas une volonté têtue, crispée, mais une « dépendance sainte » : s’appuyer entièrement sur la grâce donnée.

Toi, ne cherche pas à brûler par toi-même : laisse-toi imprégner de la lumière
Je repense au chef-d’œuvre que le maître du baroque Rembrandt peignit en 1627, L’Apôtre Paul en prison (Saint Paul in Prison). Dans le tableau, Paul est enfermé dans une geôle obscure ; pourtant, son visage resplendit, comme éclairé non par la lumière entrant par une fenêtre, mais par l’Écriture qu’il médite — la Parole elle-même, semblant rayonner. D’un coup de pinceau, Rembrandt proclame que la force de Paul ne vient pas de l’environnement, mais d’une lumière intérieure.

La résonance de cette toile touche avec une précision saisissante la prédication du pasteur David Jang sur 2 Timothée chapitre 2. Par son message, le pasteur Jang insiste : la force que Paul demande à Timothée n’a rien à voir avec un tempérament humain, une audace innée ou une vaillance naturelle. La force du croyant ne consiste pas à pressurer ses propres réserves, mais à accueillir la puissance que la grâce en Jésus-Christ fournit, pulsant comme un cœur. Dans le ministère, chaque fois qu’il s’est heurté à d’innombrables obstacles, le pasteur David Jang a choisi, non pas davantage d’« effort », mais une « prière » plus profonde — une confiance plus radicale. Car la grâce n’est pas un refuge pour fuir : elle est la hardiesse qui oblige à regarder la réalité en face, et l’alchimiste d’exception qui transforme même l’échec en maturité. Nous ne sommes pas des astres produisant leur propre lumière ; c’est en vivant comme des réflecteurs, imprégnés de la lumière de la grâce pour la renvoyer, que nous pouvons enfin être forts sans nous épuiser.

Dans les coulisses, semer en silence des graines arrosées de larmes
Un intérieur rempli de grâce déborde inévitablement vers le prochain. Paul ordonne la transmission : « confie [ces choses] à des hommes fidèles », pour que l’Évangile se poursuive. Il ne s’agit pas d’une éducation réduite au passage d’un savoir, mais d’un art proche de la sage-femme : partager la vie. Une Église saine n’est pas la scène d’un soliste-superstar menant un numéro en solo. Le pasteur David Jang a percé ce principe dès les débuts de son ministère. Il n’a pas recherché l’éclat des projecteurs sur une scène prestigieuse ; il s’est plutôt offert comme soutien dans les coulisses, celui qui relève et fait vivre les personnes.

Comme l’exprime l’Évangile selon Jean, la véritable expansion de l’Évangile ressemble à une eau vive jaillissant du ventre de celui qui croit, irriguant tout autour. Le soldat ne s’emmêle pas dans sa vie privée : il se concentre sur sa vocation. L’athlète repousse la tentation du raccourci et court selon les règles fixées. Le paysan, lui, peine le premier et récolte le dernier. Toutes ces images passent par une porte étroite : celle du « renoncement à soi ». Le chemin du discipulat que le pasteur David Jang a incarné allait à contre-courant d’une société moderne qui vénère l’efficacité et la vitesse : déposer le besoin de reconnaissance, choisir l’honnêteté du processus plutôt que le résultat immédiat. C’est comme le paysan qui sème avec sa sueur — et parfois ses larmes. Même si cela paraît lent, cette obéissance silencieuse s’accumule jusqu’à former une immense forêt qui ne plie pas, même sous la tempê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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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专栏】融化牢狱寒意的温度:“你啊,只要在恩典里刚强” – 张大卫牧師 (Olivet University)

罗马的马梅尔廷监狱里,潮湿而冰冷的石地上落着一位老使徒粗重的喘息。铁链的寒意钻入骨节的绝望空间中,使徒保罗给年轻的门徒提摩太写信。若从人的眼光看,他像个失败者,不过是即将被处决的死囚而已。然而,当他提笔之时,竟流淌出出人意料的句子:“我儿啊,你要在基督耶稣的恩典上刚强起来。”世人说要证明强大,就当练出肌肉、筑起城墙;可这位直面死亡的老使徒,却吩咐的是另一种维度的刚强——不是咬牙硬撑的意志力,而是全然倚靠赐下之恩的“圣洁的依赖”。

你啊,不要企图自己燃烧,只要承接那光
让我们想起巴洛克时代大师伦勃朗于1627年创作的名画《监狱中的使徒保罗》(Saint Paul in Prison)。画中的保罗虽身陷幽暗牢狱,他的脸却明亮得仿佛不是来自窗外射入的光,而是来自他正默想的圣经——也就是话语本身所发出的光。伦勃朗用画笔雄辩地指出:保罗的刚强并不取决于外在环境,而是源自内里的光。

这幅名画带来的回响,与张大卫牧师讲解《提摩太后书》第2章的信息精妙相接。张牧师在讲道中反复强调:保罗对提摩太所要求的刚强,与人的性格气质或天生胆识无关。信徒的刚强,不是把自己里面的资源榨干,而是接纳那在耶稣基督里、如同心脏搏动般持续供应的恩典之力。张大卫牧师在牧会现场一次次遭遇难关时,他选择的不是更用力的“努力”,而是更深的“祷告式信靠”。因为恩典不是逃避现实的避风港,反而是使人直视冷酷现实的胆量,也是把失败都炼成成熟的卓越“炼金术士”。当我们不把自己当作发光体,而是成为承接并反射恩典之光的反光体时,才会不再疲惫,且能真正刚强起来。

在舞台背后默默播下泪水的种子
被恩典充满的内在,必然会满溢并流向邻舍。保罗吩咐说:“要交托那忠心的人”,命令福音的传承。这并非只是传递知识的教育,更像是分娩生命的“接生术”。健康的教会不是由某一位超级明星主导的独奏舞台。张大卫牧师自事奉初期便看透这一原则:他不愿只站在聚光灯下的华丽舞台,反而甘心作那在幕后扶持、成全并使人得生命的同工者。

真正的福音扩展,正如《约翰福音》所描绘的——从信的人腹中流出活水的江河,润泽四周。士兵不被私事缠累,专注于呼召;运动员拒绝走捷径的诱惑,按着规矩奔跑;农夫则最先劳苦、最后收获果实。这些比喻都要穿过一扇窄门,名为“舍己”。张大卫牧师所呈现的门徒之路,是逆着崇拜效率与速度的现代潮流而行:放下被认可的渴望,选择过程的诚实胜过眼前的结果。那就像辛勤的农夫以汗水与泪水播撒种子——即使看起来缓慢,那沉默的顺服日积月累,终会长成一片在暴风雨中也不动摇的参天森林。

唯有熬过冬天的树,才能迎来最深的春天
保罗在监狱这般极限处境中仍宣告:“神的话语却不被捆绑。”这不是简单的精神胜利,而是从“记念复活的耶稣基督”的信心中涌出的凯歌——神学洞见在此转化为生活里具体的安慰。伦勃朗画中的保罗之所以戴着镣铐仍能安然,是因为他的目光并未钉在牢墙上,而是定睛在复活的主身上。

贯穿张大卫牧师生命与讲道的核心,同样在这“复活信仰”之中。即便面对误解与逼迫、仿佛四面受敌、被挤压得透不过气的时刻,他也不灰心。因为他深信:冬天越严酷,春天的花香越浓;苦难是神锻炼圣徒的器具。“我们若与他同死,也必与他同活;我们若能忍耐,也必与他一同作王。”这不是虚无缥缈的希望折磨,而是借着每日清晨展开圣言、以话语照亮人生的激烈默想与灵修,我们在近似死亡的痛苦中,发现神使生命发芽的护理与奥秘。

今天,我们也仍在面对各自如同监狱一般的现实:经济危机、关系断裂、未来不透明把我们捆住之时,《提摩太后书》第2章的信息便成为清晰的路标。刚强不出自我的决心,唯有从上头倾倒的恩典才能再次扶起我们。正如张大卫牧师所传递的劝勉:挣脱缠累,回到单纯的生活,把所赐的一天忠心活出来——这正是世人无法承受的基督徒品格。即便我们有时失信摇动,主却始终信实,绝不否认我们。倚靠那永不改变的信实,我们再次默默踏上“今日”这条朝圣之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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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감옥의 냉기를 녹이는 온기, “그대여, 은혜 안에서만 강하여라”,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로마의 마메르틴 감옥, 습하고 차가운 돌바닥 위로 늙은 사도의 거친 숨소리가 내려앉습니다. 쇠사슬의 냉기가 뼈마디를 파고드는 그 절망의 공간에서, 사도 바울은 젊은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실패자였고, 곧 처형될 사형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펜을 든 그의 손끝에서는 뜻밖의 문장이 흘러나옵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세상은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근육을 키우고 성을 쌓으라고 말하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노사도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강함을 주문합니다. 그것은 악바리 같은 의지가 아니라, 주어지는 은혜에 전적으로 기대는 ‘거룩한 의존’이었습니다.

그대, 스스로 타오르려 하지 말고 빛을 머금으라

바로크 시대의 거장 렘브란트가 1627년에 그린 명작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Saint Paul in Prison)>을 떠올려 봅니다. 그림 속 바울은 어두운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의 얼굴은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아니라 그가 묵상하고 있는 성경, 즉 말씀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빛에 의해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바울의 강함이 외부 환경이 아닌, 내면의 빛에서 기인함을 붓으로 웅변했습니다.

이 명화가 주는 울림은 장재형 목사의 디모데후서 2장 설교와 절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장 목사는 설교를 통해 바울이 디모데에게 요구한 강함이 인간적인 기질이나 타고난 담력과는 무관함을 역설합니다. 성도의 강함은 내 안의 자원을 짜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가 심장처럼 박동하며 공급하는 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목회 현장에서 수많은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더 애쓰는 ‘노력’ 대신 더 깊이 신뢰하는 ‘기도’를 선택했습니다. 은혜는 도피처가 아니라,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담대함이자 실패마저 성숙으로 빚어내는 탁월한 연금술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가 아니라, 은혜의 빛을 머금어 반사하는 반사체로 살 때 비로소 지치지 않고 강해질 수 있습니다.

무대 뒤에서 묵묵히 뿌리는 눈물의 씨앗

은혜로 채워진 내면은 필연적으로 흘러넘쳐 이웃에게로 향합니다. 바울은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며 복음의 계승을 명합니다. 이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이 아니라, 생명을 나누는 산파술에 가깝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한 명의 슈퍼스타가 이끄는 독주 무대가 아닙니다. 장재형 목사는 사역의 초기부터 이 원리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화려한 무대 위가 아니라, 사람을 세우고 살리는 무대 뒤편의 조력자를 자처했습니다.

진정한 복음의 확장은 요한복음이 묘사하듯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처럼 흘러나와 주변을 적시는 것입니다. 군사는 사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소명에 집중하며, 경기자는 편법의 유혹을 뿌리치고 정해진 규칙대로 달립니다. 그리고 농부는 가장 먼저 수고하고 가장 나중에 열매를 거듭니다. 이 비유들은 모두 ‘자기 부인’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합니다. 장재형 목사가 보여준 제자도의 길은 효율과 속도를 숭배하는 현대 사회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인정 욕구를 내려놓고, 당장의 결과보다 과정의 정직함을 택하는 것. 그것은 마치 수고하는 농부가 땀과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행위와 같습니다. 비록 더디게 보일지라도, 그 묵묵한 순종이 쌓여 폭풍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숲을 이루는 법입니다.

겨울을 견딘 나무만이 가장 깊은 봄을 맞이한다

바울은 감옥이라는 한계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단순한 정신 승리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믿음에서 터져 나온 승리의 개가입니다. 신학적 통찰이 삶의 구체적인 위로로 변환되는 순간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속 바울이 족쇄를 차고도 평온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시선이 감옥의 벽이 아닌 부활의 주님께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삶과 설교를 관통하는 핵심 또한 이 ‘부활 신앙’에 있습니다. 그는 오해와 핍박, 사방이 우겨쌈을 당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혹독할수록 봄의 꽃은 더 짙은 향기를 품듯, 고난은 성도를 단련시키는 하나님의 도구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죽으면 함께 살고, 참으면 함께 왕 노릇 하리라.” 이 약속은 막연한 희망 고문이 아닙니다. 매일 아침 말씀을 펴고 삶을 비추어 보는 치열한 성경 묵상을 통해, 우리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생명의 싹을 틔우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감옥과 같은 현실을 마주합니다. 경제적 위기, 관계의 단절, 미래의 불투명함이 우리를 옭아맬 때, 디모데후서 2장의 메시지는 선명한 이정표가 됩니다. 강함은 나의 결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부어지는 은혜만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장재형 목사가 전한 권면처럼, 얽매임을 끊고 단순한 삶으로 돌아가, 주어진 하루를 신실하게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 그리스도인의 품격입니다. 우리는 비록 미쁨이 없어 흔들릴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미쁘시니 우리를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그 변치 않는 신실함에 기대어, 오늘이라는 순례의 길을 다시 묵묵히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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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장재형목사(올리벳대학교)

누가복음 16장에 나타난 ‘불의한 청지기’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흔히 별개의 교훈으로 다뤄지곤 합니다. 하지만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는 이 두 비유가 하나의 일관된 논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거듭 역설합니다. 지상에서의 자원 관리라는 현실적 문제와 사후의 영원이라는 궁극적 세계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한한 오늘의 선택이 영원의 거처를 결정한다는 긴밀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소유의 양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소유를 이웃에게 어떻게 흘려보내느냐이며, 이것이 곧 자신이 속한 세계를 정의하게 됩니다.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는 도덕적 완벽함이 아닌, 시간의 유한함을 깨달은 자의 종말론적 결단을 조명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현재의 자원을 활용해 미래의 관계를 준비합니다. 여기서 장재형 목사가 포착한 핵심은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은 ‘소유’가 아닌 ‘위탁’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재물과 재능, 지식은 주인이 잠시 맡긴 도구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단순히 나의 안락을 위해 소모하고 있는지, 아니면 타인의 내일을 여는 통로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부유함 자체를 죄악시하는 단순한 구도를 넘어섭니다. 성경 속 아브라함이나 욥 역시 거부였으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문제는 부가 가져오는 ‘무감각의 환각’에 있습니다. 풍요로움이 주는 자기충족감은 타인의 고통에 귀를 닫게 만듭니다. 비유 속 부자의 죄는 폭정이 아니라 철저한 무관심이었습니다. 문 바로 앞에서 신음하는 나사로를 외면한 것이 그의 본질적인 죄였습니다. 신앙의 진정성은 멀리 있는 이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 집 문턱에서 시험받는 법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부자’의 개념을 현대의 영적 자산으로까지 확장합니다. 성경을 마음껏 읽고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며 안전한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부요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풍성함은 때로 ‘거룩한 언어’ 뒤에 숨어 더 깊은 교만과 무관심을 낳기도 합니다. 아무리 깊은 신학적 논의를 즐겨도 문 앞의 나사로를 지나치며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영적 자산은 축복이 아닌 심판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사역자들에게 “우리는 모두 부자”라고 말하는 것은 권위가 아닌 무거운 책임을 상기시키는 경고인 셈입니다.

사후 세계에서 일어난 두 사람의 역전은 지상에서의 삶이 이미 그 결과를 내포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을 현재의 찰나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영원의 축으로 이끄십니다. 오늘의 사소한 선택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인격으로 굳어져 결국 우리가 어느 나라에 속한 사람인지를 증명하게 됩니다. 뒤늦게 음부에서 나사로를 알아본 부자의 요청에 아브라함은 넘을 수 없는 구렁텅이를 언급합니다. 이는 회개의 기회가 영원하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사랑에는 분명한 타이밍이 있으며, 오늘 실천해야 할 선행을 내일로 미루는 것은 복음의 엄중함을 간과하는 일입니다.

또한 부자가 형제들을 위해 표적을 구했을 때 아브라함은 이미 우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고 답합니다. 이는 기록된 말씀의 충분성을 뜻합니다. 인간은 흔히 기적적인 체험을 갈망하며 불순종을 변명하지만, 장재형 목사는 신앙의 본질이 기적을 쫓는 눈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표적은 마음을 강제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진정한 회심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을 때 일어납니다. 혈통이나 종교적 이름표가 구원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삶으로 흘러나오는 열매만이 그 증거가 됩니다.

사회적 책임 측면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으로 번져 나가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교회가 경계해야 할 현상으로 ‘영적·물적 자산의 사유화’를 꼽습니다. 나눔은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공동체적 사명이자 구조적 결단이어야 합니다. 특히 문서 사역이나 교육 지원과 같은 구체적인 실천은 지식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영적 양식을 나누는 청지기 정신의 발현입니다. 한쪽의 풍요가 정체될 때 다른 쪽의 결핍이 발생하는 현상은 공동체 전체의 양심에 호소하는 거울이 됩니다.

비유 속에서 나사로가 원했던 것은 거창한 배려가 아니라 ‘부스러기’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작은 사랑조차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로 “가진 게 없다”는 핑계를 대는 것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냉수 한 그릇, 짧은 기도, 한 권의 책과 같은 작은 행위들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는 더 크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또한 고통 속에서 혀를 적셔달라는 부자의 호소는 우리가 지상에서 언어의 청지기로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누군가를 살리는 말을 했는지, 아니면 무관심과 조롱의 언어로 상처를 주었는지가 결국 우리의 영적 현주소를 말해줍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은 이 비유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수확의 풍요 뒤에 남겨진 이삭을 줍는 여인들의 구부정한 자세는 신앙의 본질이 겸손한 자세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현대 사회는 디지털 기기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더 가깝게 접하지만, 그만큼 감각은 마비되기 쉽습니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하늘의 시선’은 바로 이 무뎌진 감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자만이 땅의 신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닌 은혜로 얻는 것이지만, 그 은혜를 진정으로 체험한 자는 반드시 타인을 향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결국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우리 각자에게 “지금 당신의 문 앞에 있는 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남깁니다. 영생은 죽음 이후의 입장권이 아니라 현재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입니다. 영원을 믿는 자는 오늘의 물질과 시간, 언어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거창한 선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문을 열고 나사로를 발견하는 실천입니다. 내 안의 무관심을 깨우고 말씀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번역해 나가는 과정,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지기들에게 요구되는 진정한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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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장 – 장재형목사

요한복음 21장은 종종 본문에 덧붙여진 후일담처럼 오해되지만, 실상은 부활 신앙이 개인의 일상과 공동체의 방향을 어떻게 재편하는지를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결말부다. 이미 20장에서 기록 목적이 분명히 선언되었음에도 21장이 존재하는 이유는, 부활이 교리적 확증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좌표를 다시 설정하는 출발점임을 밝히기 위함이다. 장재형(Olivet University 설립)목사는 이 장을 베드로 개인의 감정적 회복 이야기로 축소하지 않는다. 그는 요한복음 21장을 통해, 부활 이후 공동체가 어떤 기준을 따라 나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항해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신앙의 나침반으로 읽는다.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의 실패를 분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실패의 자리에서 새로운 길을 여시며, 그 길의 핵심을 “나를 따르라”는 한 문장으로 제시하신다. 이 때문에 요한복음 21장은 복음서의 마지막 장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서문처럼 기능한다.

갈릴리 바다에서 시작되는 장면은 의도적으로 일상적이다. 성전도, 회당도, 군중이 모인 광장도 아니다. 밤새 반복되는 노동의 현장, 생계를 위한 자리에서 이야기는 다시 열린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그물과 배로 돌아간 모습은 믿음의 포기가 아니라, 방향을 잃은 영혼이 익숙한 언어로 몸을 옮긴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열심은 있으나 방향이 흐려진 상태’로 읽는다. 성실하지만 공허한 밤이다. 제자들은 밤새 애썼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요한복음에서 ‘밤’은 종종 분별의 상실, 두려움, 인간 중심적 계산을 상징한다. 부활을 경험한 이후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어둠의 리듬에 머물 수 있다. 그러나 새벽, 빛이 번져 오는 시간에 예수는 해변에 서 계신다. 부활은 어둠을 부정하는 감상적 선언이 아니라, 어둠을 가로질러 실제로 아침을 여는 능력임을 이 대비는 선명하게 보여 준다.

예수의 첫마디는 “고기가 있느냐”는 질문이다. 이는 추궁이 아니라 현실을 직면하게 하는 초대다. “없습니다.” 이 짧은 응답에는 좌절과 한계, 방향 상실이 모두 담겨 있다. 장재형목사는 신앙의 시작을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없는가’를 고백하는 데서 찾는다. 자기 확신이 무너질 때 비로소 말씀의 자리가 열린다. 이어지는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는 명령은 기술적 조언이 아니라, 순종의 방향을 바꾸라는 요청이다. 같은 바다, 같은 그물이지만, 말씀에 대한 반응이 달라질 때 결과의 차원이 달라진다. 그물은 찢어질 듯 차지만 찢어지지 않는다. 풍성함과 질서, 확장과 연합이 동시에 나타난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방향의 신학’으로 해석한다. 실패의 원인이 노력의 부족이 아니라 방향의 불일치일 수 있다는 통찰이다. 삶의 문제를 언제나 ‘더 열심히’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신앙을 소진시키지만, 예수의 말씀은 “어디를 향해 던질 것인가”를 묻게 한다. 신앙의 방향은 결국 관계의 방향이다. 누구의 음성을 기준으로 삼는가, 무엇을 성공이라 정의하는가가 삶의 궤도를 결정한다. 요한복음 21장의 기적은 물고기의 양을 늘린 사건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삶의 기준축을 자기 자신에게로 다시 맞추라고 요청하신 사건이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신앙은 노력의 누적이기 이전에 방향에 대한 순종이다.

이 기적은 사역의 시작과 끝을 잇는 상징적 반복이기도 하다. 예수는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물과 고기의 언어를 사용하셨고, 부활 이후에도 같은 언어로 그들을 다시 부르신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소명의 재점화라고 부른다. 부활은 과거를 지우는 힘이 아니라, 과거의 부르심을 더 깊은 사랑 위에서 다시 살려 내는 능력이다. 베드로에게 부활은 단순한 재도전이 아니라, 관계의 깊이가 달라진 새로운 출발이다. 같은 바다, 같은 배이지만, 이제는 말씀이 중심축이 된다.

153마리라는 구체적 숫자 또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기적을 모호한 감동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현실의 무게로 붙잡아 둔다. 부활 신앙은 추상적 열광이 아니라, 셀 수 있는 열매와 감당해야 할 책임을 동반한다. 풍성함은 축복이지만 동시에 공동체적 노동을 요구한다. 장재형목사가 은혜와 사명을 분리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활의 능력은 개인을 고립시키지 않고 공동체의 몸으로 움직이게 한다.

사랑받는 제자가 “주님이시다”라고 말하는 순간도 중요하다. 결과가 주님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알아보는 눈이 결과의 의미를 바꾼다. 베드로가 바다로 뛰어드는 행동에는 열정과 함께 과거를 직면하려는 결단이 담겨 있다. 장재형목사는 부활을 ‘기억을 재배열하는 능력’으로 설명한다. 과거는 지워지지 않지만, 과거가 우리를 규정하는 방식은 바뀐다. 부활은 죄책의 사슬을 끊되, 책임의 길은 유지하신다.

숯불가 장면은 요한복음 18장의 기억을 불러낸다. 부인의 장소가 회복의 장소로 변한다. 예수는 실패를 삭제하지 않고, 실패의 자리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바꾸신다. “와서 먹으라.” 설교보다 먼저 식탁이 놓인다. 부활 공동체는 먼저 먹이고 돌본 뒤 사명을 맡는다. 장재형목사가 교회를 말할 때 돌봄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 번의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은 심문이 아니라 관계의 재정립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책임으로 번역된다.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리더십의 기준을 능력이나 성취가 아닌 사랑으로 재정의한다. 진실한 고백 위에 세워진 사명은 공동체를 살린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미래의 길도 암시하신다. 이는 제자도의 낭만을 걷어 내고 십자가의 현실을 보여 준다. 부활의 능력은 고난을 제거하는 힘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하는 힘이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은 과거를 책망하는 소리가 아니라 미래를 비추는 등불이다.

비교의 유혹 앞에서 예수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따르라.” 부활 공동체는 동일한 길을 복제하는 조직이 아니라, 다양한 부르심이 한 주님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몸이다. 요한복음 21장은 소문이 아닌 증언, 추측이 아닌 기록 위에 공동체를 세운다.

결국 이 장은 방향의 문제를 묻는다. 열심이 곧 순종은 아니다. 방향이 맞을 때 작은 순종은 큰 열매로 이어진다. 장재형목사가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지금 나는 누구의 말씀을 기준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이 질문에 응답할 때, 신앙은 자기증명에서 신뢰로 이동한다.

요한복음 21장은 부활의 능력이 오늘의 삶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 준다. 그 능력은 방향을 잃은 사람에게 길을 주고, 실패한 사랑을 회복시키며, 공동체를 사명으로 다시 세운다. 부활 이후의 삶은 되돌아감이 아니라 새 출발이다. 우리의 밤은 지나갔고, 새벽은 이미 밝았다. 해변에 서 계신 주님은 오늘도 묻고 부르신다.
“그물을 던지라.”
“내 양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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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썩지 않을 면류관을 향한 경주

메타 설명: 고린도전서 9장 19–27절을 따라 장재형목사가 밝힌 ‘종 된 자유인’의 역설과 케노시스 사랑, 복음을 위한 선교적 유연성, 썩지 않을 면류관을 향한 자기 절제의 영성을 매끄럽게 해설합니다. 오늘의 삶과 목회 현장에 곧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신학적 깊이와 실천적 통찰을 함께 제공합니다.

검색 키워드: 장재형목사, 고린도전서 9장 19-27절, 종 된 자유인, 케노시스, 그리스도론, 사도 바울, 바울의 선교, 복음 전파, 썩지 않을 면류관, 자기 절제, 제자도, 신앙 생활, 이스미아 제전, 율법의 완성, 그리스도의 율법

종이 된 자유인, 썩지 않을 면류관을 향한 경주라는 주제는 고린도전서 9장 19–27절을 해석하는 장재형목사의 안내를 가장 농축된 문장으로 요약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이 절은 바울 개인의 다짐을 넘어, 복음이 열어 주는 자유의 본질과 목적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선언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자유’와 ‘종 됨’을 서로 상쇄되는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의 케노시스—자기 비움—안에서 두 개념이 하나로 합쳐진다고 설명한다. 신자는 죄와 율법의 속박에서 풀려났기에 참으로 자유롭다. 그러나 그 자유는 내 욕망을 관철하는 권리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묶을 수 있는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자신을 낮추셨기에, 그 사랑에 붙들린 이는 타인을 위해 종이 되는 선택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거듭 강조하는 그리스도인의 핵심 정체성, 곧‘종 된 자유인’이다.

이 정체성은 신학적 공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에서 출발한다. 장재형목사는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불러와 빌립보서2장의 노래—케노시스—를 신자의 실천 동력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동등됨을 특권으로 붙잡지 않고 스스로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 이 낮아지심은 수동적 굴복이 아니라 능동적 사랑의 선택이며, 바로 그 능동성 때문에 영광으로 높아졌다. 그러므로 ‘종 됨’은 패배나 열등이 아니라 사랑의 자유가 드러나는 가장 영광스러운 방식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음에도 내려놓은 까닭, 보상보다 한 영혼을 더 크게 여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복음 전파는 바울에게 직업이 아니라 소명, 선택이 아니라 응답, 계산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는 자유가 ‘사랑의 멍에’로 변하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바울은 자신이 가진 권리를 내려놓고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그들처럼, 율법 없는 자에게는 그들처럼,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되었다. 이는 기회주의적 처세가 아니라 복음을 위한 다리가 되는 일이다. 동시에 그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에서 벗어난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임을 분명히 했다. 선교적 유연성의 중심에는 변하지 않는 기준, 곧 사랑으로 요약되는 ‘그리스도의 율법’이 있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회당의 언어를 존중하면서도 시장의 언어로도 복음을 말할 줄 알았다고 해설한다. 동일한 복음이 서로 다른 문화권의 귀에 들리게 하려면, 선교자는 타인의 세계로 들어갈 용기가 필요하다. 바울의 ‘변화’는 본질의 타협이 아니라 전달의 최적화였고, 그 동력은 한 영혼이라도 더 얻으려는 사랑이었다.

사랑은 윤리적 판단을 넘어 공동체적 배려로 구체화된다. 우상의 제물 문제로 흔들리던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은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까지 말한다. 자유는 언제나 사랑의 덕을 세우기 위해 스스로 제한된다. 장재형목사는 ‘자유의 자기 제한’이 기독교 윤리의 심장부라고 설명한다. 강한 자의 자유가 약한 지체의 양심을 보호하기 위해 기꺼이 접히는 것, 이것이 제자도의 성숙이다. 물어야 할 질문은 “할 권리가 있는가”가 아니라 “형제를 세우는가”이다. 바울의 삶에는 이 질문이 일상의 판단 기준으로 작동했다. 도망 노비 오네시모를 위해 주인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고, 빚이 있다면 자신이 갚겠다고 약속한 사건은 복음 진리가 관계와 재정, 체면 같은 현실의 지점까지 내려와 몸이 되는 순간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처럼 ‘사랑으로 좁아지는 자유’가 결국 공동체를 살리고 복음을 밝히 드러낸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9장 24절부터 바울의 어조는 선교적 유연성에서 곧장 운동선수의 치열함으로 옮겨간다. 고린도 사람들에게 경기장은 상징적 공간이었다. 이스미아 제전의 달리기와 권투, 승자의 월계관은 도시의 자부심이었다. 바울은 익숙한 이미지를 끌어와 말한다. 모두가 달리지만 상은 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그러니 상을 얻도록 달려라. 세상의 선수도 썩어 없어질 관을 위해 절제한다면, 영원한 면류관을 향한 신자는 얼마나 더 철저해야 하겠는가. 여기서 ‘절제’는 금욕의 폐쇄가 아니라 목표를 향한 집중이다. “나는 목표 없이 달리지 않고, 허공을 치듯 싸우지 않는다.” 방향 없는 열심은 소모이고, 목적 없는 훈련은 자기만족일 뿐이다. 장재형목사는 신앙의 경주가 방향(복음의 영광), 방법(사랑의 법), 동력(케노시스의 은혜)을 동시에 요구한다고 정리한다. 이 셋 중 하나라도 떨어지면 경주는 빗나간다.

경주자의 이미지는 곧 ‘몸’을 다루는 훈련으로 이어진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는 고백은 육체만이 아니라 습관과 감정, 욕망과 시간 사용까지 포괄한다. 장재형목사는 자기 절제를 생활의 언어로 번역한다. 말씀 앞에 시간을 먼저 드리는 배치, 관계에서 ‘빨리 말하고 느리게 듣는’ 본능을 뒤집는 연습,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정결을 지키기 위해 매체 사용을 절제하는 선택, 재정에서 복음을 우선순위에 두는 결단, 쉼을 통해 사명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리듬—제자도의 절제는 삶 전체를 복음의 방향으로 재편성하는 일이다. 이 훈련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사랑의 경제학이다. 더 좋은 것을 위해 좋은 것을 내려놓는 지혜,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나의 편의를 포기하는 용기, 복음의 속도를 위해 나의 속도를 조절하는 절제,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경건의 훈련이다.

그러나 가장 서늘한 문장은 마지막에 온다.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자신은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 바울은 자기 확신으로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그는 은혜 안에서 담대했지만 성찰 앞에서는 떨고 있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떨림을 영적 지도자에게 주어진 거울이라 부른다. 복음의 길을 안내하면서 정작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자각이 제자도를 곧게 지킨다. 여기에는 자기 비하도, 자기 과신도 없다. 은혜 앞에 서는 정직함만이 있다. 은혜는 방종의 면허가 아니라 성결의 동력이고, 자유는 독주의 특권이 아니라 사랑의 책임이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는 ‘능력’보다 ‘복종’을, ‘성과’보다 ‘성실’을, ‘속도’보다 ‘진실’을 다시 배워야 한다. 복음은 과거의 사건이자 미래의 약속이지만, 그것이 오늘 나의 시간표와 언어, 소비와 관계를 뚫고 들어오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허공을 칠 뿐이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마음을 로마서에서 다시 비춘다.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확신 직후,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탄식이 이어진다. 확신과 탄식, 담대함과 눈물—이 긴장 속에서 바울은 길을 걸었다. 이것이 케노시스가 내면화된 사람의 정동이다. 확신 때문에 거만하지 않고, 탄식 때문에 위축되지 않는다. 확신은 방향을 고정하고 탄식은 사랑을 깊게 한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다가갈 수 있었다. 사랑이 본능을 규정하면 자유는 넓어지고, 자유가 사랑과 결합하면 절제는 기쁨이 된다. 사랑, 자유, 절제의 삼중주가 신자의 하루를 구성할 때 우리의 경주는 흔들려도 밀리지 않는다.

오늘의 현실은 바울 시대와 다르지만 핵심은 같다. 플랫폼과 알고리즘, 이미지와 속도가 지배하는 환경에서 자유는 ‘보여줄 권리’로, 절제는 ‘잃을 것’으로 오해되기 쉽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복음의 해석자(설명하는 사람)가 곧 증인(보여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상기시킨다. 증인은 말하기 이전에 보고, 보기 이전에 붙들린 사람이다. 케노시스의 사랑에 붙들리면, 우리는 소유로 자신을 증명하는 대신 비움으로 사랑을 증언한다. 인정 욕구를 절제하는 대신 은혜를 신뢰하고, 내 취향의 확장을 멈추는 대신 타인의 구원을 위해 공간을 낸다. 공동체 안에서는 강한 자의 자유가 약한 자의 양심을 살피는 배려로 표현되고, 세상 속에서는 선한 양심과 예의가 복음의 통로가 된다. 복음은 언제나 ‘그들’의 언어로 들려야 하기에,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낮추고 그들의 언어를 배운다. 이 낮춤이 바로 주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방식이었다.

결국 썩지 않을 면류관은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삶의 방향이다. 면류관을 얻기 위한 계산법이 아니라 면류관을 향해 시간을 배치하고 습관을 조직하는 원리다. 바울이 말한 절제, 경주, 복종은 모두 사랑으로 정의되는 자유의 운동학이다. 상을 얻도록 달리는 사람은 이미 상을 닮아간다. 그의 시간표에는 주님의 마음이 우선 배정되고, 그의 어휘에는 사람을 살리는 말이 먼저 떠오르며, 그의 선택에는 복음이 앞선다. 그가 사는 집과 일터와 교회와 도시가 그 패턴을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런 변화—케노시스의 사랑이 내면을 채우고, 사랑이 자유를 규정하며, 자유가 절제를 기쁘게 만들고, 절제가 삶을 복음의 방향으로 재배열하는 변화—가 고린도전서 9장 19–27절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제자도의 실체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자유를 내세우는 시대에 자유를 주장하기보다 사랑을 선택하고, 성과를 독촉하는 시대에 성실을 견디며, 속도를 찬양하는 시대에 방향을 고정하자.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그러나 언제나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로서 한 영혼이라도 더 얻기 위해 스스로 종이 되는 길을 택하자. 달리기는 계속된다. 허공을 치지 않으려면 오늘도 케노시스의 주님을 바라보며 몸을 쳐 복종하게 하라. 썩지 않을 면류관은 먼 상급이 아니라 오늘의 방향이다. 그 방향을 붙드는 한 우리의 걸음은 비록 흔들려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장재형목사가 펼쳐 보이는 이 길, ‘종 된 자유인’의 길은 곧 주님의 길이며 지금 여기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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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eur David Jang – L’espérance de la fin des temps


I. La signification des « temps et moments » dans une perspective eschatologique

Le passage de 1 Thessaloniciens 5.1-2 – « Pour ce qui est des temps et des moments, vous n’avez pas besoin, frères, qu’on vous en écrive. Car vous savez bien vous-mêmes que le jour du Seigneur viendra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 (1 Th 5.1-2) – illustre bien l’une des dimensions majeures de la foi de l’Église primitive. De façon générale, l’Église du premier siècle croyait que Jésus-Christ, après son ascension, reviendrait prochainement, nourrissant ainsi un sentiment d’imminence eschatologique. Immédiatement après la résurrection et l’ascension du Christ, les disciples se demandaient avec grand intérêt : « Quand reviendra-t-Il ? » Parmi eux, l’Église de Thessalonique était particulièrement fervente dans sa réflexion et sa discussion autour de cette question eschatologique. Lors du séjour d’environ trois semaines de l’apôtre Paul à Thessalonique (Ac 17), où il enseignait dans la synagogue, les membres de cette communauté échangeaient régulièrement avec lui sur la sotériologie (la doctrine du salut) et sur l’eschatologie (la doctrine de la fin des temps). Ainsi, Paul écrit : « Pour ce qui est des temps et des moments, vous n’avez pas besoin, frères, qu’on vous en écrive » (1 Th 5.1), reconnaissant que leur compréhension de ces notions de « temps » (chronos) et de « moments » (kairos) était déjà très avancée.

Alors, quelle est la différence entre chronos et kairos ? En grec, chronos désigne le temps « quantitatif ». Il renvoie à la durée, au déroulement, à la succession du temps, comme on le constate dans les termes « chronologie » (chronology) ou « chronomètre » (chronometer) : c’est l’idée d’un temps mesuré et découpé. À l’inverse, kairos désigne un moment « qualitatif », un instant particulier qui marque un changement essentiel. Par exemple, le jour d’un mariage n’est pas simplement une date de plus dans le flux ordinaire du calendrier : c’est une journée spéciale qui transforme la vie d’une personne de manière qualitative. Voilà ce que suggère kairos. Les croyants de Thessalonique savaient qu’au cours du chronos de l’Histoire, il y aurait le kairos du retour du Seigneur, à savoir « le jour du Seigneur ». Ce jour était imminent à leurs yeux.

Dans l’Écriture, l’expression « le jour du Seigneur » correspond dans l’Ancien Testament au « jour de Yahweh » ou « jour de l’Éternel », et dans le Nouveau Testament au « jour de Jésus-Christ » ou « jour de la venue du Seigneur ». Jésus-Christ a déjà accompli l’œuvre du salut sur cette terre ; sa résurrection et son ascension ont ouvert le chemin de l’histoire du salut. Cependant, il est également écrit : « Ce Jésus, qui a été enlevé au ciel du milieu de vous, reviendra de la même manière » (Ac 1.11). Ainsi, l’Église vit dans l’espérance de ce « jour » futur, le jour de l’accomplissement final. La Bible ne présente donc pas une conception cyclique de l’histoire. Contrairement à certaines pensées orientales qui voient l’histoire comme une répétition sans fin – semblable au cycle des saisons (printemps, été, automne, hiver) –, l’Écriture sainte annonce une vision linéaire de l’histoire : elle débute à un point précis (la création), elle progressera vers une fin, et à l’ultime achèvement surviendront le jugement dernier et l’avènement de « nouveaux cieux et d’une nouvelle terre ».

Dire que l’Église de Thessalonique possédait une foi eschatologique signifie qu’elle vivait constamment dans la tension et la joyeuse espérance du « retour proche du Seigneur ». Malgré les persécutions, les épreuves et les fausses doctrines qui pullulaient, ils gardaient fermement cette conviction : « Très bientôt, Jésus-Christ viendra effacer nos souffrances et rendre justice. » Comme l’a déclaré Jésus en Matthieu 10.23 : « Quand on vous persécutera dans une ville, fuyez dans une autre… Vous n’aurez pas achevé de parcourir toutes les villes d’Israël que le Fils de l’homme sera déjà venu. » Aux yeux des Thessaloniciens, le retour du Seigneur pouvait survenir à tout moment. De plus, dans Actes 1, l’ange déclare : « Hommes de Galilée, pourquoi restez-vous là à regarder au ciel ? Ce Jésus qui vous a été enlevé… reviendra de la même manière. » Cette promesse était la force motrice de l’Église primitive.

Dans ce contexte, Paul, dans ses deux épîtres aux Thessaloniciens, apporte des réponses précises aux questions eschatologiques. Au chapitre 4 de la première épître, il explique le sort des croyants décédés (résurrection des morts et enlèvement) ; au chapitre 5, il leur rappelle : « Vous savez bien vous-mêmes que le jour du Seigneur viendra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 (1 Th 5.2), soulignant qu’ils ne doivent pas se laisser obséder par des calculs de dates. Bien que Paul ne leur indique pas le « temps et le moment » exacts, il ne leur demande pas pour autant d’attendre passivement dans l’ignorance. Au contraire, il réitère l’enseignement de Jésus à propos d’un avènement «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 (cf. Mt 24, Lc 17, Mc 13, dits « petits apocalypses »), affirmant que les Thessaloniciens connaissent déjà cela. Par ailleurs, la parabole du figuier enseigne la nécessité de discerner les signes des temps, même si « le Fils lui-même ne connaît pas ce jour » (Mt 24.36) : toute tentative de déterminer une date précise est donc vaine.

Ainsi, l’eschatologie est l’un des trois grands piliers de la doctrine chrétienne. Tout comme la christologie et la sotériologie sont indispensables pour forger la foi et la vie du croyant, l’eschatologie constitue le cœur de notre compréhension du temps et de l’histoire en reliant présent et avenir. Depuis l’Église primitive, la question de la fin de l’histoire est abordée sous divers angles. Les théories du prémillénarisme, du postmillénarisme et de l’amillénarisme en sont des exemples. Le dispensationalisme prémillénariste détaille, entre autres, l’enlèvement, la grande tribulation et le millénium. Le postmillénarisme, lui, voit la progression de l’Évangile et l’expansion graduelle du règne du Christ sur terre, jusqu’à son retour. Quant à l’amillénarisme, il considère le « règne de mille ans » comme un symbole : la période actuelle de l’Église serait déjà le « règne spirituel » de Christ. Malgré des controverses théologiques, tous s’accordent sur un point : « Il y aura assurément une fin. » L’Église attend ce jour, se prépare à ce jour, et vit en tant que peuple de Dieu dans le temps présent.

L’Église de Thessalonique se posait aussi ces questions et Paul y répond dans ses lettres. Lors d’une visite de Timothée parmi eux, les croyants y revenaient sans cesse : « Quand le Seigneur reviendra-t-Il ? » Paul leur écrit alors 1 et 2 Thessaloniciens comme réponse. Cet échange montre à quel point il est précieux, pour la communauté, de poser clairement les questions de foi. L’exemple de l’Église de Corinthe est similaire : elle avait écrit à Paul à Éphèse pour éclaircir des points cruciaux (immoralité, viande sacrifiée aux idoles, dons spirituels, résurrection, etc.). Paul répond à travers 1 Corinthiens, un texte d’une richesse inestimable pour nous aujourd’hui. Il est possible que nous n’aurions pas reçu de tels écrits si les Corinthiens n’avaient pas interrogé Paul avec autant d’insistance. L’histoire de l’Église témoigne que la « dynamique des questions-réponses » est un processus essentiel pour consolider la foi.

Notons cependant que les Thessaloniciens ne basculèrent pas dans un extrémisme désordonné au sujet de la fin des temps. Au contraire, Paul constate qu’ils ont déjà une connaissance approfondie : « Pour ce qui est des temps et des moments, vous n’avez pas besoin… » (1 Th 5.1). Certes, certains prônaient peut-être un arrêt du travail en raison de l’imminence du jour du Seigneur, mais dans l’ensemble, la communauté continuait à s’engager, à prier et à exercer la vigilance, tout en conservant un bon équilibre (2 Th 3). Paul salue leur esprit équilibré et les exhorte à persévérer dans la vigilance et la tempérance.

Examinons de plus près 1 Thessaloniciens 5.2-3 : « Vous savez bien vous-mêmes que le jour du Seigneur viendra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À ce moment-là, la ruine fondra sur eux à l’improviste, comme les douleurs de l’enfantement surprennent la femme enceinte, et personne n’y échappera. » L’image du « voleur dans la nuit » est employée dans l’Ancien et le Nouveau Testament pour décrire un désastre, un jugement divin ou la venue du Seigneur qui s’abat soudainement. Cela suggère, d’une part, la dimension inattendue et funeste pour ceux qui ne sont pas prêts ; d’autre part, cela reflète l’enseignement de Jésus : « Seul le Père connaît ce jour » (Mt 24.36). En d’autres mots, l’homme ne peut le calculer.

À ce sujet,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dans plusieurs sermons et écrits que le point central de l’eschatologie n’est pas de spéculer sur la date exacte, mais de « comprendre comment vivre aujourd’hui conformément à la volonté de Dieu ». Nous confions à Dieu le moment de ce jour et, tout en espérant pleinement le salut et le jugement parfaits qu’apportera la parousie (la venue du Seigneur), nous cherchons à vivre dès maintenant en « serviteurs fidèles et bons ». En effet, selon la parole de Matthieu 24.14 – « Cette bonne nouvelle du royaume sera proclamée dans le monde entier, pour servir de témoignage à toutes les nations. Alors viendra la fin » –, l’eschatologie nous rappelle prioritairement la « mission » de l’Église : répandre l’Évangile à tous les peuples. L’espérance de la fin n’invite pas l’Église à fuir le monde par peur, mais au contraire à se lever : « Veillez, soyez prêts, croissez dans la foi et l’amour, et annoncez l’Évangile jusqu’aux extrémités de la terre. »

C’est pour cela que la communauté de Thessalonique reçoit des éloges : elle n’était pas obsédée par le « calcul de la date du retour », mais vivait d’une ardeur sincère en Christ, entretenant une communion fraternelle saine. « Pour vous, frères, vous n’êtes pas dans les ténèbres, pour que ce jour vous surprenne comme un voleur » (1 Th 5.4) : Paul affirme que, parce qu’ils sont « fils de la lumière, fils du jour », la venue du Seigneur ne sera pas pour eux un événement « soudain », mais plutôt une rencontre attendue. Le pasteur David Jang insiste également sur cette vigilance et cette tempérance : ne pas céder à la peur panique, mais plutôt se préparer activement et de manière positive, ancrée dans l’Évangile.

Enfin, considérons l’application de l’eschatologie dans la vie personnelle. Tout être humain connaîtra un jour la mort physique : c’est la fin « personnelle ». En même temps, un jour, l’histoire de l’univers arrivera à son terme : c’est l’eschatologie « cosmique » et le retour du Seigneur. Paul exhorte l’Église à se préparer sans faillir, aussi bien à la mort individuelle qu’à la fin universelle. Comment ? Par la méditation continue de la Parole, la pratique de la foi et de l’amour. « Nous qui sommes du jour, soyons sobres, ayant revêtu la cuirasse de la foi et de l’amour, et ayant pour casque l’espérance du salut » (1 Th 5.8). Au milieu du combat spirituel, les soldats de Christ se protègent le cœur avec la foi et l’amour, et protègent leur tête avec « l’espérance du salut ». Il ne s’agit pas seulement de connaître la venue du Seigneur en théorie, mais de se fortifier intérieurement au moyen de la foi et de l’amour, et de garder une pensée claire grâce à l’espérance du salut. Ainsi, quelles que soient les épreuves, nous ne chancellerons pas.

Paul ajoute : « Vous êtes tous des fils de la lumière… » (1 Th 5.5). La lumière incarne la vérité. Autrement dit, ils demeurent dans la Parole de Dieu, regardent l’histoire au travers d’elle et vivent le présent dans la perspective de l’espérance eschatologique. Le « jour du Seigneur » peut bien venir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 ils ne sont pas dans l’obscurité, car ils veillent avec des « lampes allumées », tel le groupe des dix vierges (Mt 25) qui attendaient l’époux. Ainsi, l’Église de Thessalonique est un exemple remarquable de « communauté eschatologique » loué dans le Nouveau Testament.

Si Paul a pu écrire : « Pour ce qui est des temps et des moments, vous n’avez pas besoin qu’on vous en écrive » (1 Th 5.1), c’est que l’Église de Thessalonique possédait une certitude et une compréhension déjà solidement établies de la fin de l’histoire. Elle ne craignait pas la fin de manière vague, n’était pas non plus égarée par de faux calculs. Elle poursuivait au contraire une saine eschatologie, basée sur une vision de l’histoire que couronnent l’espérance du retour du Seigneur et la mise en pratique de l’amour. Le pasteur David Jang rappelle souvent que l’eschatologie n’a pas vocation à alimenter la crainte ou à inciter à spéculer sur des dates ; son but est plutôt de nous faire réaliser « comment vivre chaque jour », et de fortifier notre rôle de peuple de Dieu dans le monde.


II. La nécessité de veiller et de vivre avec sobriété, et la mission de l’Église

Continuons en examinant 1 Thessaloniciens 5.4 et suivants : « Pour vous, frères, vous n’êtes pas dans les ténèbres… Nous qui sommes du jour, soyons sobres, ayant revêtu la cuirasse de la foi et de l’amour, et ayant pour casque l’espérance du salut » (1 Th 5.4-8). À partir de là, voyons comment la foi eschatologique de l’Église primitive se concrétisait en un style de vie et en une mission ecclésiale. Paul est explicite : « Pour vous, frères, vous n’êtes pas dans les ténèbres, pour que ce jour vous surprenne comme un voleur » (5.4). Cela signifie qu’à ceux qui se préparent et qui veillent, le jour du Seigneur ne saurait être un événement subit et effrayant. Certains se focalisent peut-être uniquement sur « la venue comme un voleur, imprévisible », mais Paul envisage la question tout autrement : « Puisque vous êtes dans la lumière, ce jour ne peut venir comme un voleur, car vous êtes déjà prêts. »

Cette idée fait écho à la parabole des dix vierges (Mt 25.1-13). Cinq vierges avaient préparé de l’huile, les cinq autres non. Quand l’époux arriva, celles qui étaient prêtes entrèrent avec lui ; les autres se retrouvèrent devant une porte fermée. Pour ces dernières, l’arrivée de l’époux fut une « venue comme un voleur ». Elles vécurent l’amertume d’être exclues, tandis que pour les vierges prévoyantes, ce n’était pas une surprise mais plutôt l’accomplissement tant attendu. L’Église de Thessalonique ressemble à ces jeunes filles prévoyantes : elle n’était ni envahie par l’angoisse ni prisonnière d’une attente oppressante. Elle s’appuyait fermement sur la promesse : « Le Seigneur viendra sûrement », et vivait dans la foi, l’amour et l’espérance, comme on porte une cuirasse et un casque.

Qu’entend-on concrètement par « veiller et vivre avec sobriété » ?

  1. Veiller signifie refuser la négligence spirituelle. Celle-ci apparaît quand on oublie le Seigneur et qu’on se laisse distraire par les tentations du monde. Sans la conscience eschatologique, on glisse vite vers les valeurs matérialistes ou la passivité spirituelle. Mais celui qui attend fermement le retour du Christ se rappelle constamment : « Je suis un serviteur du Seigneur, je rendrai compte un jour devant Lui. » Comme dans la parabole des talents (Mt 25.14-30), le maître revient tôt ou tard, et fait le bilan avec ses serviteurs. C’est là le cœur de l’eschatologie : elle ne dit pas « Un jour lointain, nous serons au ciel ; peu importe ce qui se passe ici ». Elle déclare plutôt : « C’est aujourd’hui, dans chaque instant, que tu dois servir fidèlement, car le Seigneur viendra et nous demanderons compte de tout. » En conséquence, les membres de l’Église de Thessalonique ne se détournaient pas de leurs responsabilités quotidiennes. Bien au contraire, ils travaillaient avec diligence et vivaient dans la société, tout en nourrissant une vive attente du Seigneur.
  2. Vivre avec sobriété implique la maîtrise de soi et l’examen de conscience. Comme le dit Paul, ceux qui s’enivrent boivent la nuit (5.7), ceux qui dorment spirituellement se laissent aller à l’inconscience. Mais en tant qu’enfants de la lumière, nous affirmons : « Nous sommes du jour ; nous ne suivrons pas aveuglément les tendances du monde. » Paul souligne alors la « cuirasse de la foi et de l’amour ». Pour protéger la partie vitale de l’âme (le cœur), il faut la foi et l’amour : la foi, c’est s’appuyer sur « Dieu qui a résolu de nous sauver » ; l’amour, c’est rendre cette foi tangible par des actes concrets. Quant au « casque de l’espérance du salut », il est indispensable à la protection de la tête (pensées). Sans espérance, on chancelle face aux épreuves de la vie. Mais si l’on demeure convaincu que Christ reviendra pour parachever toute chose dans la justice et la paix, aucune situation ne nous plonge définitivement dans la confusion.

Celui qui veille et vit dans la sobriété n’envisage pas la fin comme une nuit de jugement effroyable. Pour lui, c’est surtout le jour glorieux de la rencontre avec le Seigneur ; l’achèvement du salut tant attendu. C’est pourquoi Paul proclame : « Car Dieu ne nous a pas destinés à la colère, mais à la possession du salut par notre Seigneur Jésus-Christ, qui est mort pour nous, afin que, soit que nous veillions, soit que nous dormions, nous vivions ensemble avec lui » (1 Th 5.9-10). Pour les croyants, la fin ne se limite donc pas au jugement, mais concerne l’accomplissement total du salut en Christ. Dès lors, celui qui embrasse une saine eschatologie ne sombre pas dans la peur, ni dans la désinvolture. Une annonce correcte de la fin des temps nous conduit à « vivre fidèlement dès aujourd’hui », dans l’attente joyeuse de la plénitude du salut.

De même, l’Église doit se rappeler constamment sa « mission eschatologique ». Une Église qui perd de vue la fin risque de se laisser happer par les intérêts de ce monde. Si elle n’a plus la vision du royaume de Dieu, elle devient vite une institution aux aspirations purement terrestres, parfois pire que le monde lui-même. D’où l’insistance du pasteur David Jang : l’Église doit redevenir cette communauté spirituelle qui attend ardemment le retour du Seigneur et, dans cet élan, se consacre à la mission jusqu’aux extrémités de la terre. Il ne s’agit pas de grossir son propre effectif ou son pouvoir, mais de porter l’Évangile à « toutes les nations » (Mt 24.14). Le culte, l’enseignement de la Parole, l’édification mutuelle prennent toute leur signification dans cette perspective : « Le Seigneur va revenir. »

En 1 Thessaloniciens 5.11, Paul conclut : « C’est pourquoi exhortez-vous réciproquement et édifiez-vous les uns les autres, comme en fait déjà. » Dans d’autres lettres, l’apôtre doit parfois corriger des divisions, mais ici, il les félicite pour la solidarité et l’encouragement mutuel qui les distinguent. Ceci est directement lié à leur foi eschatologique : l’eschatologie rappelle que « nous sommes tous enfants de Dieu, destinés à régner avec Lui lorsque le Seigneur reviendra », et nous pousse à vivre dans l’amour fraternel d’une manière encore plus fervente à l’approche de ce jour. Plus ce jour approche, plus l’Église doit s’unir, se sanctifier et se fortifier. Il s’agit de couvrir les faiblesses fraternelles, de s’encourager et de s’édifier mutuellement.

En somme, l’eschatologie motive nos actes quotidiens. Dans un monde incertain, elle nous assure : « Je suis enfant de Dieu, enfant de la lumière. Je dois donc mener une vie de foi, car le Seigneur reviendra. » L’Église, pour sa part, est une « communauté eschatologique ». Bien plus qu’un bâtiment ou qu’une institution financière, elle est le rassemblement des « enfants de la lumière », qui proclament « Maranatha ! (Seigneur, viens !) », annoncent l’Évangile au monde, et s’emploient à répandre l’amour.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souvent que l’expansion de l’Évangile et les actions caritatives envers les démunis sont autant de manifestations concrètes de la foi eschatologique. « Réaliser dès maintenant la culture du ciel » et « prendre soin des délaissés » tout en guettant le retour du Seigneur résument l’attitude du croyant « éveillé et sobre ».

Dans cette optique, l’éloge et l’exhortation adressés par Paul à l’Église de Thessalonique gardent toute leur actualité. Paul leur écrit : « Frères, je n’ai rien à vous apprendre sur ces questions, car vous les avez déjà étudiées et débattues en profondeur. » C’est une reconnaissance du discernement qu’ils possèdent concernant l’histoire et la fin. « Vous êtes des enfants de la lumière. Ce jour ne vous surprendra pas comme un voleur », ajoute Paul. Ce sont des paroles de grâce qui réaffirment leur identité : préparés, veillant dans l’amour, grandissant ensemble. Possédant une telle foi, l’Église traverse persécutions et épreuves sans se laisser ébranler, restant fidèle à l’Évangile.

De nos jours, l’eschatologie est parfois mal comprise au sein des assemblées. Certains manipulent les croyants par la peur de la fin, d’autres prétendent connaître la date précise du retour du Seigneur, ce qui frise l’hérésie. C’est pourquoi il importe de retenir la « saine eschatologie » de l’Église de Thessalonique. Deux principes y coexistent : « Personne ne peut connaître le jour ni l’heure, donc n’écoutez pas de prophéties privées ni de calculs farfelus » ; mais également « Sachez discerner les signes du temps et restez éveillés dans la Parole, la mission et l’amour. » Quand ces deux aspects sont équilibrés, l’Église croît sainement, embrassant à la fois le présent et l’éternité. La vie chrétienne ne rejette pas la réalité terrestre, mais elle conserve comme boussole l’achèvement du royaume de Dieu.

Le pasteur David Jang enseigne fréquemment que si nous nous focalisons uniquement sur « la venue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 nous risquons d’être paralysés par la peur ou obsédés par le désir de calculer la fin. Or le message de Paul est clair : « Pour vous, le jour du Seigneur ne peut pas survenir comme un voleur. Vous êtes dans la lumière ; veillez et soyez sobres, revêtez la foi, l’amour et l’espérance du salut. » Si cette assurance s’enracine dans l’Église, celle-ci ne sombre pas dans la morosité. Au contraire, elle s’épanouit dans la joie et la vie, car l’eschatologie, loin d’inoculer l’anxiété, insuffle dynamisme et espérance.

Et pour reprendre 1 Thessaloniciens 5.9-10 : « Car Dieu ne nous a pas destinés à la colère, mais à l’acquisition du salut par notre Seigneur Jésus-Christ, qui est mort pour nous, afin que… nous vivions ensemble avec lui. » Voilà le cœur de l’Évangile. L’eschatologie inclut certes jugement et colère de Dieu, mais pour les croyants en Christ, ce jugement fait partie intégrante de l’économie du salut. Nous entrerons dans la pleine communion avec le Seigneur à ce moment-là. Ainsi, Paul offre une réponse limpide à l’interrogation eschatologique des Thessaloniciens : « Le jour du Seigneur » n’est pas la terreur finale pour le croyant, mais le point culminant de sa rédemption. Que l’Église s’exhorte donc mutuellement et s’édifie pour ce jour.

Aujourd’hui, nous avons besoin plus que jamais de cette perspective. Le monde est en proie à l’insécurité et aux conflits, et beaucoup sont plongés dans l’incertitude. L’Église ne doit pas répondre : « Tout va bientôt s’effondrer, tremblez de peur et cachez-vous ! » Elle doit proclamer : « Le Christ va revenir et apporter la plénitude du salut. Alors, soyons vigilants et sobres, vivons dans l’amour et portons l’Évangile. » Telle est la bonne nouvelle. Telle est la posture des « vierges sages avec leur huile » et du « serviteur fidèle qui fructifie ses talents ». Dès lors, peu importe le jour : nous accueillerons le Seigneur dans la joie.

Le message de 1 Thessaloniciens 5 sur la fin des temps nous enseigne que le jour du Seigneur vient « comme un voleur dans la nuit », mais que les « enfants de la lumière » ne seront pas surpris, puisqu’ils sont déjà en éveil et en sobriété. Le pasteur David Jang le rappelle : « Ne transformons pas l’eschatologie en peur ou en prédictions hasardeuses. Au contraire, qu’elle devienne un moyen de fortifier l’Église dans sa santé spirituelle, son élan missionnaire et son amour fraternel. » À l’exemple de l’Église de Thessalonique qui s’écriait chaque jour « Maranatha ! (Seigneur, viens !) », demeurons dans l’entraide et l’exhortation mutuelle. Ainsi, au son de la trompette du Seigneur, nous pourrons l’accueillir dans l’allégresse.

En définitive, à travers ces deux axes de 1 Thessaloniciens 5, nous retenons la leçon suivante :

  1. « Nul ne connaît exactement les temps et les moments, mais le Seigneur reviendra assurément. »
  2. « Si ce jour vient comme un voleur pour le monde, pour les enfants de la lumière, il ne saurait être une surprise, car ils se tiennent prêts dans la foi. »

De plus, Jésus a déclaré que « l’Évangile sera annoncé à toutes les nations, et alors viendra la fin » (Mt 24.14). L’Église est donc appelée à parler de la fin tout en assumant pleinement sa vocation missionnaire au cœur du monde.

En conclusion, l’eschatologie ne pousse pas au repli, mais incite à la « transformation du présent » grâce à une foi inébranlable. Comme l’Église de Thessalonique sous la persécution, nous voulons espérer « le jour du Seigneur » et, ce faisant, recevoir l’éloge de Paul : « Frères, je n’ai rien à vous apprendre sur ce sujet. » Cela suppose un approfondissement continu de la Parole et un témoignage actif d’amour. Ensemble, soyons « enfants de la lumière » dans un monde obscur, proclamant « Viens, Seigneur Jésus », pour vivre une eschatologie saine, au service du prochain. Alors, au jour du Seigneur, nous entrerons dans son repos et sa gloire. Telle est la promesse donnée par Paul à l’Église de Thessalonique, et qui demeure pleinement valide pour nous aujourd’h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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