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종말론적 관점에서 본 ‘때와 시기’의 의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에서 2절에 이르는 말씀, 즉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 5:1-2)는 초대교회 신앙의 한 축을 잘 보여 준다. 초대교회는 전반적으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다시 오시리라는 생각, 곧 임박한 종말론을 품고 살았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직후, 제자들은 ‘주님이 언제 오실 것인가?’라는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러한 종말론적인 물음을 매우 뜨겁게 묵상하고 토론하던 공동체였다. 특히 바울이 약 3주간(행 17장) 데살로니가에 머물며 회당에서 가르칠 때,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구원론, 그리고 종말론에 관하여 심도 깊은 문답을 지속적으로 주고받았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살전 5:1)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이미 그들의 ‘때’(크로노스)와 ‘시기’(카이로스)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깊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때’(크로노스)와 ‘시기’(카이로스)의 차이는 무엇인가? 헬라어로 크로노스(Chronos)는 양적인 시간을 뜻한다. 시간의 분량, 흐름, 순서 등을 가리키며, 연대기(Chronology), 크로노미터(Chronometer)라는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정확히 측정되고 분할되는 시간’이라는 개념이다. 반면 카이로스(Kairos)는 질적인 변화를 담아내는 ‘특별한 순간’, 곧 시점을 의미한다. 예컨대 한 사람이 결혼식 날을 맞이하면, 그 하루는 단순히 양적으로 흘러가는 날들 중 하나가 아니라 이전과 이후의 삶이 질적으로 변화되는 ‘특별한 날’이 된다. 이것이 카이로스의 개념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역사가 흐르는 크로노스 중에 주님이 다시 오시는 특별한 카이로스의 날, 즉 ‘주의 날’이 임박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성경이 말하는 ‘주의 날’은 구약에서 ‘야훼의 날’ 혹은 ‘여호와의 날’이라 불리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날’, 혹은 ‘주의 재림의 날’로 이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구원의 사역을 이 땅에서 완성하셨고, 부활·승천하심으로 구원 역사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고 하셨으니, 교회는 ‘그 날’을 향해, 즉 종말의 완성의 날을 소망하며 살아간다. 이처럼 성경은 순환론적 역사관을 제시하지 않는다. 동양사상이 흔히 말하듯이 역사가 봄·여름·가을·겨울처럼 반복되는 무의미한 순환을 거듭한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역사가 유일한 시초가 있었고(창조), 종국에는 끝이 있으며(종말), 그 끝에 최후의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한다는 직선론적 역사관을 선포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종말론적 신앙을 품었다는 것은, 이 교회가 언제나 ‘주님이 곧 다시 오신다’는 긴장감과 거룩한 소망 안에서 살았다는 뜻이다. 이들은 핍박과 환난이 많고 거짓 가르침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머지않아 임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억울함과 고난을 다 씻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굳게 붙들었다. 마태복음 10장 23절에서 예수님이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하셨듯이, 그들에게 있어서 주님의 재림은 언제 어떻게 실현될지 모를 만큼 임박한 실재였다. 더불어 사도행전 1장에서 천사가 말하기를, “왜 하늘을 쳐다보느냐? 예수께서 그대로 오시리라.”라고 선언했으니, 이것이 초대교회가 매일을 살아가는 동력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와 데살로니가후서를 통해 종말론적 물음에 대한 답변을 구체적으로 제공해 준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는 죽은 자들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물음(죽은 자들의 부활과 휴거 문제)에 대해 답을 주고, 5장에서는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 5:2)라고 하며 시기 설정 문제로 너무 얽매이지 말 것을 권면한다. 바울은 ‘때와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징조도 없이 막연히 기다려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도적 같이 온다’는 예수님의 가르침(마 24장, 눅 17장, 막 13장 등 소묵시록)을 재차 강조하면서, 그것을 이미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잘 알고 있다고 확인한다. 또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함을, 그러나 아들조차 그 날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으니 날짜나 연도를 특정하려는 시도는 무익함을 가르친다.
이처럼 종말론은 기독교 교리의 매우 중요한 세 축 중 하나다.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믿음과 삶을 바꾸어 가는 과정에 필수적이라면, 종말론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결속시키는 ‘시간관’과 ‘역사의식’의 핵심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부터 교회가 역사의 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 수많은 논의가 이어져 왔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과 같은 학설들도 그런 갈망의 산물이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서는 휴거와 대환난, 천년왕국 등의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나누고, 후천년설에서는 교회가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점진적으로 확장시켜 결국 그분의 재림을 맞이한다고 본다.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을 상징·비유적으로 이해하며, 지금도 교회 시대가 곧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영적 왕국’이라는 관점에서 종말을 바라본다. 이러한 학설 간의 신학적 논쟁이 존재함에도, 공통점 하나는 ‘종말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그날을 기다리며, 그리고 준비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대명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이런 문제의식을 품고 바울에게 적극적으로 물었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방문했을 때, 교인들은 주님의 재림 시점에 대한 물음을 거듭 내놓았고, 그 답을 바울이 서신으로 보낸 것이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다. 이처럼 신앙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말고 물어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교회사는 증언한다. 고린도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에베소에 있던 바울에게 신앙상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꼼꼼히 물었고(음행 문제, 우상 제물 문제, 은사 문제, 부활 문제 등), 그 답변을 바울이 전해 준 것이 고린도전서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 엄청난 유익이 되었다. 만약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고린도전서와 같은 풍성한 문서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교회 안에서 ‘질문과 답변’의 교류는 신앙의 체계를 세워 가는 핵심적인 과정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종말론에 대해 무질서하게 믿거나 극단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은, 바울이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살전 5:1)이라고 할 만큼 이미 충분한 학습과 토론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로 확인된다. 물론 일부 ‘주의 날이 곧 임박하니 일상의 노동을 중단하자’는 식의 극단적 믿음을 가진 자들도 없지 않았으나, 전체적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면서(살후 3장), 동시에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며 깨어 기도하던 균형 잡힌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바울은 이 교회의 균형감을 높이 평가하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 깨어 근신하도록 계속 권면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나오는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을 살펴보자. ‘도적 같다’는 비유는 구약과 신약 전반에서 재난이나 하나님의 심판, 혹은 주님의 재림이 예고 없이 임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준비되지 않은 자들에게 닥칠 갑작스럽고 참혹한 현실을 묘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말씀은 ‘오직 아버지만 그 날을 아신다’(마 24:36)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부합한다. 즉 사람은 어떤 계산법으로도 재림 시점을 특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는 여러 강론과 저술을 통해, 종말론의 핵심은 “날짜를 추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현재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우리가 그 날과 그 때를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맡기고, 주의 재림이 이 땅에 가져다줄 완전한 구원과 심판을 소망하면서도, 동시에 오늘을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면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는 말씀처럼, 교회가 종말을 논할 때 꼭 명심해야 할 사실은 ‘모든 민족, 모든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 사명’이다. 종말은 교회가 두려움에 굴복하여 세상 도피적인 자세를 취하라고 선포되지 않았다. 오히려 종말의 약속은 “너희가 깨어 준비하여 믿음과 사랑으로 살며, 온 땅에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추동한다.
여기에 비추어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칭찬받은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단순히 ‘재림 날짜 맞추기’에 골몰하지 않고, 주님을 사모하는 열정과 동시에 건강한 신앙 공동체성을 키워 나갔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살전 5:4)라고 했을 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미 빛의 자녀, 낮의 자녀이므로 주의 재림이 그들에겐 도둑처럼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다’라고 밝힌다. 밤에 자는 자들과 달리 그들은 깨어 있으므로, 주님이 언제 오셔도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 또한, 교회가 종말의 때를 이야기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항상 깨어 근신함’이라 말하며, 이 근신과 깨어 있음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복음에 기초한 적극적인 준비’라고 설명한다.
이제 종말론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살펴보자.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육체의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개인적 종말이다. 동시에 역사 전체가 끝나는 시점이 올 것이다. 이는 우주적 종말이자, 주의 재림의 때이다. 바울은 우리의 ‘개인적 종말’은 물론, ‘우주적 종말’에 대해서도 교회가 흔들림 없이 대비하고 있기를 요청한다. 그렇다면 그 대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말씀에 대한 꾸준한 묵상과 믿음과 사랑의 실천이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8)라는 구절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영적 전쟁 속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심장부를 보호하는 흉배(호심경)와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로 무장한다. 그 흉배는 ‘믿음과 사랑’이고, 투구는 ‘구원의 소망’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다시 오심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이라는 흉배로 자신의 영혼과 삶을 지키고, ‘구원의 소망’이라는 투구로 어떤 혼돈의 사상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여기서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다”(살전 5:5)라고 말한다. 빛은 곧 진리를 의미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말씀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며, 종말론적 소망을 품고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이다. 이들은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한다 해도 결코 어둠에 휩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 빛 안에서 깨어 있고, 어느 날 주님이 오시든지 ‘등불을 켜고 기다리는 열 처녀’(마 25장)의 자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데살로니가 교회는 신약 시대에 모범적인 ‘종말론 공동체’로서 칭찬을 받는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역사의 끝날’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이해를 이미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연히 종말을 두려워하거나, 혹은 잘못된 계산법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종말론과 역사의식,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소망과 사랑의 실천을 함께 추구한 것이다. 장재형목사도 이 지점을 여러 번 강조해 왔다. 종말론은 두려움을 부추기거나 날짜를 점쳐서 사람들을 현혹하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에게 ‘어떻게 매일을 살 것인가’, ‘교회가 이 땅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해 주는 소중한 신앙의 근본이다.
Ⅱ. 깨어 근신하는 삶의 필요성과 교회의 사명
이제 데살로니가전서 5장 4절 이하의 말씀, 즉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4-8)를 바탕으로, 초대교회의 종말론적 신앙이 실제로는 어떤 실천적 삶과 교회 사명으로 연결되는지를 살펴보자.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5:4). 이 말은, 준비되고 깨어 있는 사람에게 주의 날은 갑작스러운 공포가 아니라는 뜻이다. 누군가는 ‘도적 같이 온다’는 표현을 듣고서 ‘아무도 그 때를 모른다’는 데만 초점을 맞출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말한다. “너희가 빛의 자녀라면, 도적같이 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빛 가운데서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셨던 ‘열 처녀’ 이야기(마 25:1-13)와도 일맥상통한다.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했고, 나머지 다섯은 그렇지 못했다. 막상 신랑이 도착했을 때, 준비된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했으나, 준비되지 못한 이들은 문이 닫힌 뒤에야 왔다. 그들에게 주님의 재림은 ‘도둑같이’ 느껴졌을 것이고, 문 밖에 선 채 슬픔을 당했다. 그러나 준비된 이들에게는 전혀 도둑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간절히 기다리던 ‘약속의 실현’이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런 준비된 다섯 처녀와 같았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시점을 놓고 불안과 강박에 빠진 것이 아니라, ‘주님은 반드시 오신다’는 믿음을 경주하며, 믿음·사랑·소망의 무장(흉배와 투구)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깨어 근신한다’는 구체적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깨어 있음은 영적으로 방심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방심한다는 것은‘주님을 망각한 채 일상의 유혹과 죄에 빠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종말론적 감각을 잃으면, 세상 가치관이나 물질주의에 쉽게 함몰된다. 그러나 재림을 분명히 믿는 이들은 일상의 노동과 사역 가운데서도 ‘나는 주님의 종이다. 언젠가 주님 앞에서 결산할 날이 올 것이다’라는 의식을 놓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마 25:14-30)에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주인은 반드시 돌아와 종들과 결산한다. 이는 종말론의 또 다른 핵심 가르침이다. 곧 종말론은 ‘나중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잘 지내자’는 막연한 기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 이 순간을 책임감 있게 살라’는 현재적 도전을 촉구한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일을 게을리하거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주님의 날을 사모하면서도, 자신들의 생업을 충실히 감당함으로써 세상 속에서의 책임을 다하려 했다.
둘째, 근신한다는 것은 자기 성찰과 자제를 의미한다. 술 취하는 이들은 밤에 술 취하고(5:7), 밤에 자는 자들은 영적 무감각에 빠져든다. 그러나 빛의 자녀인 우리는 ‘낮에 속했으니’ 세상 풍조에 의해 무방비하게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바울은 이런 면에서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강조한다. 영혼의 중심부, 즉 가슴을 지켜 내는 장치가 믿음과 사랑이란 것이다. 믿음이란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이며, 사랑은 ‘그 믿음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는 실천’이다. 그리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 역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믿음이 우리의 삶을 세워 주는 뿌리라면, 소망은 우리가 바라보는 미래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머리(생각)가 흔들린다. 세상의 어려움을 만날 때, 머리가 혼돈과 절망에 빠져 버린다. 그러나 구원의 소망, 곧 주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선으로 마무리하시고 완성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렇듯 깨어 근신하는 사람은, 종말을 ‘도적같이 임하는 심판의 밤’으로만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날이야말로 ‘주님을 직접 대면하는 구원과 영광의 날’이요,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본향에 이르는 날’이 된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9-10)라고 선포한다. 이는 신자에게 종말이 ‘정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한 구원의 완성’을 의미한다는 핵심 진리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건전한 종말론을 지닌 사람은 불필요한 공포에 휩싸이지 않는다. 동시에 자기 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무책임이나 방종에 빠지지도 않는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 선포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그분의 뜻을 좇아 살며, 장차 맞닥뜨릴 충만한 구원을 사모하고 기쁨으로 예비하는 길을 택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세상과 달리 ‘종말론적 사명’을 늘 인식해야 한다. 교회가 종말론을 잊으면, 현세적 가치와 이익 추구에 매몰될 위험이 크다. 교회가 ‘장차 하나님 나라가 오고, 우리는 그분의 왕국에 참여한다’는 비전을 잃어버리면, 오히려 세상보다 더 세상적인 조직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주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영적 공동체로서, 종말론적 소망을 붙들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적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교회는 단순히 자기 교인수나 세력 확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마 24:14) 사명을 감당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이 땅에서 예배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서로 권면하여 덕을 세우는 것은 모두 ‘주의 다시 오심’이라는 소망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고 말한다. 다른 서신들에서는 때로 교회의 분열과 다툼을 책망하기도 하는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서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모습이 탁월했다. 이는 종말론적 신앙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태도다. 왜냐하면 종말론은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며, 주님이 오실 때 함께 영광에 들어갈 동역자들”이라는 의식을 키우기 때문이다. 그 날이 가까울수록 교회는 더 정결히, 더 간절히, 더 뜨겁게 함께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형제들의 허물을 서로 덮고, 격려하며, 서로가 세워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종말론은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에 직접적인 동기를 부여한다.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빛의 자녀이니, 주의 다시 오심에 대비해 믿음의 삶을 펼쳐 가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곧 종말론적 공동체다.건물이 아니라, 재정을 모으는 기관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리며(마라나타),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구원의 완성을 맞이할 ‘빛의 자녀들’의 모임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에서, 교회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복음을 확장해 나가는 활동이야말로 종말론적 신앙의 직접적 실천이라고 강조한다. ‘지금 여기’에서 천국 문화를 실현하고, 세상의 음지와 소외된 자들을 돌보고, 동시에 주님 오심을 갈망하는 이 복합적인 태도가 바로 ‘깨어 근신하는 삶’이다.
종합해 볼 때,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준 칭찬과 권면은,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가 이미 이 문제(종말론과 때와 시기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깊이 연구하고 토론하여 더 이상 내가 쓸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는 곧 이들이 이미 하나님의 역사와 종말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통찰을 가졌음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더욱이 “너희는 빛의 자녀이니,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할 수 없다”는 격려는, 우리가 주님 오심을 사모하고 준비하며, 서로 격려하고 서로 세워 가는 교회로 부름받았다는 정체성을 재확인시켜 준다. 이런 믿음이 온전히 자리잡힐 때, 교회는 세상의 환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복음에 충실하게 된다.
물론, 오늘날 교회 내에서도 종말론이 흔히 오해를 낳는 경우가 있다. 특정 날짜를 예언하거나, 종말 공포심을 부추겨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이단적 움직임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가졌던 ‘균형 잡힌 종말론’을 배워야 한다. 그 균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아무도 그 날과 그 때를 알 수 없으니, 무모한 추산과 사적인 계시를 내세우지 말라”는 것, 또 하나는“그러나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말씀과 선교, 그리고 사랑 실천을 통해 늘 깨어 있어라”는 것이다. 이 두 가르침이 조화를 이루면, 교회는 현세와 내세를 아우르며 건강하게 성장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적 현실도 무시하지 않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이중적 구조를 갖게 된다.
장재형목사가 이러한 주제를 강해할 때, 가장 강조하는 대목 중 하나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도적 같이 임할 그날”이라는 표현만을 들으면 두려움으로 위축되거나, 혹은 막연히 그 날을 계산해 내고자 애쓰는 것으로 치우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이 의도한 바는 명확하다. “너희는 그날이 언제 오더라도 이미 빛 가운데 있으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다만 깨어 근신하라. 믿음과 사랑, 그리고 구원의 소망으로 무장하라.” 이런 확신이 자리하면, 교회는 일상생활에서 오히려 더 큰 기쁨과 생명을 누리게 된다. 종말론이 교회를 음침한 불안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기와 소망으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데살로니가전서 5장 9-10절에서 바울이 강조했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진노)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신약의 복음이다. 종말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구원과 심판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오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 심판마저 구원의 한 과정이며, 주님을 대면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시작점이다. 그래서 “깨든지 자든지, 예수님과 함께 살게 하려 하셨다”(5:10)는 구절이 그들의 운명을 확정한다. 바울은 이렇듯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토록 궁금해하던 종말론적 문제에 명쾌한 결론을 제시한다. ‘주의 날’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성도의 구원 완성의 때다. 그러므로 교회는 서로를 권면하고 덕을 세우면서 그 날을 대비하라고 당부한다.
현대 교회에서도 여전히, 혹은 더더욱 이 종말론적 신앙과 태도가 필요하다. 세상은 점점 혼란과 갈등 속으로 치닫고, 사람들은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느끼며 불안을 호소한다. 이럴 때 교회가 줄 수 있는 대답은 “이제 곧 온 세상이 망할 것이니, 두려워하고 숨어 있어라”가 아니다. 교회가 전해야 할 소식은 “주님이 다시 오시며, 그날에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다. 그러므로 깨어 근신하며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자”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리고 그것이 ‘등을 준비하는 열 처녀의 모습’이며, ‘달란트를 장사해 남기는 착하고 충성된 종의 자세’다. 그러할 때, 주님이 오시는 어느 날이라도 우리는 그분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흐르는 종말론적 메시지는, 교회가 어떻게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시종일관 가르쳐 준다. 주의 날은 밤에 도적같이 이르지만, ‘빛의 자녀’인 우리는 그 날이 결코 우리를 기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빛 가운데 깨어 근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거듭 상기시키면서, “오늘날 교회가 종말론을 단지 말세 공포나 자극적인 예언으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종말론은 교회를 더욱 건강하게, 더욱 선교적으로, 더욱 사랑이 충만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도구다”라고 가르친다. 과거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모든 시대의 교회도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Maranatha)’라는 외침 속에서 서로 덕을 세우고 서로를 권면하며, 주님의 나팔 소리가 울릴 때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이렇게 두 소주제로 나누어 살펴본 데살로니가전서 5장의 종말론적 교훈은, 곧 우리에게 다음을 강조한다. 첫째,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분명히 주님은 오신다.’ 그리고 둘째, ‘도적같이 임하는 그 날이 빛의 자녀에게는 결코 도적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늘 깨어 근신함으로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된 후에야 끝이 올 것(마 24:14)이라 말씀하셨기에, 교회는 종말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해야 한다.
결국 종말론은 교회를 현실 도피가 아닌 현실 변혁으로 나아가게 하는 ‘굳건한 믿음의 동력’이다. 핍박과 어려움 중에서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주의 날’을 소망했고, 그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향해 한없이 따뜻한 칭찬과 권면을 섞어 편지를 썼다. 오늘날에도 우리 교회가 이 칭찬을 받기를 소망한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미 충분히 깊은 말씀의 토론과 묵상이 이루어지되, 동시에 날마다 사랑 안에서 성도들을 권면하고 세우는 ‘빛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는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등불을 밝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올바른 종말론적 신앙을 통해 세상을 섬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 오시는 날, 우린 그분과 함께 참된 안식과 영광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전했던 복된 약속이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