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의 성경 묵상: 일상의 관성을 거스르는 은혜와 거룩 (Olivet University)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는 “온전한 주의력을 기울이는 것은 기도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시선이 머무는 곳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향하는 곳에 삶의 목적지가 결정된다는 이 서늘한 통찰은, 모든 것이 우리의 시선을 빼앗으려 드는 오늘날 더욱 날카로운 진실로 다가온다. 의미 없는 정보가 범람하고 찰나의 자극이 영혼을 덮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무엇에 영적 주의력을 기울이며 살아가고 있는가.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기록된 바울의 절실한 권면을 통해, 이 시대가 잃어버린 시선을 되찾고 은혜 안에서 삶의 방향을 온전히 재정렬하라는 묵직하고도 깊은 초대를 건넨다. 편지의 끝자락에서 바울이 던진 “끝으로”라는 한마디는 단순한 지면의 마무리가 아니라, 칭의를 넘어 성화로 나아가는 신자의 영적 중력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거룩한 전환점이다. 이 시대의 수많은 목소리가 불안을 자극하고 더 빠른 성취를 재촉할 때, 본문의 메시지는 다급한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 영혼의 심연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삶의 방향을 재정렬하는 거룩한 부르심과 성경 묵상

바울의 텍스트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더욱 많이 힘쓰라”는 구절이 단순한 도덕적 분발이나 일시적인 감정의 고양을 요구하는 수사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 설교는 대목에서 요구되는 것이 순간적인 격정이 아니라 지속하는 의지이며, 감정의 휘발이 아니라 삶에 흩뿌려져 뿌리내린 습관화된 순종임을 선명하게 밝힌다. 이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을 배웠다면, 그 배움은 결코 머리맡의 슬로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히브리서가 증언하는 믿음의 본질, 요한복음에서 베드로에게 던지신 사랑의 검증, 그리고 바울 스스로가 밝혔던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으려는 동기가 모두 이 하나의 뚜렷한 초점으로 수렴한다. 매 순간의 의사결정 앞에서 “이 선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첫 번째 질문으로 삼는 감각이야말로 신앙적 문해력의 진정한 출발점이다.

말씀의 흐름은 구원의 문턱인 칭의를 지나 성령 안에서 빚어지는 성화의 완만한 상승 곡선을 묵묵히 그려낸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에게 거룩함이란, 결코 닿을 수 없는 추상적인 교리나 먼 미래의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의 스크린 위에, 손끝의 궤적에, 촘촘하게 짜인 하루의 시간표 안에 새겨 넣어야 할 실존의 벅찬 명령으로 읽혀야 한다. 주님을 향한 종말론적 열망이 커질수록, 현실의 책임을 등한시하는 영적인 맹신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긴장과 일상, 뜨거운 열정과 차가운 성실이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갈 때, 비로소 거룩은 일회성 공연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흔들림 없는 구조가 된다. 칭의가 값없이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라면, 성화는 그 은혜에 빚진 자들이 마땅히 매일의 삶으로 갚아나가야 할 거룩한 반응인 것이다.

일상의 관성을 거스르는 믿음과 회개의 자리

거룩을 일상의 든든한 구조로 세우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뼈아픈 구별이 요구된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조용히 신을 벗어야 했던 것처럼, 신앙은 무분별한 긍정이 아니라 공간을 가르고 시간을 구분하며, 내면을 유린하는 욕망의 흐름에 단단한 경계선을 긋는 일이다. 무엇이 내 마음을 어지럽게 흔드는지, 내 시선과 손길이 어느 곳에 가장 오래 머무는지, 어떤 콘텐츠가 내 영적 상상력을 세속의 방식으로 길들이고 있는지 자각하는 것이 회개의 첫걸음이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이 누룩처럼 번져가듯, 영혼을 좀먹는 음란과 타협 역시 누룩처럼 공동체를 은밀하게 잠식한다는 사실을 짚어낸다. 아주 작은 허용치의 균열이 결국 전체의 감수성을 무너뜨리기에, 통로를 과감히 끊어내고 흐름을 멈추어 세우는 결단만이 생명을 지키는 건강한 원리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통로를 끊어낸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기술적 습관과 접속 환경을 재설계하는 매우 구체적인 실천으로 다가온다. 영혼을 무기력하게 이끄는 알고리즘의 거대한 관성에 맞서, 신자는 의식적이고 거룩한 역습을 감행해야 한다. 아침의 빈 시간을 말씀으로 먼저 채우는 루틴, 무의식적으로 메신저를 열기 전 짧은 묵상을 선행하는 습관, 잠들기 전 화면의 빛을 끄고 진리의 한 문단을 깊이 곱씹는 미세한 훈련들은 작지만 가장 확실하게 세속과 나를 분리하는 구별의 형식이다. 성화는 비범하고 장엄한 결단의 이벤트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문턱을 낮춘 작은 선택들의 지루한 반복 속에서 자라난다. 들음으로 구별되고 전함으로 단단해진다는 한자 ‘성(聖)’의 묵상처럼, 말씀을 귀로 듣고 입으로 고백하며 삶으로 살아내는 영적인 리듬만이 세속의 탁류 속에서 믿음을 온전히 지켜낸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존중의 복음

거룩이라는 단어는 자칫 종교적인 공간 안에 박제되기 쉽지만, 신앙의 진짜 무게는 언제나 가장 가까운 관계의 틈새에서 달아진다. 아내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권력이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있던 고대의 억압적 구조 속에서 상호 존중이라는 복음의 숭고한 보정을 이뤄낸 위대한 사건이었다. 이 빛나는 신학적 통찰을 오늘의 가정과 인간관계로 가져오면, 배려와 신뢰라는 지극히 따뜻하고 구체적인 일상의 언어로 피어난다. 신앙의 깊이는 화려한 영적 어휘나 공적인 예배석의 열정만으로 검증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 먼저, 곁에 있는 이의 목소리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타인의 상처를 함부로 들춰내지 않으며,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평범한 제스처들이 거룩의 체온을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나아가 데살로니가 교회가 칭찬받았던 형제 사랑의 본질은 ‘비움’이라는 단어로 깊이 있게 묵상된다. 소유의 많고 적음과 무관하게, 스스로를 비워내지 않으면 영혼은 단단하게 굳어지고 기꺼이 비워내면 은혜는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흐른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지친 지체를 위해 늦은 밤 동행을 자처하고, 누군가의 부족함을 나의 넉넉함으로 말없이 채워주는 작은 수고들이 모일 때 공동체 안에는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짙은 신뢰의 밀도가 형성된다. 누가 쓰러져도 기꺼이 곁에서 어깨를 내어줄 사람이 있다는 이 고요한 확신은 절망에 빠진 자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진리가 세련되고 유창한 언어가 아니라 투박하지만 진실한 삶의 온기로 울려 퍼질 때, 상처 입고 방황하는 이들은 비로소 숨을 고르고 쉴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소란한 시대를 잠재우는 조용한 순종과 빛나는 소망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살아남는다는 현대 사회의 가혹한 압박 속에서, 역설적으로 많은 이들이 무엇 하나 제대로 완결 짓지 못한 채 영혼의 극심한 소진을 경험한다. 이러한 시대적 피로감 속에서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는 성경의 권면은 그 어떤 위로보다 깊고 단단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영원한 하늘의 소망을 품은 사람은 내일 세상이 끝난다 해도 오늘 마땅히 감당해야 할 성실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낸다. 정해진 시간에 책임을 다하고, 땀 흘려 일하는 정직한 노동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며, 자신이 배운 바를 이웃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환원하는 태도야말로 거룩한 소명의 오늘날 버전이다.

이렇게 아무에게도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는 삶의 태도는 단순한 경제적 자립의 차원을 훌쩍 넘어선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이나 세상의 가벼운 여론에 휘둘리지 않는 내면의 깊은 자유이며, 불의한 세상 속에서도 단정함과 책임감을 잃지 않는 통제된 에너지의 아름다운 발현이다. 동시에 이 조용한 순종은 결코 개인적인 영역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억울한 자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신원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기에, 그 믿음은 고통받는 약자들의 곁으로 기꺼이 다가가는 적극적인 사랑과 윤리로 확장된다. 신원을 믿는다는 것은 시대의 아픔 앞에 침묵하고 방관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향하는 곳으로 내 발걸음의 방향을 조정하고 연대하는 거룩한 용기인 것이다.

이 설교가 전하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호흡을 오늘의 궤적과 포개어 보면, 흩어져 있던 일상의 조각들이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구원의 이야기로 엮이게 된다. 거룩은 결코 세상을 향해 겹겹이 쌓아 올린 폐쇄적이고 차가운 담장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들어와 숨을 돌릴 수 있는, 넉넉하고 푸른 생명의 들판이다. 하루의 시작을 묵상으로 열고, 무의식적인 스크롤을 감사의 고백으로 바꾸며, 일상의 작고 사소한 선택들을 십자가의 은혜 아래 묵묵히 재배열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가장 선명한 믿음을 만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좁고 불편한 길처럼 보이나, 실상은 우리의 영혼이 가장 넓어지고 인간다워지는 눈부신 궤적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든 묵상의 끝자리에서 조용히 질문을 남겨본다. 오늘 당신이 디딘 일상의 고요한 한 걸음은, 세상의 거대한 관성을 거슬러 영원한 소망으로 나아가는 가장 아름다운 순종의 발자국이 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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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 목사 설교 묵상: 은혜로 받은 은사, 하나의 몸을 세우다 (Olivet University)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다성음악(Polyphony)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서로 다른 독립된 선율들이 허공에서 부딪치거나 흩어지지 않고 마침내 하나의 장엄한 화성으로 융합되는 경이로운 신비에 압도된다. 저마다의 음자리가 다르고 고유한 리듬과 템포를 지녔으나, 그 모든 다채로운 소리는 결국 절대자를 향한 단 하나의 찬양으로 수렴된다. 장재형 목사의 고린도전서 12장과 로마서 12장 강해를 마주할 때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영적 풍경도 이 깊은 음악적 숭고함과 맞닿아 있다. 첫 문단에서 열어젖히는 영적 지평선 위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진 신령한 은사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몸 안에서 유기적으로 호흡하며 힘차게 박동하는지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다름이 분열의 씨앗이나 갈등의 불씨가 되지 않고, 오히려 온전한 교회를 떠받치는 필수적인 기둥이 되는 ‘다양성 속의 통일성’은 추상적인 교리의 틀 안에 갇혀 있지 않다. 하나의 주님, 하나의 성령, 하나의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위대한 은총이 사람과 직분과 사역의 다채로운 형태로 분배되어 공동체를 세우는 이 절대적 원리는 우리의 좁은 시야를 넓혀준다.

은혜가 빚어낸 영적 선물, 십자가 복음이 여는 평등의 자리

말씀이 여는 첫 관문은 은사의 본질을 투명하게 직시하는 일이다. 은사라는 단어의 헬라어 뿌리가 ‘카리스’, 곧 은혜에 닿아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신앙 여정에 중대한 이정표를 세운다.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은 애초에 인간의 공로나 자격을 묻지 않으며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과 사역 속에서 누리고 있는 재능과 기회, 직분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쟁취해 낸 성취의 트로피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벅찬 감사의 이유이자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명의 책임이다. 이 복음의 진리가 영혼 깊숙이 닻을 내릴 때, 비로소 타인과 나를 저울질하며 시기하거나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는 파괴적인 비교의 독이 말끔히 빠져나간다. 과거 우상들의 침묵 속을 떠돌던 우리가 이제 예수를 나의 주로 고백하게 된 그 근본적인 전환 자체가 모든 은사의 문을 여는 첫 열쇠다. 누구나 동일한 은혜의 문을 통과했기에 누구도 우월할 수 없으며, 각자에게 지혜를 따라 다른 은사가 배당되었기에 교회 안에서 불필요한 존재란 성립할 수 없다.

믿음의 분량으로 피어나는 일상, 거룩한 소명의 길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는 성전 뜰 안의 안전한 지대에만 머물지 않고, 신자들이 발 딛고 살아가는 치열한 직업의 영역으로 성큼 걸음을 옮긴다. 매서운 박해를 피해 유럽 대륙으로 흩어져야만 했던 위그노들이 낯선 땅에서의 고단한 생존을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Calling)으로 받아들인 역사는 깊은 울림을 남긴다. 그들이 척박한 현실 속에서 이룩한 정밀기계와 금융, 의류 산업의 빛나는 성취는 자신이 흘리는 땀방울을 예배의 거룩한 연장선으로 해석해 낸 탁월한 신학적 통찰의 열매였다. 내가 매일 마주하는 일터와 내가 쥐고 있는 직업이 단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영광스러운 자리임을 자각할 때, 일의 품격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한다. 로마서 12장에 기록된 ‘믿음의 분량’이라는 언어는 이 소명의 논리를 정교하게 깎아낸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하나님이 지혜롭게 배분하신 분량에 합당하게 자신을 이해하라는 권면은 도덕적 겸양을 넘어선 신학적 명령이다. 손이 걸음을 대신할 수 없고 발이 시력을 대신할 수 없듯, 우리가 일상 속에서 각자의 몫을 성실히 지킬 때 그리스도의 몸은 온전하게 세워진다.

성경 묵상으로 벼려낸 영적 분별과 하나 됨의 신비

고린도전서 12장과 로마서 12장에 열거된 은사의 목록들을 가만히 묵상하면, 그것이 세상을 섬기고 교회를 살리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생명의 동맥임을 깨닫게 된다. 초대 안디옥 교회에서 예언의 은사가 선두에 놓였던 이유는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교회의 항로를 비추는 영적 등대였기 때문이다. 섬김은 공동체의 연약한 구조를 든든히 지탱하고, 가르침은 진리를 체화시키며, 구제와 긍휼은 차가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따뜻한 온기를 유지해 준다. 지혜와 지식의 말씀, 치유와 능력을 행하는 하늘의 힘(dýnamis)은 죄의 무감각을 깨우고 굳은 마음을 소생시킨다. 특히 정보와 소음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무엇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무엇이 내면의 헛된 욕망인지 식별해 내는 영 분별의 은사는 생명줄과도 같다. 개인의 깊은 탄식을 담아내는 방언의 기도 역시 공동체 안에서는 통역이라는 은사를 통해 연합의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은사는 철저히 나의 영적 체험을 넘어 우리의 공적인 유익으로 번역될 때 그 거룩한 목적을 완수한다.

소망을 품고 드리는 참된 예배와 남은 자의 헌신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이 풍성한 은사론은 개인의 영성을 넘어 교육과 문화, 제도의 영역으로 과감히 뻗어 나간다. 학문적 다양성이 무한히 확장되더라도 ‘하나님 영광’이라는 단 하나의 통일성에 닻을 내리지 않으면 결국 세속의 조류에 휩쓸려 쇠락하고 만다는 서구 대학들의 역사는 묵직한 경고다. 오유(OU)와 같은 기독교 교육 기관이 “교회 선교에 필요한 글로벌 리더십 양성”이라는 십자가 복음의 중심성을 끝까지 지켜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거룩한 사명은 오직 참된 예배의 회복을 통해서만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한목소리로 눈물 흘려 찬양하며 찢긴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의 신비 안에서, 파편화된 우리가 다시 온전한 몸으로 조립되는 이 경이로운 경험은 결코 차가운 스크린을 통과할 수 없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거친 세상에서 상처받은 잃어버린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다시 살아낼 영적 탄력을 공급받으라는 거룩한 배려다.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나누셨고,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은사에 대한 이 명쾌한 선언은 남은 생애를 뒤흔드는 복음의 메아리다. 전문화와 고립을 동시에 겪는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빛으로 존재하려면, 은사의 전문성(깊이)과 하나님 나라라는 방향성이 정확히 일치해야만 한다. 강단과 삶의 현장, 리더십과 묵묵한 팔로워십은 서로를 밀어내는 경쟁자가 아니라 거룩한 짝이다. 은사의 파괴적인 경쟁은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지만, 은사의 헌신적인 교환은 무너진 공동체의 생명력을 폭발적으로 살려낸다. 오늘 당신은 서로의 다름을 분열의 핑계로 삼고 있는가, 아니면 더 큰 온전함을 빚어내는 은혜의 벽돌로 삼고 있는가. 은혜로 값없이 받은 것을 철저히 은혜의 방식으로 흘려보내는 진실한 예배자가 진정 하나님이 이 시대에 찾으시는 희망임을 묵묵히 묻고 또 기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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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두운 밤에 피어난 순종, 겟세마네의 고독이 부활의 빛이 되기까지 –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장재형 목사

유월절을 맞은 예루살렘의 밤은 어둡고 무거웠습니다. 성전 제단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린 수많은 희생양들의 붉은 피가 기드론 골짜기로 스며들어 거친 물길을 붉게 적시던 그 시간, 인류의 무거운 죄악을 온몸으로 짊어질 참된 어린양은 묵묵히 감람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겟세마네, 곧 ‘기름을 짜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그 척박하고 외로운 땅에서 예수는 홀로 땅에 엎드리셨습니다. 불과 며칠 전 수많은 군중의 종려나무 가지 환호 속에서 영광의 왕으로 입성하셨던 그분이, 이제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철저한 고독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극의 서막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구원의 역사가 가장 치열하고 처절하게 쓰이는 생생한 현장입니다.

피 묻은 기드론 골짜기, 침묵의 겟세마네로 향하다

십자가라는 거대한 운명 앞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극한의 두려움과 떨림은 겟세마네의 차가운 밤공기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고뇌와 슬픔의 자리를 애써 신학적 당혹감으로 덮어두거나 미화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의 가장 깊고 진실한 심장부로 우리를 조심스럽게 안내합니다. 요한복음이 예수의 십자가를 향한 영광스러운 결단을 숨 가쁘게 강조했다면, 마가복음은 그 직선의 궤적이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던 인간적인 심연과 떨림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정직한 성경 묵상을 통해, 참된 신앙이란 두려움이 전혀 없는 비인간적인 강철 같은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의 한복판에서도 자신의 연약함을 안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용기임을 배우게 됩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기독교 변증가인 C.S. 루이스(C.S. Lewis)는 인간의 고통과 순종의 문제를 깊이 파고들며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일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통찰한 바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겪으신 영혼의 짓눌림 역시 단순한 형벌이나 무의미한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위대한 순종의 고백을 끌어내기 위한, 거룩하고 필연적인 영혼의 압착기였습니다.

고통의 잔과 아바 아버지, 그 처절한 순종의 신비

예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땅에 엎드려 기도하시는 동안, 그분의 핏빛 기도는 단지 당면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나약한 도피가 아니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날카로운 신학적 통찰은 바로 이 대목에서 눈부신 빛을 발합니다. 십자가는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끌려간 패배의 길이 아니라, 얼마든지 자신의 능력으로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피하지 않기로 결단한 거룩한 선택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신 전능자를 향해 ‘아바 아버지’라는 가장 친밀한 호칭을 부르며 엎드린 예수의 모습은, 신앙의 본질이 운명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아버지의 선하심을 끝까지 신뢰하는 굳건한 관계에 있음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를 통해 내 뜻과 욕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참된 기도는 내 뜻이 철저히 꺾이고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내 삶에 온전히 스며들게 하는 자기 비움의 과정입니다. 이 처절하고 고독한 순종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십자가가 품고 있는 진정한 은혜의 깊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영적 침륜에 빠진 제자들, 그리고 홀로 깨어있는 자의 고독

그러나 이토록 치열한 우주적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가장 가까운 곳에서 주님을 지켜야 했던 제자들은 육신의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주님의 이 탄식 어린 물음은 그 옛날 감람산에서 잠들었던 제자들만을 향한 과거의 책망이 아닙니다. 오늘날 화려한 세상 속에서 영적인 무감각과 안일함에 빠져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영혼을 강하게 흔들어 깨우는 장재형 목사의 엄중한 영적 경고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주를 모른 체하지 않겠다고 큰소리치며 호언장담했지만, 다가오는 유혹과 생존의 두려움 앞에서 인간의 얄팍한 결심이 얼마나 순식간에 허물어지는지를 처참하게 증명하고 말았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주님의 긍휼 어린 말씀은, 제자들을 향한 정죄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균열을 꿰뚫어 보는 아픈 진단입니다. 복음서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친 청년의 치부까지 가감 없이 기록함으로써, 신앙이 인간의 영웅담이 아니라 실패하고 무너진 자들까지도 끝내 끌어안는 십자가 사랑의 위대함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십자가의 역설, 은혜로 다시 빚어지는 부활의 아침

겟세마네의 깊은 밤, 세 번에 걸친 땀과 눈물의 기도가 끝난 후 예수는 마침내 “일어나라 함께 가자”며 다가오는 어둠과 배반의 세력을 향해 묵묵히, 그러나 담대히 걸음을 내디디셨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깊이 있는 설교는 이 겟세마네의 마지막 선언이 피할 수 없는 절망을 향한 체념이 아니라, 아버지를 향한 온전한 신뢰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로운 결단임을 명확히 짚어냅니다. 기도는 눈앞에 닥쳐올 가혹한 고난의 잔을 지워주지는 못했지만, 그 고난을 정면으로 맞이하는 그리스도의 내면 질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횃불과 몽치를 든 폭력과 배신의 칼날 앞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숭고한 평안, 가장 연약해 보이는 십자가의 약함 속에서 오히려 사망 권세를 깨뜨리는 가장 강력한 구원을 이루어내는 이 놀라운 역설은 오직 참된 복음 안에서만 온전히 설명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의 깊은 묵상은 흩어지고 분주한 우리의 마음을 다시 침묵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간절히 부르고 있습니다. 내 헛된 뜻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맹렬하게 충돌하는 삶의 어두운 골짜기마다, 우리는 도망치거나 피곤하다는 핑계로 잠드는 대신 철저히 깨어 엎드려야 합니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묵묵히, 그러나 확신에 차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던 예수의 핏빛 발자취를 따라갈 때, 우리는 가장 어두운 고독의 끝에서 비로소 찬란하게 밝아오는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가 오늘 우리에게 안내하는 이 좁고 험한 고난과 순종의 길은, 결국 영적으로 잠들고 무너진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마침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동행하게 만드는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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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감옥의 냉기를 녹이는 온기 –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장재형 목사

로마의 마메르틴 감옥, 습하고 차가운 돌바닥 위로 늙은 사도의 거친 숨소리가 내려앉습니다. 쇠사슬의 냉기가 뼈마디를 파고드는 그 절망의 공간에서, 사도 바울은 젊은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실패자였고, 곧 처형될 사형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펜을 든 그의 손끝에서는 뜻밖의 문장이 흘러나옵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세상은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근육을 키우고 성을 쌓으라고 말하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노사도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강함을 주문합니다. 그것은 악바리 같은 의지가 아니라, 주어지는 은혜에 전적으로 기대는 ‘거룩한 의존’이었습니다.

그대, 스스로 타오르려 하지 말고 빛을 머금으라

바로크 시대의 거장 렘브란트가 1627년에 그린 명작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Saint Paul in Prison)>을 떠올려 봅니다. 그림 속 바울은 어두운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의 얼굴은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아니라 그가 묵상하고 있는 성경, 즉 말씀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빛에 의해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바울의 강함이 외부 환경이 아닌, 내면의 빛에서 기인함을 붓으로 웅변했습니다.

이 명화가 주는 울림은 장재형 목사의 디모데후서 2장 설교와 절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장 목사는 설교를 통해 바울이 디모데에게 요구한 강함이 인간적인 기질이나 타고난 담력과는 무관함을 역설합니다. 성도의 강함은 내 안의 자원을 짜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가 심장처럼 박동하며 공급하는 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목회 현장에서 수많은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더 애쓰는 ‘노력’ 대신 더 깊이 신뢰하는 ‘기도’를 선택했습니다. 은혜는 도피처가 아니라,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담대함이자 실패마저 성숙으로 빚어내는 탁월한 연금술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가 아니라, 은혜의 빛을 머금어 반사하는 반사체로 살 때 비로소 지치지 않고 강해질 수 있습니다.

무대 뒤에서 묵묵히 뿌리는 눈물의 씨앗

은혜로 채워진 내면은 필연적으로 흘러넘쳐 이웃에게로 향합니다. 바울은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며 복음의 계승을 명합니다. 이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이 아니라, 생명을 나누는 산파술에 가깝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한 명의 슈퍼스타가 이끄는 독주 무대가 아닙니다. 장재형 목사는 사역의 초기부터 이 원리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화려한 무대 위가 아니라, 사람을 세우고 살리는 무대 뒤편의 조력자를 자처했습니다.

진정한 복음의 확장은 요한복음이 묘사하듯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처럼 흘러나와 주변을 적시는 것입니다. 군사는 사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소명에 집중하며, 경기자는 편법의 유혹을 뿌리치고 정해진 규칙대로 달립니다. 그리고 농부는 가장 먼저 수고하고 가장 나중에 열매를 거듭니다. 이 비유들은 모두 ‘자기 부인’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합니다. 장재형 목사가 보여준 제자도의 길은 효율과 속도를 숭배하는 현대 사회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인정 욕구를 내려놓고, 당장의 결과보다 과정의 정직함을 택하는 것. 그것은 마치 수고하는 농부가 땀과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행위와 같습니다. 비록 더디게 보일지라도, 그 묵묵한 순종이 쌓여 폭풍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숲을 이루는 법입니다.

겨울을 견딘 나무만이 가장 깊은 봄을 맞이한다

바울은 감옥이라는 한계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단순한 정신 승리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믿음에서 터져 나온 승리의 개가입니다. 신학적 통찰이 삶의 구체적인 위로로 변환되는 순간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속 바울이 족쇄를 차고도 평온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시선이 감옥의 벽이 아닌 부활의 주님께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삶과 설교를 관통하는 핵심 또한 이 ‘부활 신앙’에 있습니다. 그는 오해와 핍박, 사방이 우겨쌈을 당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혹독할수록 봄의 꽃은 더 짙은 향기를 품듯, 고난은 성도를 단련시키는 하나님의 도구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죽으면 함께 살고, 참으면 함께 왕 노릇 하리라.” 이 약속은 막연한 희망 고문이 아닙니다. 매일 아침 말씀을 펴고 삶을 비추어 보는 치열한 성경 묵상을 통해, 우리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생명의 싹을 틔우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감옥과 같은 현실을 마주합니다. 경제적 위기, 관계의 단절, 미래의 불투명함이 우리를 옭아맬 때, 디모데후서 2장의 메시지는 선명한 이정표가 됩니다. 강함은 나의 결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부어지는 은혜만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장재형 목사가 전한 권면처럼, 얽매임을 끊고 단순한 삶으로 돌아가, 주어진 하루를 신실하게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 그리스도인의 품격입니다. 우리는 비록 미쁨이 없어 흔들릴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미쁘시니 우리를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그 변치 않는 신실함에 기대어, 오늘이라는 순례의 길을 다시 묵묵히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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