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썩지 않을 면류관을 향한 경주

메타 설명: 고린도전서 9장 19–27절을 따라 장재형목사가 밝힌 ‘종 된 자유인’의 역설과 케노시스 사랑, 복음을 위한 선교적 유연성, 썩지 않을 면류관을 향한 자기 절제의 영성을 매끄럽게 해설합니다. 오늘의 삶과 목회 현장에 곧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신학적 깊이와 실천적 통찰을 함께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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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된 자유인, 썩지 않을 면류관을 향한 경주라는 주제는 고린도전서 9장 19–27절을 해석하는 장재형목사의 안내를 가장 농축된 문장으로 요약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이 절은 바울 개인의 다짐을 넘어, 복음이 열어 주는 자유의 본질과 목적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선언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자유’와 ‘종 됨’을 서로 상쇄되는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의 케노시스—자기 비움—안에서 두 개념이 하나로 합쳐진다고 설명한다. 신자는 죄와 율법의 속박에서 풀려났기에 참으로 자유롭다. 그러나 그 자유는 내 욕망을 관철하는 권리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묶을 수 있는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자신을 낮추셨기에, 그 사랑에 붙들린 이는 타인을 위해 종이 되는 선택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거듭 강조하는 그리스도인의 핵심 정체성, 곧‘종 된 자유인’이다.

이 정체성은 신학적 공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에서 출발한다. 장재형목사는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불러와 빌립보서2장의 노래—케노시스—를 신자의 실천 동력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동등됨을 특권으로 붙잡지 않고 스스로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 이 낮아지심은 수동적 굴복이 아니라 능동적 사랑의 선택이며, 바로 그 능동성 때문에 영광으로 높아졌다. 그러므로 ‘종 됨’은 패배나 열등이 아니라 사랑의 자유가 드러나는 가장 영광스러운 방식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음에도 내려놓은 까닭, 보상보다 한 영혼을 더 크게 여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복음 전파는 바울에게 직업이 아니라 소명, 선택이 아니라 응답, 계산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는 자유가 ‘사랑의 멍에’로 변하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바울은 자신이 가진 권리를 내려놓고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그들처럼, 율법 없는 자에게는 그들처럼,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되었다. 이는 기회주의적 처세가 아니라 복음을 위한 다리가 되는 일이다. 동시에 그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에서 벗어난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임을 분명히 했다. 선교적 유연성의 중심에는 변하지 않는 기준, 곧 사랑으로 요약되는 ‘그리스도의 율법’이 있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회당의 언어를 존중하면서도 시장의 언어로도 복음을 말할 줄 알았다고 해설한다. 동일한 복음이 서로 다른 문화권의 귀에 들리게 하려면, 선교자는 타인의 세계로 들어갈 용기가 필요하다. 바울의 ‘변화’는 본질의 타협이 아니라 전달의 최적화였고, 그 동력은 한 영혼이라도 더 얻으려는 사랑이었다.

사랑은 윤리적 판단을 넘어 공동체적 배려로 구체화된다. 우상의 제물 문제로 흔들리던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은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까지 말한다. 자유는 언제나 사랑의 덕을 세우기 위해 스스로 제한된다. 장재형목사는 ‘자유의 자기 제한’이 기독교 윤리의 심장부라고 설명한다. 강한 자의 자유가 약한 지체의 양심을 보호하기 위해 기꺼이 접히는 것, 이것이 제자도의 성숙이다. 물어야 할 질문은 “할 권리가 있는가”가 아니라 “형제를 세우는가”이다. 바울의 삶에는 이 질문이 일상의 판단 기준으로 작동했다. 도망 노비 오네시모를 위해 주인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고, 빚이 있다면 자신이 갚겠다고 약속한 사건은 복음 진리가 관계와 재정, 체면 같은 현실의 지점까지 내려와 몸이 되는 순간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처럼 ‘사랑으로 좁아지는 자유’가 결국 공동체를 살리고 복음을 밝히 드러낸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9장 24절부터 바울의 어조는 선교적 유연성에서 곧장 운동선수의 치열함으로 옮겨간다. 고린도 사람들에게 경기장은 상징적 공간이었다. 이스미아 제전의 달리기와 권투, 승자의 월계관은 도시의 자부심이었다. 바울은 익숙한 이미지를 끌어와 말한다. 모두가 달리지만 상은 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그러니 상을 얻도록 달려라. 세상의 선수도 썩어 없어질 관을 위해 절제한다면, 영원한 면류관을 향한 신자는 얼마나 더 철저해야 하겠는가. 여기서 ‘절제’는 금욕의 폐쇄가 아니라 목표를 향한 집중이다. “나는 목표 없이 달리지 않고, 허공을 치듯 싸우지 않는다.” 방향 없는 열심은 소모이고, 목적 없는 훈련은 자기만족일 뿐이다. 장재형목사는 신앙의 경주가 방향(복음의 영광), 방법(사랑의 법), 동력(케노시스의 은혜)을 동시에 요구한다고 정리한다. 이 셋 중 하나라도 떨어지면 경주는 빗나간다.

경주자의 이미지는 곧 ‘몸’을 다루는 훈련으로 이어진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는 고백은 육체만이 아니라 습관과 감정, 욕망과 시간 사용까지 포괄한다. 장재형목사는 자기 절제를 생활의 언어로 번역한다. 말씀 앞에 시간을 먼저 드리는 배치, 관계에서 ‘빨리 말하고 느리게 듣는’ 본능을 뒤집는 연습,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정결을 지키기 위해 매체 사용을 절제하는 선택, 재정에서 복음을 우선순위에 두는 결단, 쉼을 통해 사명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리듬—제자도의 절제는 삶 전체를 복음의 방향으로 재편성하는 일이다. 이 훈련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사랑의 경제학이다. 더 좋은 것을 위해 좋은 것을 내려놓는 지혜,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나의 편의를 포기하는 용기, 복음의 속도를 위해 나의 속도를 조절하는 절제,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경건의 훈련이다.

그러나 가장 서늘한 문장은 마지막에 온다.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자신은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 바울은 자기 확신으로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그는 은혜 안에서 담대했지만 성찰 앞에서는 떨고 있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떨림을 영적 지도자에게 주어진 거울이라 부른다. 복음의 길을 안내하면서 정작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자각이 제자도를 곧게 지킨다. 여기에는 자기 비하도, 자기 과신도 없다. 은혜 앞에 서는 정직함만이 있다. 은혜는 방종의 면허가 아니라 성결의 동력이고, 자유는 독주의 특권이 아니라 사랑의 책임이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는 ‘능력’보다 ‘복종’을, ‘성과’보다 ‘성실’을, ‘속도’보다 ‘진실’을 다시 배워야 한다. 복음은 과거의 사건이자 미래의 약속이지만, 그것이 오늘 나의 시간표와 언어, 소비와 관계를 뚫고 들어오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허공을 칠 뿐이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마음을 로마서에서 다시 비춘다.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확신 직후,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탄식이 이어진다. 확신과 탄식, 담대함과 눈물—이 긴장 속에서 바울은 길을 걸었다. 이것이 케노시스가 내면화된 사람의 정동이다. 확신 때문에 거만하지 않고, 탄식 때문에 위축되지 않는다. 확신은 방향을 고정하고 탄식은 사랑을 깊게 한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다가갈 수 있었다. 사랑이 본능을 규정하면 자유는 넓어지고, 자유가 사랑과 결합하면 절제는 기쁨이 된다. 사랑, 자유, 절제의 삼중주가 신자의 하루를 구성할 때 우리의 경주는 흔들려도 밀리지 않는다.

오늘의 현실은 바울 시대와 다르지만 핵심은 같다. 플랫폼과 알고리즘, 이미지와 속도가 지배하는 환경에서 자유는 ‘보여줄 권리’로, 절제는 ‘잃을 것’으로 오해되기 쉽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복음의 해석자(설명하는 사람)가 곧 증인(보여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상기시킨다. 증인은 말하기 이전에 보고, 보기 이전에 붙들린 사람이다. 케노시스의 사랑에 붙들리면, 우리는 소유로 자신을 증명하는 대신 비움으로 사랑을 증언한다. 인정 욕구를 절제하는 대신 은혜를 신뢰하고, 내 취향의 확장을 멈추는 대신 타인의 구원을 위해 공간을 낸다. 공동체 안에서는 강한 자의 자유가 약한 자의 양심을 살피는 배려로 표현되고, 세상 속에서는 선한 양심과 예의가 복음의 통로가 된다. 복음은 언제나 ‘그들’의 언어로 들려야 하기에,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낮추고 그들의 언어를 배운다. 이 낮춤이 바로 주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방식이었다.

결국 썩지 않을 면류관은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삶의 방향이다. 면류관을 얻기 위한 계산법이 아니라 면류관을 향해 시간을 배치하고 습관을 조직하는 원리다. 바울이 말한 절제, 경주, 복종은 모두 사랑으로 정의되는 자유의 운동학이다. 상을 얻도록 달리는 사람은 이미 상을 닮아간다. 그의 시간표에는 주님의 마음이 우선 배정되고, 그의 어휘에는 사람을 살리는 말이 먼저 떠오르며, 그의 선택에는 복음이 앞선다. 그가 사는 집과 일터와 교회와 도시가 그 패턴을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런 변화—케노시스의 사랑이 내면을 채우고, 사랑이 자유를 규정하며, 자유가 절제를 기쁘게 만들고, 절제가 삶을 복음의 방향으로 재배열하는 변화—가 고린도전서 9장 19–27절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제자도의 실체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자유를 내세우는 시대에 자유를 주장하기보다 사랑을 선택하고, 성과를 독촉하는 시대에 성실을 견디며, 속도를 찬양하는 시대에 방향을 고정하자.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그러나 언제나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로서 한 영혼이라도 더 얻기 위해 스스로 종이 되는 길을 택하자. 달리기는 계속된다. 허공을 치지 않으려면 오늘도 케노시스의 주님을 바라보며 몸을 쳐 복종하게 하라. 썩지 않을 면류관은 먼 상급이 아니라 오늘의 방향이다. 그 방향을 붙드는 한 우리의 걸음은 비록 흔들려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장재형목사가 펼쳐 보이는 이 길, ‘종 된 자유인’의 길은 곧 주님의 길이며 지금 여기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다.

http://www.davidja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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