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 종말의 소망

Ⅰ. 종말론적 관점에서 본 ‘때와 시기’의 의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에서 2절에 이르는 말씀, 즉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 5:1-2)는 초대교회 신앙의 한 축을 잘 보여 준다. 초대교회는 전반적으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다시 오시리라는 생각, 곧 임박한 종말론을 품고 살았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직후, 제자들은 ‘주님이 언제 오실 것인가?’라는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러한 종말론적인 물음을 매우 뜨겁게 묵상하고 토론하던 공동체였다. 특히 바울이 약 3주간(행 17장) 데살로니가에 머물며 회당에서 가르칠 때,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구원론, 그리고 종말론에 관하여 심도 깊은 문답을 지속적으로 주고받았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살전 5:1)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이미 그들의 ‘때’(크로노스)와 ‘시기’(카이로스)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깊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때’(크로노스)와 ‘시기’(카이로스)의 차이는 무엇인가? 헬라어로 크로노스(Chronos)는 양적인 시간을 뜻한다. 시간의 분량, 흐름, 순서 등을 가리키며, 연대기(Chronology), 크로노미터(Chronometer)라는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정확히 측정되고 분할되는 시간’이라는 개념이다. 반면 카이로스(Kairos)는 질적인 변화를 담아내는 ‘특별한 순간’, 곧 시점을 의미한다. 예컨대 한 사람이 결혼식 날을 맞이하면, 그 하루는 단순히 양적으로 흘러가는 날들 중 하나가 아니라 이전과 이후의 삶이 질적으로 변화되는 ‘특별한 날’이 된다. 이것이 카이로스의 개념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역사가 흐르는 크로노스 중에 주님이 다시 오시는 특별한 카이로스의 날, 즉 ‘주의 날’이 임박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성경이 말하는 ‘주의 날’은 구약에서 ‘야훼의 날’ 혹은 ‘여호와의 날’이라 불리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날’, 혹은 ‘주의 재림의 날’로 이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구원의 사역을 이 땅에서 완성하셨고, 부활·승천하심으로 구원 역사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고 하셨으니, 교회는 ‘그 날’을 향해, 즉 종말의 완성의 날을 소망하며 살아간다. 이처럼 성경은 순환론적 역사관을 제시하지 않는다. 동양사상이 흔히 말하듯이 역사가 봄·여름·가을·겨울처럼 반복되는 무의미한 순환을 거듭한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역사가 유일한 시초가 있었고(창조), 종국에는 끝이 있으며(종말), 그 끝에 최후의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한다는 직선론적 역사관을 선포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종말론적 신앙을 품었다는 것은, 이 교회가 언제나 ‘주님이 곧 다시 오신다’는 긴장감과 거룩한 소망 안에서 살았다는 뜻이다. 이들은 핍박과 환난이 많고 거짓 가르침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머지않아 임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억울함과 고난을 다 씻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굳게 붙들었다. 마태복음 10장 23절에서 예수님이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하셨듯이, 그들에게 있어서 주님의 재림은 언제 어떻게 실현될지 모를 만큼 임박한 실재였다. 더불어 사도행전 1장에서 천사가 말하기를, “왜 하늘을 쳐다보느냐? 예수께서 그대로 오시리라.”라고 선언했으니, 이것이 초대교회가 매일을 살아가는 동력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와 데살로니가후서를 통해 종말론적 물음에 대한 답변을 구체적으로 제공해 준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는 죽은 자들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물음(죽은 자들의 부활과 휴거 문제)에 대해 답을 주고, 5장에서는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 5:2)라고 하며 시기 설정 문제로 너무 얽매이지 말 것을 권면한다. 바울은 ‘때와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징조도 없이 막연히 기다려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도적 같이 온다’는 예수님의 가르침(마 24장, 눅 17장, 막 13장 등 소묵시록)을 재차 강조하면서, 그것을 이미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잘 알고 있다고 확인한다. 또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함을, 그러나 아들조차 그 날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으니 날짜나 연도를 특정하려는 시도는 무익함을 가르친다.

이처럼 종말론은 기독교 교리의 매우 중요한 세 축 중 하나다.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믿음과 삶을 바꾸어 가는 과정에 필수적이라면, 종말론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결속시키는 ‘시간관’과 ‘역사의식’의 핵심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부터 교회가 역사의 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 수많은 논의가 이어져 왔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과 같은 학설들도 그런 갈망의 산물이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서는 휴거와 대환난, 천년왕국 등의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나누고, 후천년설에서는 교회가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점진적으로 확장시켜 결국 그분의 재림을 맞이한다고 본다.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을 상징·비유적으로 이해하며, 지금도 교회 시대가 곧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영적 왕국’이라는 관점에서 종말을 바라본다. 이러한 학설 간의 신학적 논쟁이 존재함에도, 공통점 하나는 ‘종말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그날을 기다리며, 그리고 준비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대명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이런 문제의식을 품고 바울에게 적극적으로 물었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방문했을 때, 교인들은 주님의 재림 시점에 대한 물음을 거듭 내놓았고, 그 답을 바울이 서신으로 보낸 것이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다. 이처럼 신앙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말고 물어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교회사는 증언한다. 고린도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에베소에 있던 바울에게 신앙상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꼼꼼히 물었고(음행 문제, 우상 제물 문제, 은사 문제, 부활 문제 등), 그 답변을 바울이 전해 준 것이 고린도전서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 엄청난 유익이 되었다. 만약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고린도전서와 같은 풍성한 문서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교회 안에서 ‘질문과 답변’의 교류는 신앙의 체계를 세워 가는 핵심적인 과정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종말론에 대해 무질서하게 믿거나 극단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은, 바울이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살전 5:1)이라고 할 만큼 이미 충분한 학습과 토론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로 확인된다. 물론 일부 ‘주의 날이 곧 임박하니 일상의 노동을 중단하자’는 식의 극단적 믿음을 가진 자들도 없지 않았으나, 전체적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면서(살후 3장), 동시에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며 깨어 기도하던 균형 잡힌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바울은 이 교회의 균형감을 높이 평가하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 깨어 근신하도록 계속 권면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나오는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을 살펴보자. ‘도적 같다’는 비유는 구약과 신약 전반에서 재난이나 하나님의 심판, 혹은 주님의 재림이 예고 없이 임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준비되지 않은 자들에게 닥칠 갑작스럽고 참혹한 현실을 묘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말씀은 ‘오직 아버지만 그 날을 아신다’(마 24:36)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부합한다. 즉 사람은 어떤 계산법으로도 재림 시점을 특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는 여러 강론과 저술을 통해, 종말론의 핵심은 “날짜를 추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현재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우리가 그 날과 그 때를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맡기고, 주의 재림이 이 땅에 가져다줄 완전한 구원과 심판을 소망하면서도, 동시에 오늘을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면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는 말씀처럼, 교회가 종말을 논할 때 꼭 명심해야 할 사실은 ‘모든 민족, 모든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 사명’이다. 종말은 교회가 두려움에 굴복하여 세상 도피적인 자세를 취하라고 선포되지 않았다. 오히려 종말의 약속은 “너희가 깨어 준비하여 믿음과 사랑으로 살며, 온 땅에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추동한다.

여기에 비추어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칭찬받은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단순히 ‘재림 날짜 맞추기’에 골몰하지 않고, 주님을 사모하는 열정과 동시에 건강한 신앙 공동체성을 키워 나갔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살전 5:4)라고 했을 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미 빛의 자녀, 낮의 자녀이므로 주의 재림이 그들에겐 도둑처럼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다’라고 밝힌다. 밤에 자는 자들과 달리 그들은 깨어 있으므로, 주님이 언제 오셔도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 또한, 교회가 종말의 때를 이야기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항상 깨어 근신함’이라 말하며, 이 근신과 깨어 있음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복음에 기초한 적극적인 준비’라고 설명한다.

이제 종말론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살펴보자.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육체의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개인적 종말이다. 동시에 역사 전체가 끝나는 시점이 올 것이다. 이는 우주적 종말이자, 주의 재림의 때이다. 바울은 우리의 ‘개인적 종말’은 물론, ‘우주적 종말’에 대해서도 교회가 흔들림 없이 대비하고 있기를 요청한다. 그렇다면 그 대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말씀에 대한 꾸준한 묵상과 믿음과 사랑의 실천이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8)라는 구절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영적 전쟁 속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심장부를 보호하는 흉배(호심경)와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로 무장한다. 그 흉배는 ‘믿음과 사랑’이고, 투구는 ‘구원의 소망’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다시 오심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이라는 흉배로 자신의 영혼과 삶을 지키고, ‘구원의 소망’이라는 투구로 어떤 혼돈의 사상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여기서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다”(살전 5:5)라고 말한다. 빛은 곧 진리를 의미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말씀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며, 종말론적 소망을 품고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이다. 이들은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한다 해도 결코 어둠에 휩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 빛 안에서 깨어 있고, 어느 날 주님이 오시든지 ‘등불을 켜고 기다리는 열 처녀’(마 25장)의 자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데살로니가 교회는 신약 시대에 모범적인 ‘종말론 공동체’로서 칭찬을 받는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역사의 끝날’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이해를 이미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연히 종말을 두려워하거나, 혹은 잘못된 계산법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종말론과 역사의식,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소망과 사랑의 실천을 함께 추구한 것이다. 장재형목사도 이 지점을 여러 번 강조해 왔다. 종말론은 두려움을 부추기거나 날짜를 점쳐서 사람들을 현혹하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에게 ‘어떻게 매일을 살 것인가’, ‘교회가 이 땅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해 주는 소중한 신앙의 근본이다.

Ⅱ. 깨어 근신하는 삶의 필요성과 교회의 사명

이제 데살로니가전서 5장 4절 이하의 말씀, 즉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4-8)를 바탕으로, 초대교회의 종말론적 신앙이 실제로는 어떤 실천적 삶과 교회 사명으로 연결되는지를 살펴보자.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5:4). 이 말은, 준비되고 깨어 있는 사람에게 주의 날은 갑작스러운 공포가 아니라는 뜻이다. 누군가는 ‘도적 같이 온다’는 표현을 듣고서 ‘아무도 그 때를 모른다’는 데만 초점을 맞출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말한다. “너희가 빛의 자녀라면, 도적같이 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빛 가운데서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셨던 ‘열 처녀’ 이야기(마 25:1-13)와도 일맥상통한다.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했고, 나머지 다섯은 그렇지 못했다. 막상 신랑이 도착했을 때, 준비된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했으나, 준비되지 못한 이들은 문이 닫힌 뒤에야 왔다. 그들에게 주님의 재림은 ‘도둑같이’ 느껴졌을 것이고, 문 밖에 선 채 슬픔을 당했다. 그러나 준비된 이들에게는 전혀 도둑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간절히 기다리던 ‘약속의 실현’이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런 준비된 다섯 처녀와 같았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시점을 놓고 불안과 강박에 빠진 것이 아니라, ‘주님은 반드시 오신다’는 믿음을 경주하며, 믿음·사랑·소망의 무장(흉배와 투구)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깨어 근신한다’는 구체적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깨어 있음은 영적으로 방심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방심한다는 것은‘주님을 망각한 채 일상의 유혹과 죄에 빠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종말론적 감각을 잃으면, 세상 가치관이나 물질주의에 쉽게 함몰된다. 그러나 재림을 분명히 믿는 이들은 일상의 노동과 사역 가운데서도 ‘나는 주님의 종이다. 언젠가 주님 앞에서 결산할 날이 올 것이다’라는 의식을 놓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마 25:14-30)에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주인은 반드시 돌아와 종들과 결산한다. 이는 종말론의 또 다른 핵심 가르침이다. 곧 종말론은 ‘나중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잘 지내자’는 막연한 기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 이 순간을 책임감 있게 살라’는 현재적 도전을 촉구한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일을 게을리하거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주님의 날을 사모하면서도, 자신들의 생업을 충실히 감당함으로써 세상 속에서의 책임을 다하려 했다.

둘째, 근신한다는 것은 자기 성찰과 자제를 의미한다. 술 취하는 이들은 밤에 술 취하고(5:7), 밤에 자는 자들은 영적 무감각에 빠져든다. 그러나 빛의 자녀인 우리는 ‘낮에 속했으니’ 세상 풍조에 의해 무방비하게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바울은 이런 면에서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강조한다. 영혼의 중심부, 즉 가슴을 지켜 내는 장치가 믿음과 사랑이란 것이다. 믿음이란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이며, 사랑은 ‘그 믿음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는 실천’이다. 그리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 역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믿음이 우리의 삶을 세워 주는 뿌리라면, 소망은 우리가 바라보는 미래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머리(생각)가 흔들린다. 세상의 어려움을 만날 때, 머리가 혼돈과 절망에 빠져 버린다. 그러나 구원의 소망, 곧 주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선으로 마무리하시고 완성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렇듯 깨어 근신하는 사람은, 종말을 ‘도적같이 임하는 심판의 밤’으로만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날이야말로 ‘주님을 직접 대면하는 구원과 영광의 날’이요,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본향에 이르는 날’이 된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9-10)라고 선포한다. 이는 신자에게 종말이 ‘정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한 구원의 완성’을 의미한다는 핵심 진리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건전한 종말론을 지닌 사람은 불필요한 공포에 휩싸이지 않는다. 동시에 자기 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무책임이나 방종에 빠지지도 않는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 선포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그분의 뜻을 좇아 살며, 장차 맞닥뜨릴 충만한 구원을 사모하고 기쁨으로 예비하는 길을 택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세상과 달리 ‘종말론적 사명’을 늘 인식해야 한다. 교회가 종말론을 잊으면, 현세적 가치와 이익 추구에 매몰될 위험이 크다. 교회가 ‘장차 하나님 나라가 오고, 우리는 그분의 왕국에 참여한다’는 비전을 잃어버리면, 오히려 세상보다 더 세상적인 조직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주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영적 공동체로서, 종말론적 소망을 붙들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적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교회는 단순히 자기 교인수나 세력 확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마 24:14) 사명을 감당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이 땅에서 예배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서로 권면하여 덕을 세우는 것은 모두 ‘주의 다시 오심’이라는 소망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고 말한다. 다른 서신들에서는 때로 교회의 분열과 다툼을 책망하기도 하는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서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모습이 탁월했다. 이는 종말론적 신앙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태도다. 왜냐하면 종말론은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며, 주님이 오실 때 함께 영광에 들어갈 동역자들”이라는 의식을 키우기 때문이다. 그 날이 가까울수록 교회는 더 정결히, 더 간절히, 더 뜨겁게 함께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형제들의 허물을 서로 덮고, 격려하며, 서로가 세워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종말론은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에 직접적인 동기를 부여한다.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빛의 자녀이니, 주의 다시 오심에 대비해 믿음의 삶을 펼쳐 가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곧 종말론적 공동체다.건물이 아니라, 재정을 모으는 기관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리며(마라나타),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구원의 완성을 맞이할 ‘빛의 자녀들’의 모임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에서, 교회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복음을 확장해 나가는 활동이야말로 종말론적 신앙의 직접적 실천이라고 강조한다. ‘지금 여기’에서 천국 문화를 실현하고, 세상의 음지와 소외된 자들을 돌보고, 동시에 주님 오심을 갈망하는 이 복합적인 태도가 바로 ‘깨어 근신하는 삶’이다.

종합해 볼 때,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준 칭찬과 권면은,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가 이미 이 문제(종말론과 때와 시기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깊이 연구하고 토론하여 더 이상 내가 쓸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는 곧 이들이 이미 하나님의 역사와 종말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통찰을 가졌음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더욱이 “너희는 빛의 자녀이니,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할 수 없다”는 격려는, 우리가 주님 오심을 사모하고 준비하며, 서로 격려하고 서로 세워 가는 교회로 부름받았다는 정체성을 재확인시켜 준다. 이런 믿음이 온전히 자리잡힐 때, 교회는 세상의 환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복음에 충실하게 된다.

물론, 오늘날 교회 내에서도 종말론이 흔히 오해를 낳는 경우가 있다. 특정 날짜를 예언하거나, 종말 공포심을 부추겨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이단적 움직임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가졌던 ‘균형 잡힌 종말론’을 배워야 한다. 그 균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아무도 그 날과 그 때를 알 수 없으니, 무모한 추산과 사적인 계시를 내세우지 말라”는 것, 또 하나는“그러나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말씀과 선교, 그리고 사랑 실천을 통해 늘 깨어 있어라”는 것이다. 이 두 가르침이 조화를 이루면, 교회는 현세와 내세를 아우르며 건강하게 성장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적 현실도 무시하지 않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이중적 구조를 갖게 된다.

장재형목사가 이러한 주제를 강해할 때, 가장 강조하는 대목 중 하나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도적 같이 임할 그날”이라는 표현만을 들으면 두려움으로 위축되거나, 혹은 막연히 그 날을 계산해 내고자 애쓰는 것으로 치우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이 의도한 바는 명확하다. “너희는 그날이 언제 오더라도 이미 빛 가운데 있으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다만 깨어 근신하라. 믿음과 사랑, 그리고 구원의 소망으로 무장하라.” 이런 확신이 자리하면, 교회는 일상생활에서 오히려 더 큰 기쁨과 생명을 누리게 된다. 종말론이 교회를 음침한 불안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기와 소망으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데살로니가전서 5장 9-10절에서 바울이 강조했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진노)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신약의 복음이다. 종말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구원과 심판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오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 심판마저 구원의 한 과정이며, 주님을 대면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시작점이다. 그래서 “깨든지 자든지, 예수님과 함께 살게 하려 하셨다”(5:10)는 구절이 그들의 운명을 확정한다. 바울은 이렇듯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토록 궁금해하던 종말론적 문제에 명쾌한 결론을 제시한다. ‘주의 날’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성도의 구원 완성의 때다. 그러므로 교회는 서로를 권면하고 덕을 세우면서 그 날을 대비하라고 당부한다.

현대 교회에서도 여전히, 혹은 더더욱 이 종말론적 신앙과 태도가 필요하다. 세상은 점점 혼란과 갈등 속으로 치닫고, 사람들은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느끼며 불안을 호소한다. 이럴 때 교회가 줄 수 있는 대답은 “이제 곧 온 세상이 망할 것이니, 두려워하고 숨어 있어라”가 아니다. 교회가 전해야 할 소식은 “주님이 다시 오시며, 그날에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다. 그러므로 깨어 근신하며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자”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리고 그것이 ‘등을 준비하는 열 처녀의 모습’이며, ‘달란트를 장사해 남기는 착하고 충성된 종의 자세’다. 그러할 때, 주님이 오시는 어느 날이라도 우리는 그분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흐르는 종말론적 메시지는, 교회가 어떻게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시종일관 가르쳐 준다. 주의 날은 밤에 도적같이 이르지만, ‘빛의 자녀’인 우리는 그 날이 결코 우리를 기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빛 가운데 깨어 근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거듭 상기시키면서, “오늘날 교회가 종말론을 단지 말세 공포나 자극적인 예언으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종말론은 교회를 더욱 건강하게, 더욱 선교적으로, 더욱 사랑이 충만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도구다”라고 가르친다. 과거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모든 시대의 교회도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Maranatha)’라는 외침 속에서 서로 덕을 세우고 서로를 권면하며, 주님의 나팔 소리가 울릴 때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이렇게 두 소주제로 나누어 살펴본 데살로니가전서 5장의 종말론적 교훈은, 곧 우리에게 다음을 강조한다. 첫째,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분명히 주님은 오신다.’ 그리고 둘째, ‘도적같이 임하는 그 날이 빛의 자녀에게는 결코 도적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늘 깨어 근신함으로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된 후에야 끝이 올 것(마 24:14)이라 말씀하셨기에, 교회는 종말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해야 한다.

결국 종말론은 교회를 현실 도피가 아닌 현실 변혁으로 나아가게 하는 ‘굳건한 믿음의 동력’이다. 핍박과 어려움 중에서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주의 날’을 소망했고, 그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향해 한없이 따뜻한 칭찬과 권면을 섞어 편지를 썼다. 오늘날에도 우리 교회가 이 칭찬을 받기를 소망한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미 충분히 깊은 말씀의 토론과 묵상이 이루어지되, 동시에 날마다 사랑 안에서 성도들을 권면하고 세우는 ‘빛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는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등불을 밝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올바른 종말론적 신앙을 통해 세상을 섬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 오시는 날, 우린 그분과 함께 참된 안식과 영광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전했던 복된 약속이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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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동행 –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와 동료들

이 글에서는 마가복음 14장 32-42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중점적으로 다루되, 장재형목사가 강조해 온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라는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성경 본문에서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과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그 고독한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신앙의 핵심 가치를 되새기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메시지와 함께 장재형목사가 전하고자 하는 주요 가르침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전개는 여러 소주제나 구분 없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며,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장면이 우리 각자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성찰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마가복음 14장에 기록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마친 후 감람산 기슭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고, 거기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한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일반적으로 ‘감람산’은 올리브나무 숲이 가득하며, 그 가운데 ‘겟세마네’는 ‘채유소’, 즉 올리브 열매를 짜서 기름을 얻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장소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올리브 기름이 가져다주는 두 가지 상징, 즉 평화와 영원성, 그리고 메시아에게 기름 부음을 주던 전통을 함께 묵상해 볼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히브리어로 ‘메시야’, 헬라어로 ‘크리스토스’라는 표현이 모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즉 기름 부음받은 왕으로서 겟세마네 동산에 계셨음에도, 여기서 제자들에게는 그분을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우는 장면이 아니라 오히려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며 십자가 수난을 준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왕으로 즉위하셔야 할 분이 극도로 비참한 기도를 드리시는 장면이기에, 성경 전체에서 매우 강렬하고도 역설적인 대조를 형성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마태·마가·누가복음에 공통적으로 기록된 대단히 중요한 본문이지만,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특징이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에 대해, 요한이 이미 13장부터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는 길을 완전히 수락하셨음을 조명했기에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자신이 ‘이제 영광을 받았다’고 선언하셨고, 제자들에게 종말론적 당부와 고별 설교를 남기셨습니다. 즉, 십자가 수난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당신은 스스로 그 길을 ‘영광’이라 선포하심으로 결단하셨다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주님은 갈보리 언덕 이전부터 이미 그리스도의 길을 선택하셨다. 요한은 예수님의 내면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수용하는 왕적 위엄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에 겟세마네 기도를 생략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가 기록한 겟세마네 기도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인간적 고민’과 ‘극렬한 통곡’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14장 33-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참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께 ‘아바 아버지’라 간구하며 끝까지 순종하신 고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께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 그분 안에는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처절한 길인지, 또 그 길을 가는 데 있어 인간적 떨림과 고통이 없을 수 없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스스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고백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복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장재형목사가 자주 강조해 왔듯, 예수님이 사실상 십자가를 지는 길을 ‘피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이나 마가복음 14장에 드러난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 죽음 앞에서 느끼는 극심한 두려움과 고통을 토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이어집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단하고는 있지만, 종종 우리의 의지와 감정은 연약하기 때문에 다른 길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들이 많다. 예수님 또한 그 순간을 겪으셨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을 붙들고 끝까지 걸어가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본을 보여주셨다”고 풀이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모든 이가 반드시 직면해야 할 도전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는 진리입니다.

한편,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를 올리시는 동안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식사 자리에서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큰 소리를 쳤는데, 예수님은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로 들어와서 기도하시는 동안에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들어 버립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시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주님께는 지금이 가장 절박한 시간이고, 일생일대의 영적 투쟁이 벌어지는 중인데, 제자들은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밤에 산책을 나온 사람들처럼 무심하게 잠에 든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종종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엄중한 순간에 우리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버릴 때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제자들은 허둥지둥 도망쳐 버리는데, 마가복음 14장 51-52절에는 베 홑이불을 두르고 따라오던 한 청년이 붙잡히자 홑이불을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전통적으로 이 ‘한 청년’을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자신의 집에서 최후의 만찬이 있었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감람산으로 나아가자, 밤중에 일단 잠들어 있던 마가가 뒤늦게 모든 상황을 감지하고 황급히 예수님을 따라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도 두려움 앞에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친다”라고 설명합니다. 마가는 이토록 부끄러운 장면을 자기 복음서에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기록함으로써, 인간적인 연약함이 얼마나 쉽게 드러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연약함조차도 결국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정직한 신앙고백’의 모범이라 칭하며, “마가는 자신이 부끄러운 존재임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런 자신도 변화시키신 주님의 은혜를 자랑하기 위해 이 장면을 그대로 쓴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약점을 숨기기보다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길을 열어 놓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셔야 마땅한 예수님께서 오히려 고통과 슬픔 속에 땀을 핏방울같이 흘리시는 비극적인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완전히 받아들여지기까지, 즉 예수가 진실로 ‘기름 부음받은 이’로 공인되고 고백되기까지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불가피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분의 길을 함께 걸어갈 영적·신앙적 성숙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홀로 고독의 길을 가야 했고, 그 절정이 바로 겟세마네의 땀방울과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였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에 대해,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도 떡과 포도주를 받고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나, 곧 이어서 펼쳐질 고난의 현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유월절에 희생된 양의 피가 기드론 시내로 흘러내려 붉게 물들어 있는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도, 주님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를 선명히 알지 못했다. 주님은 홀로 그 붉은 물살을 건너 겟세마네로 들어가셨고, 이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고독하고 처절한 순간,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이는 아람어 ‘아바’(아빠)와 헬라어 ‘파테르’(아버지)가 결합된 표현으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맺고 계신 친밀하고도 절대적인 신뢰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에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 부르셨으나, 이 고통의 골짜기에서 그분은 더욱 간절하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아빠 아버지여”라 부르며 부르짖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을 때 가장 큰 유혹은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하는 의심이 생길 때다. 예수님조차 그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아바 아버지’를 찾으심으로, 인간적인 두려움의 순간에 우리도 전적으로 아버지를 신뢰해야 한다는 본을 보이셨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우리는 죽음의 세력이 가장 강력하게 덮쳐 올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을 놓지 말아야 하며,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의 기도 안에 ‘수단’으로서의 기도가 아니라 ‘순종’을 낳는 기도로서의 본질이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셨으나, 결국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결론지으셨습니다. 이 장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우리는 종종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바꿔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나를 바꾸도록’ 내어맡기는 태도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도의 정수는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뜻과 감정을 초월해 아버지께 끝까지 복종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된 기도의 목표”라고 강조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길을 따를 힘을 주는 근원적 모범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약함을 지닌 제자들은 이 기도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잠들었고, 야고보와 요한도 주님의 절박함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시며,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권면하셨으나, 그들은 여전히 무감각한 상태였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들을 ‘교회 내의 인간적인 모습’으로 비유하면서, “세상에서는 큰소리치고 대범해 보이는 신자도, 실상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잠들어 버리거나 도망가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고,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욱 겟세마네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하며, 베드로처럼 망령된 자신감을 내세우기보다, 예수님처럼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후 예수님은 세 번째 기도 후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라고 하시며, 십자가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군병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몰려오자 제자들은 흩어집니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는 “아무리 강한 결심과 의지를 보여도, 결국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넘어지기 쉽다.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실제로는 가장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을 부인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가 넘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돌이키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곧 우리가 넘어지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지라도 주님께서 돌이킴의 은혜를 주신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됩니다.

결국,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죽음의 잔’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 수용하셨고,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신 현장이 바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방관자나 구경꾼의 위치로 남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며, 주님 안에 주어진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고 역설합니다. 즉, 겟세마네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순종의 길을 우리 또한 믿음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고독하고 비극적으로 보일지라도, 부활의 영광이 그 끝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한편, 요한복음이 겟세마네 기도를 생략한 것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영광으로 선포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의 인간적 고뇌 부분을 생략하는 편집 의도를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다시 한 번 짚어 줍니다. 요한복음은 17장의 고별 기도를 통해 세상과 제자들을 위해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왕적’ 위엄을 더욱 부각합니다. 반면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고통을 당하셨고,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기도를 드리셨는가에 포커스를 둡니다. 이 둘은 결코 모순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더 풍부하게 보여주는 보완적 시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도 종종 겟세마네 같은 어려움을 맞이한다. 세상에서 기드론 시내처럼 붉은 피의 흔적을 보며 때로 두렵고 떨리기도 하고, 아무도 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해 외롭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길을 이미 가셨고, 우리에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본을 남겨주셨다. 우리가 그 기도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때, 주님과 동행하는 길은 분명히 고독을 넘어 부활의 환희로 이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겟세마네와 갈보리 언덕은 고통이 극심하게 드러나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는 자리라는 진리가 우리에게 제시됩니다.

더 나아가, 겟세마네 사건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모두를 돌아보게 하는 ‘영적 거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며, 어쩌면 마가처럼 겨우 홑이불만 두른 채 뛰어갔다가 결국 도망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적인 결심과 맹세가 얼마나 한계가 뚜렷한지를 지적하면서, “베드로처럼 어떠한 어려움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큰소리쳐도, 하나님 앞에 깨어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작은 자극 하나에도 무너지고 만다. 그러므로 신앙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과 기도를 통해서만 단단해진다”고 합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열심보다 내면의 겸손과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14장 후반부에 보면, 예수님이 실제로 체포되시고 대제사장들 앞에서 신문받으시는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베드로는 정확히 예수님의 예언대로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맙니다. 닭이 울자마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죠.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인간적인 비참함과 눈물을 지적하면서, “우리는 실패하고 넘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베드로를 찾아가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다. 이는 겟세마네 기도에서 십자가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죄인인 우리를 얼마나 끝까지 붙드시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만든다”고 설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며, 때로는 고독하고 외롭고 눈물겨운 길임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길을 주님이 먼저 가셨기에, 그리고 그 길에서 제자들의 모든 실패까지도 주님이 포용하셨기에, 우리가 실패한다 할지라도 다시금 회복될 수 있는 길이라는 희망이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바로 이 ‘부활의 희망으로 이끌어가는 고난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겟세마네와 같은 어둠과 슬픔, 홀로 씨름해야 할 시험을 맞닥뜨릴 수 있으나, 기도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며 나아갈 때 우리 또한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을 통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첫째, 예수님도 인간적인 두려움과 고통을 겪으셨고, 우리 역시 그러한 시험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둘째, 그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를 부르짖으셨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라는 복종은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이를 위해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넷째, 제자들처럼 잠에 빠지거나 도망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도 솔직히 인정해야 하며, 그 연약함 속에 임하는 주님의 은혜로 인해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결국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점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십자가는 인간적인 최악의 절망이지만, 부활이라는 최후의 소망으로 이어지는 통로이며, 그 길에서 우리의 믿음은 성숙해집니다.

이처럼 겟세마네와 갈보리는 단순히 2000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영적 현실을 비추어 줍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에 주목하며, “우리는 너무 쉽게 제자들을 비난하지만, 사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라고 물어봐야 한다. 그 질문을 통해 자기 자신도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날 잠재력을 가진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 훨씬 더 큰 겸손과 회개의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신앙은 ‘내가 강해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끝까지 붙들어 주시고, 우리가 연약함을 인정하며 은혜를 구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나아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각종 위기와 유혹을 만날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처럼 그저 의지로 버티다가 결국 도망치거나 무너져 버리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처럼 아버지 앞에 모든 것을 토로하며 “아버지의 원대로 되길 원합니다”라는 고백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 후자의 길이, 장재형목사가 끊임없이 설파해 온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실질적 모습입니다.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먼저 그 길을 가셨고, 부활하심으로써 그 길이 결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따를 때, 비록 인간적인 약함과 눈물이 따른다 해도, 마지막에는 부활의 능력이 펼쳐지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맛보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틀어 우리는 ‘기도’의 역할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가장 힘겨운 순간에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의 자리에 가셨고, 그들이 함께 깨어 기도하기를 원하셨을까요? 장재형목사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 마음의 항복을 이끌어낸다. 기도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교만의 표현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코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제자들도 깨어 기도하기를 원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동안 어떤 의미 있는 역할도 하지 못하고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 후에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기도의 자리’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복음 전파 사명을 맡기십니다. 결국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초대교회 부흥을 일으키는 주역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정적이고 결단력 있어 보인다 해도, 기도를 잃어버리면 베드로와 같이 작은 유혹 앞에서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의 주님처럼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어떤 시험도 결국 극복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점에서 “교회가 이 땅에서 설 자리를 잃고, 개인의 신앙이 깊은 내면적 능력을 잃어버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진정한 의미의 겟세마네 기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겟세마네 기도는 간절함과 절실함,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순종을 담고 있는데, 이를 놓치면 우리도 잠자고, 멀리 도망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순절 기간이나 특별 새벽기도회 등 특정 절기에만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자리에서 늘 겟세마네를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피할 수 없는 결단을 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하는 영적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거룩한 반복’이라 부릅니다. 즉, 역사 속에서 단 한 번 있었던 겟세마네의 이야기가 오늘도 우리 안에서 반복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가처럼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끝내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복음서의 저자로 세워지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세 번씩 주님을 부인했다 해도, 다시금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부여받고 장차 교회 기둥으로 쓰임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렇듯, 마가복음에 기록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은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가장 강렬한 예시이자, 제자들의 연약함과 예수님의 인자하심이 극명히 대비되는 자리입니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은 결국 이 겟세마네 영성에서 비롯됩니다. 아무리 무서운 죽음이 다가온다 해도, 아바 아버지를 향한 절대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내 원대로 하지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외롭고 고독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그 길을 먼저 가셨고, 그 길이 영원한 승리로 이어졌음을 우리는 부활 사건을 통해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믿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과제입니다.

이러한 겟세마네 사건을 정리하며, 장재형목사는 우리 각자가 ‘내가 피하고 싶은 십자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라고 조언합니다. “혹은 내가 잠들어 버리고 있는 고난은 무엇이며,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매달려야 할 일은 무엇인가? 또 나는 지금 베드로처럼 ‘주를 위해 목숨도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실상은 쉬지 못할 잠에 빠져 있거나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들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진실하게 답해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와 한층 더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더 이상 인간적인 힘이나 의지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늘 “신앙은 나의 결단 위에 서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과 예수님이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신 순종 위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순종에 발붙여, 우리 역시 삶의 크고 작은 겟세마네를 만나게 될 때마다 “아바 아버지”를 부르짖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신뢰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라는 영적 현실을 우리 일상에서 구체화시키는 열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신앙 행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밤중에 흘리는 눈물과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그 기도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이미 선언하신 구원과 생명의 능력을 우리 삶에 실제로 펼쳐 보이십니다.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에 담긴 예수님의 기도와 제자들의 연약함, 그리고 결국 십자가의 길을 향해 굳게 일어나신 예수님의 순종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상기하게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주님은 홀로 그 길을 가셨다. 제자들은 자고 있었고, 누군가는 도망쳤으며, 다른 누군가는 배신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길은 본래부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 치의 후퇴 없이 그 길을 가셨고, 그 길의 종착지는 부활이라는 승리였다”고 말합니다. 이 메시지는 예나 지금이나 제자도로 초청받은 모든 이에게 변함없이 유효하며, 우리 각자를 향해 ‘함께 가자’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초청입니다.

정리하자면, 장재형목사가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강조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은 다음과 같은 함의를 지닙니다. 첫째, 우리의 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되, 그 약함을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이 우리 의지와 다를 때에도, 나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이 더 선하고 옳음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어떤 강한 결심과 맹세도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넷째, 비록 내가 실패한다 해도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에도 제자를 버리지 않으셨듯, 우리 역시 다시 일으키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부활의 영광을 내포하는 역설적 상징이기에, 지금 눈앞에 보이는 고난에만 매몰되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달려갈 때 그 영광을 맛보게 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결국 겟세마네 기도를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내 인생에서 지금 겪고 있는 혼돈과 시련이 어떤 의미인가? 그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하게 만듭니다. 주님은 그 끝에 분명한 답을 주십니다. 내가 부담스러워하고 피하고 싶은 십자가가 있다면, 그 십자가 너머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영광과 부활의 승리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절정이며, 장재형목사가 거듭거듭 전해 온 복음의 실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겟세마네에서 통곡하던 예수님을 향해 비로소 깨어 일어나 함께 걸어가는 결단입니다. 이제 더는 자고 있지 말고, 또 도망가지 말고, 주님과 함께 가는 진정한 동행자로 서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요약하면, 겟세마네의 기도는 예수님이 가지신 인간적 약함과 신적 순종의 역설을 여실히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기도’로 나아가야 함을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겟세마네 영성의 중요성을 수없이 설파해 왔으며, 그 핵심은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과 동행하려면 우리도 겟세마네의 통곡을 치러야 하고, 십자가를 감당해야 하며, 끝내 그 길이 영광으로 가는 길임을 믿어야 한다”라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깨어 기도하며 겟세마네를 다시금 내 삶의 현장에 구현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동행이야말로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된 길이 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록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이 드러나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시고도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의 실패와 눈물도 마침내는 주님의 부활 능력 안에서 회복되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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