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소년은 한 송이 장미에 물을 주고, 바람을 막아 주고, 유리 덮개를 씌운다. 사랑은 꽃을 알아보는 눈에 머물지 않고, 그 곁을 지키는 손길이 된다. 소년이 매일 아침 장미를 들여다보고 벌레를 잡아 주고 저녁이면 유리 덮개를 씌우는 그 반복된 동작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에 가깝다. 장재형 목사(미국 Olivet University 설립)의 에베소서 4장 설교는 교회의 성숙 역시 서로를 돌보고 세우는 사랑과 떨어져 있지 않음을 일깨운다. 공동체의 크기는 눈에 보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이 자라나는 깊이는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숫자로 셀 수 있는 성장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성숙은 종종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교회가 몇 명이 모이는가는 누구나 셀 수 있지만, 그 안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자랐는가는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설교는 규모의 언어가 아니라 관계의 언어로 성숙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은사에 하나의 은혜가 흐른다
교회의 하나 됨은 모든 사람이 같은 능력을 갖추고 같은 일을 하는 상태가 아니다. 설교는 그 근원을 삼위 하나님에게서 찾고,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중심에 놓는다. 서로 다른 지체들이 한 몸에 속한다는 사실은 차이를 없애라는 요구가 아니라, 그 차이로 서로를 섬기라는 부름이다. 은혜는 사람을 같은 모양으로 깎아 내는 대신 각자의 은사가 공동체의 유익을 향하도록 이끈다. 연합의 출발이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주님께 있다는 사실은, 서로를 향한 존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탕을 놓는다.
이 바탕이 흔들리면 공동체는 쉽게 비교와 경쟁의 언어로 되돌아간다. 누구의 은사가 더 눈에 띄는가, 누구의 자리가 더 중요해 보이는가를 따지기 시작하면 몸의 지체라는 자각은 흐려진다. 반대로 연합의 출발점을 주님께 두면, 서로 다른 은사는 위협이 아니라 선물로 다가온다.
에베소서 4장 12절에서 은사의 목적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봉사의 일을 감당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은사는 영적 우월함을 증명하는 자격증이 아니라 맡겨진 책임에 가깝다.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만 높이고 다른 지체의 몫을 하찮게 여긴다면, 은사를 자랑할수록 정작 그 은사가 세워야 할 몸은 약해진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와 함께, 그것으로 누가 도움을 얻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일이 각자 원하는 방향으로 흩어지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모든 지체가 함께 향하는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다. 내게 없는 은사를 가진 사람을 경쟁 상대가 아니라 필요한 지체로 바라볼 때, 차이는 불편함을 넘어 감사의 이유가 된다. 나의 몫을 감당하면서 다른 이의 수고를 귀히 여기는 마음에서 하나 됨은 실제 관계의 모습을 얻는다.
교회를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의 성장을 혼자만의 성취로 소유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받은 도움이 나를 세웠듯, 나의 수고도 다른 이를 세우는 데 쓰여야 한다. 성숙한 믿음은 자신이 얼마나 자랐는지만이 아니라, 곁의 사람을 얼마나 자라게 하는지도 돌아본다. 이 물음은 편하지 않다. 자신의 성장에만 몰두하던 시선을 옆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앎은 사랑을 배운다
에베소서 4장 13절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이 하나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응답이다. 갈라디아서 3장을 따라 이 설교는 믿음으로 구원의 문턱을 넘고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설명한다. 앎은 그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삶에 체화하는 과정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결단과 그 복음의 의미를 알아 가는 배움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앎에는 관계의 깊이가 담겨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설명을 많이 기억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며 닮아 가는 인격적 교제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랑을 설명하는 말이 정교해졌는데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거칠다면, 배운 진리가 아직 삶에 충분히 스며들지 못한 것은 아닌지 살필 필요가 있다. 신학적 통찰은 타인을 판단하는 말에서보다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는 태도에서 깊어진다.
이 구분은 미묘하지만 중요하다. 사랑에 대해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것과 실제로 누군가를 참아 주고 섬기는 것은 다른 능력이기 때문이다. 앎이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앎은 아직 절반의 여정만 지난 셈이다.
믿음을 내세워 배움을 멈추는 것도, 지식을 앞세워 믿음의 결단을 비워 두는 것도 성숙의 길은 아니다. 설교는 지식 없는 믿음이 맹목과 피상성에 머물 수 있고, 믿음 없는 지식이 공허한 논쟁으로 기울 수 있음을 경계한다. 이 둘이 갈라지면 신앙은 한쪽으로 기운다. 믿는 진리를 배우고, 배운 진리대로 살아가려는 순종이 함께 필요하다.
그래서 성경과 교리를 공부하는 일은 예배와 기도, 성례의 자리와 연결된다. 머리로 이해한 말씀이 성령의 역사 안에서 삶의 지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이 부분적인 앎 너머의 온전한 앎을 바라보듯, 오늘의 배움에는 겸손과 소망이 함께 놓여 있다. 성경 묵상은 다 안다는 자신감을 굳히는 시간이 아니라, 아직 더 알아야 할 사랑 앞에 자신을 여는 시간이 된다.
흔들리는 풍조 앞에서 믿음은 뿌리를 내린다
이러한 성장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설교가 마태복음 13장의 겨자씨와 누룩을 통해 바라보는 교회는 점진적으로 자라고 깊어지는 생명체다. 눈에 띄는 규모의 변화만으로 그 생명의 상태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성령의 내적 역사와 믿음의 순종, 공동체의 연합이 함께할 때 성장은 성숙을 향해 나아간다.
히브리서 5장 12~14절의 젖과 단단한 음식은 그 여정에 필요한 돌봄과 책임을 보여 준다. 기초 단계에 있는 이에게는 기초를 세워 주는 가르침이 필요하고, 자라난 이에게는 배운 말씀을 봉사와 섬김으로 옮기는 실천이 따른다. 오랜 신앙 경력도 그 자체로 성숙을 보증하지 않는다. 신앙의 시간이 쌓였다면, 이제 다른 사람을 돌보고 세울 수 있는지도 함께 돌아보게 된다.
이 차이를 헤아린다는 것은 누가 앞섰는지 서열을 매기는 일과 다르다. 아직 기초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그에 맞는 가르침을, 다른 이를 돌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책임을 맡기는 일이다. 모두에게 같은 모습을 요구하기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자라도록 돕는 것이 공동체의 돌봄이다. 기다림과 권면이 함께할 때, 성장의 속도가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성숙의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성숙에는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하는 힘도 포함된다. 에베소서 4장 14절의 어린아이는 이 문맥에서 순수함보다 교묘한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미성숙을 가리킨다. 설교는 인터넷과 SNS에 떠도는 잘못된 가르침, 성공과 부를 믿음의 열매로 지나치게 포장하는 말을 경계한다. 그럴듯하게 들리거나 놀라운 현상이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진리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성공과 부가 믿음의 깊이를 대신하는 잣대가 되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방향은 흐려진다. 중요한 것은 가르침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들리는가가 아니라, 그 말이 말씀의 진리에 서 있는가이다. 설교가 영적 분별을 교회론과 연결하는 까닭은 거짓을 가려내는 목적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지키고 세우는 데 있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위해서는 무엇을 믿는지 분명하게 배우는 시간이 필요하다. 성경 연구와 교리 교육, 교회의 신앙고백을 익히는 일은 믿음의 뿌리를 말씀에 내리게 한다. 여기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와 서로를 점검하며 권면하는 공동체가 함께해야 한다. 분별은 혼자 옳다는 확신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도 말씀 앞에서 살피는 태도를 포함한다.
사랑으로 이어진 마디마다 소망이 자란다
그러나 분별력이 있다는 이유로 사랑을 뒤로 미룰 수는 없다. 에베소서 4장 15~16절이 보여 주는 성장의 방식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고, 각 마디가 도움을 주고받으며 연결되는 것이다. 진리를 굳게 붙드는 일과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따로 놓인 과제가 아니다. 사랑이 빠진 교회 활동은 많아질수록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공허한 소리로 남을 수 있다.
설교는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들이 연결되고 힘줄과 살이 돋아나 큰 군대로 일어서는 장면을 교회의 연합과 함께 읽는다. 흩어진 뼈들의 수만 늘어난다고 살아 있는 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맞닿고 연결되어야 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일어서야 한다. 이 장면은 공동체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그 사람들이 사랑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 사이의 거리를 돌아보게 한다.
그 거리는 일상의 작은 말과 태도에서 좁혀진다. 서로를 배려하고 온유와 겸손으로 대하는 일은 교회의 외양을 꾸미는 예절에 그치지 않는다. 몸의 마디를 돌보듯 관계를 돌보는 실천이며, 알고 있는 사랑을 실제로 살아 내는 순종이다. 이러한 사랑은 공동체가 외부의 갈등 앞에서도 서로를 붙드는 내적인 힘이 된다. 그렇게 자란 형제애는 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향한 섬김으로 흘러가야 한다.
장재형 목사가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함께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교회는 현재의 모습에 머물도록 부름받은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완성을 향해 자라가는 공동체다. 설교가 교회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전위대’로 부를 때, 그 부름은 사랑의 실천과 떨어져 있지 않다. 미래의 완성을 바라보는 믿음은 오늘 서로를 세우는 책임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말씀을 오래 들었다는 기억만으로 오늘의 성숙을 대신할 수는 없다. 내 안에 쌓인 앎이 관계를 살리는 사랑으로 흘러가는지, 내가 받은 은혜가 누군가를 돕는 손길이 되고 있는지 돌아볼 때다. 교회의 성숙을 바라는 나의 마음은, 오늘 내 곁의 한 사람을 대하는 말과 태도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그 대답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오늘 하루의 작은 말 한마디에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